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불교활동

한국테라와다불교는 함께 살며 탁발 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8. 11:35

 

한국테라와다불교는 함께 살며 탁발 해야

 

 

 

한국테라와다 불교 창립 5주년 기념 두 번째 세미나를 들었다. 주제는 승가에 대한 것이다. 발제자는 마성스님이고 평론자는 조준호교수이다. 세미나 제목은 초기불교 상가(Sangha)의 조직과 운영체계이다.

 

한 건도 보도되지 않은 기사

 

세미나가 열린 한국불교역사박물관 건물, 세칭 조계종총무원건물 2층 국제회의장은 꽉찼다. 뒤에 기자들이 앉는 자리도 다 차서 일부는 보조 의자를 가져다 놓고 들었다.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것일까?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서 팝업창으로 몇 일 전부터 광고해서 알게 되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동안 뜻있는 불자들은 기존 한국불교 지도부의 행태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특히 조계종의 권승들의 행태에 대하여 치유불가능이라는 마음의 판정을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외쳐 보아도 기득권을 가진 승려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끼리 똘똘뭉쳐 기득권과 지위를 지켜 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 대하여 절망하였을 것이라 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혀 다른 전통의 불교를 접하였을 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국제회의장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고 본다.

 

하지만 세미나가 열리고 5일이 지났음에도 교계 신문 사이트에서 관련기사를 볼 수 없다. 언제 그런 세미나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현장에는 기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교닷컴, 미디어붓다, 불교포커스, 법보신문, 불교신문, 붓다뉴스, 불교저널 등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서 세미나 관련 기사를 단 한건도 보지 못하였다.

 

건진 듯한 글

 

인터넷으로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읽은 것이 마성스님의 글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스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건진 듯한느낌이 든다. 대부분 글들이 읽고 지나치는 것이어서 별로 남는 것이 없는데 스님의 글을 읽으면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논문 역시 건졌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교단과 승단의 차이는?

 

마성스님은 ‘초기불교 승가의 조직과 운영체계’라는 제목으로 발제하였다. 초기불교에서 승가가 어떻게 성립 되었고, 어떻게 조직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논문에서 가장 먼 언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교단과 승단에 대한 것이다. 이 개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불자들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불자들은 드믈다고 본다. 그말이 그말 같아서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성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명확하다.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교단과 승단을 혼동하고 있다. 교단은 출가자 집단과 재가자 집단 모두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지만, 승단은 출가자 집단만을 일컫는 좁은 개념이다.

 

(초기불교 승가의 조직과 운영체계, 마성스님, 2013-11-23)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교단은 넓은 개념이고, 승단은 좁은 개념이라 한다. 그래서 출재가 모두 포함한 것이 교단이고, 출가자만의 집단이 승단이라 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성스님이 교단과 승단에 대하여 정의한 것은 이유가 있다. 재가불자는 승단에 포함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재가불자는 승가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때 재가불자도 승가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부대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이렇게 네 그룹이 불교의 근간이기 때문에 재가불자도 승가에 포함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은 버려지게 되었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우바새와 우바이가 상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도 이점은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불자들을 햇갈리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의 개념이다. 이런 혼란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와 같이 빠리사(Parisa,)와 상가(Sangha, )는 전혀 다른 용어이다. ‘빠리사’는 불교교단(Buddhist Community)을 가리키고, ‘상가’는 불교승단(Buddhist Order)을 가리킨다. 그런데 빠알리 상가를 한역에서 ‘중()’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역불전에서 ‘비구중(比丘衆)’이라고 번역한 경우에도 그 원어를 조사해 보면 비구(SK. Bhiksu)의 복수인 경우도 있지만, 비구승가(SK. Bhiksu-samgha)인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중(, Parisa)과 승(, Sangha)을 혼동하게 된 것이다.

 

(초기불교 승가의 조직과 운영체계, 마성스님, 2013-11-23)

 

 

스님은 일본불교학자 히라까와의 ‘원시불교연구’를 인용하여 중과 승을 혼돈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빠리사와상가가 분명히 다름에도 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함에 따라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부대중은 교단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라 한다. 따라서 재가불자는 결코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초기대승과 재가승가

 

스님의 글에 따르면 상가는 오로지 비구와 비구니로 구성된 출가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불자는 상가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마성스님에 따르면 초기불교에서 재가불자는 상가의 일원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어느 경전에도 재가불자가 상가의 일원이라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대승불교에서는 재가불자도 상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승불교가 부파불교를 비판하며 성립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출가자 위주의 부파불교에 반발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벌인 이들이 재가불자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초기대승불교에서는 재가승가이었다고 한다. 이점에 대하여 마성스님도 답변하는 과정에서 초기 대승불교에서 출가와 재가가 명확하게 구분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따른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명확해져서 초기불교에서와 같이 출가자 집단을 승가로 간주 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불교와 이를 계승한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출가자집단만이 상가임을 알 수 있고, 초기대승에서는 출재가의 구분이 없었으나 후대로 내려 갈수록 출가자 승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불교는 출가자집단의 승가로 볼 수 있을까?

 

한국불교가 재가승가인 이유

 

한국불교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절망하게 된다. 오로지 한국불교 하나만 알고 지낸다면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 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는 글로벌 시대이다. 따라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한국불교는 과연 비구승가일까?”라는 의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님들이 비구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왜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보살계와 비구계를 동시에 받는 모순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보살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구승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한국불교의 승가라 보여진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차라리 재가승가에 가깝다.

