진흙속의연꽃

열반 (니르바나)과 해탈 (모크샤)은 같은 말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2. 15. 12:11

 

열반(니르바나)과 해탈(모크샤)은 같은 말일까

 

 

법회가 끝나면 불자들은 사방을 향하여 "성불 하십시요"라고 합장 하며 고개를 숙인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그런데 불자들이 진정으로 성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으례히 인사치레로 하는 말일까.

 

어떤 불자들은 "행불하십시요"라는 말도 한다. 아마도 성불은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선뜻 다가 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중간 단계로서 실천을 강조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현생에서는 도저히 건너가지 못하는 강이기 때문에 수억겁을 지나고 나서 이루어질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 하는 것일까.

 

열반이나 해탈은 같은 말일까

 

모두다 저 멀리 있다고 여겨 지는 성불은 모두다 부처님이 되는 것이 최종목표라 볼 수 있다. 누구나 다 부처님이 된다는 의미에 있어서 불교만치 평등한 종교는 없다. 유일신교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실제로 불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성불'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성불과 비슷한 의미인 열반과 해탈이 있다. 성불은 열반과 해탈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인터넷사전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열반 (불교)  [涅槃, Nirvana]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더욱이 불교 내에서도 소승과 대승의 여러 학파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해탈 (불교)  [解脫, moksha]

 

이는 인간의 영혼이 윤회(samsara)의 속박(bandha)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일단 육체 속에 들어간 뒤에는 해탈을 이루는 완전함이나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를 계속한다. 해탈을 추구하거나 얻는 방법은 학파마다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의 학파가 해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간주한다.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열반과 해탈을 잘 구분하여 사용 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열반이나 해탈이 다 같은 말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도 열반과 해탈을 구분 없이 사용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보았을 열반과 해탈은 다른 말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해탈을 설명 하는 데 있어서도 영혼이 있다라는 '유신견(有身見)'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은 비불교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졋기 때문에 나온 오류라 보여 진다. 열반과 해탈을 좀 더 쉽게 한마디로 설명 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열반(니르바나)- 탐진치 번뇌가 소멸된 상태

 

해탈(모크샤)- 윤회가 끝난 상태

 

 

열반을 한마디로 말하면 탐진치와 같은 번뇌가 소멸된 상태이지만 이 것이 해탈을 말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해탈은 완전히 윤회를 끝낸 상태를 말한다. 부처님이나 벽지불, 아라한도를 이룬 존재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열반체험을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열반을 한번이라도 체험 하였다면 해탈은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본다. 그 첫번째 단계가 수다원이다.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열반체험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열반체험을 했다고 해서 곧 바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7생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계를 벗어나서 해탈 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다. 그렇다면 수다원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5가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 일 것이다.

 

 

첫째, 자아가 있다는 견해 즉 오온이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사라진다

둘째, 형식적인 계율이나 의식을 지켜야만 해탈 할 수 있다는 계금취견이 사라진다

셋째, 불법승삼보나 연기법등을 회의 의심하는 것이 사라진다. 즉 윤회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넷째, 쾌락과 같은 감각적 욕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다섯째, 반감 증오 분노 적대감등의 성내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열반체험을 했다는 것은 수다원과를 증득 했다는 말과 같고 위와 같은 5가지 견해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7생은 천상이나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비록 남은 7생중에 열반을 체험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 갔다고 할지라도 이미 열반을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공덕으로 남은 생에서 열반에 들면 영원히 윤회하지 않은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정법을 들을 수 있는 곳

 

사람들은 윤회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해탈이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빠져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감옥이 좋다고 계속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감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설한 내용은 '정법(正法)'이다. 즉 무상 고 무아의 3법인이다. 3법인을 제대로 알아야 윤회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3법인을 이야기 하지 않는 법문은 불교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3법인은 보편적이고 타당한 일반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근본불교가 이 땅에 소개 된지 얼마 되지 않지만 요즈음에 정법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그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들을 수 있는 곳이 한국위빠사나선원이다. 지도법사의 법문은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속에 쏙쏙 박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법문시간 내내 쉬지 않고 시간을 초과 하면서 까지 나오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부처님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 하는 정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법을 들었을 때 불자로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고 불교야 말로 미래의 정신세계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확신 하게 해준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는 멀리 가지 않고서 집에서도 정법을 들을 수 있다. 바로 그런 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이 사이트의 '12연기와 위빠사나수행 법문 녹음파일(대구법회)'방에서 들을 수 있다. 지도법사의 법문을 녹음 하여 올려 놓았는데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 법문을 듣고 있으면 불자로서 자긍심 뿐만 아니라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어 의식이 매우 고양됨을 알 수 있다.

 

 

 

 

 

 

21세기 불교의 희망은

 

금강경에 보면 '약당래세 후오백세(若當來世後五百歲)'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 당시보다 법이 지켜 지지 않을 것임을 경계 하는 말이다. 이때 흔히 하는 말이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다. 처음 5백세는 부처님이 가르친 교와 행이 올바로 실행되는 정법의 시기를 말하고, 그 다음 5백세는 교만 남고 행이 사라진 껍데기만 남는 상법의 시기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교마저  없어지는 말법의 시기를 말한다. 무상 고 무아의 3법인을 정법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들어 맞는 예언이라 볼 수 있다. 법문을 할 때 3법인과 12연기를 이야기 하지 않고 개념이나 관념과 같은 대상에 대하여만 말한다면 정법과는 한참 멀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시대를 말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19세기에 위대한 발견중의 하나가 팔리어로 된 패엽경(貝葉經)이라 한다. 스리랑카에서 발견된 패엽경에는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려 2000여년 만에 세상에 알려 진 것이다. 그 동안 모르거나 잊고 지내 왔던 부처님당시의 생생한 기록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고 '21세기 불교'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한다. 소위 남방불교라 불리우는 상좌부불교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도 부처님당시의 정법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을 비롯한 미국과 같이 제로 베이스로 시작해서 일어 나는 불교는 대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교도 아닌 남방상좌부불교이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부처님당시의 초기 불교이고 수행 역시 부처님의 수행법이라 일컫는 '위빠사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정법을 교통과 통신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에 집에서도 들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2009-02-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