 

한국불교가 재가승가인 이유는 여럿 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은처를 들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돈 있고 권력 있는 권승들은 대부분 몰래 처자식을 두고 있다고 한다. 독신비구승단을 지향한다는 조계종이 이정도라면 나머지 군소 종단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 기득권 스님들은 비구로서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실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비구로서 해서는 안되는 도박, 음주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진실로 비구계 대로 산다면 비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구족계를 받은 스님들이 버젓이 은처, 도박, 음주 등 세속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재가불자들임에 틀림 없다. 겉으로는 삭발하고 회색승복을 입었지만 하는 행위를 보면 재가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 스님들의 집단을 재가승가로 본다.

 

양복입은 주지스님

 

일본은 불교국가이다. 전체국민의 75%  정도가 불교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부분 신도(神道)’와 겹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국민들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는 일본에서 비구승가는 존재할까?

 

우리와 달리 종파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세력은 정토종일련종계통이다. 그런데 이들 메이져 종파의 승단을 보면 초기불교와 매우 다르다. 대부분 대처육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복입은 주지스님이 있고 또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산다. 그래서 절은 자식에게 상속된다. 이런 스님들을 과연 출가자 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 비구승가라고 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래서 일까 일본불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四分律

日本仏教において、史的いられてきたである。比丘二百五十戒遵守する。 において、日本では完全僧伽消滅しているため、律宗などで儀式上必要から、形式的受戒する場合などから戒師する必要がある。

 

사분률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율이 있다. 비구는 250계를 준수하는 것이다. 현상에 있어서 일본에서는 완전히 승가가 소멸되어 있기 때문에 율종에서는 의식상의 필요에 따라 형식적으로 수계하는 경우 중국등 으로부터 계사를 초빙할 필요가 있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비구승가는 없다고 하였다. 물론 선종계통의 조동종 등에서 비구승가의 모습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매우 미미하다. 일본 불교인구 9800만명 중에 선종계통은 고작 30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계통은 2400만명이고 정토계통은 2000만명에 달하기 때문에 일본불교는 사실상 재가승단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日本では完全僧伽消滅しているため(일본에서는 완전히 승가가 소멸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스스로 비구승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있다면 재가승가가 있는 것이다. 양복입은 정토종 주지스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된 요인은 근본적으로 비구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비구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계를 할 때는 외국에서 계사를 초빙한다고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계율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중국스님들을 초청하여 수계법회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불교의 실상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불교가 비구승가가 아님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여전히 비구승단이라 한다. 비구계를 지키지도 않으면서도 비구승단이라 하는 것이다. 은처행위를 하고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하면서도 비구승단이라 한다. 세속에서 하는 일 다하면서 비구승단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차라리 일본처럼 재가승단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상가의 구성요건

 

마성스님의 논문에서 구족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깨달은 자라도 구족계를 받아야 된다는 요지이다. 이렇게 구족계를 강조하는 것은 승단의 성립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비록 붓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이루었더라도 반드시 구족계를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상가의 구성원이 된다. 제자가 구족계를 받는 것은 상가 성립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다. 이어서 밥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등도 같은 방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비로서 ‘상가’가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율()에서 상가의 최소단위는 4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섯 비구가 모두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상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불교 승가의 조직과 운영체계, 마성스님, 2013-11-23)

 

 

상가의 구성요건에 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4명 이상의 비구가 있어야 상가가 성립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비록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구족계를 받지 않으면 비구라 볼 수 없다. 그런데 구족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독각승처럼 혼자 산다면 상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4명 이상의 비구가 모여 살아야 상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이라 본다.

 

독각승처럼 혼자 산다면

 

우리나라 스님들을 보면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절은 많지만 스님이 부족한  것도 요인이지만 개인수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토굴에서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토굴도 토굴나름이다. 동굴이나 초막 같은 토굴이 있는가 하면 아파트오피스텔토굴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온갖 편의시설이 다 갖추어진 토굴에서 홀로 산다면 그 스님을 과연 승가의 일원이라 볼 수 있을까?

 

승가의 구성요건은 4인 이상이라 하였다. 4인 이상 모여 살아야 갈마에 의한 승단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만일 독각승처럼 혼자 산다면 범계행위를 해도 누가 지적해 주지 못할 것이다. 아파트나 오피스텔 토굴에서 온갖 편의 시설을 다 갖추어 놓고 혼자 산다고 하였을 때 대체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알 것인가? 그래서 비구라면 반드시 모여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한국테라와다 불교는 함께 살며 탁발 해야

 

그런데 한국테라와다 불교 역시 독각승처럼 나홀로 산다고 한다. 이런 점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매우 따갑게 직설적으로 지적하였다. 메모한 것을 재구성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국테라와다 불교는 2009년 창립된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한국테라와다 불교 비구들은 모여 살아야 합니다. 4인 이상 모여 살아야 갈마가 되듯이 각자 독각승처럼 독살이 하는 것은 한국불교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현재 20여명의 비구들이 서울에 하나, 경주에 하나, 부산에 하나 이런 식으로 홀로 살고 있는데 이렇게 홀로 살면 결계가 됩니까?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땅과 건물을 팔아서 한군데로 모아야 합니다.

 

한곳에다 건물을 지어서 한군데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전통대로 갈마도 하고 탁발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현재와 같이 독살이 하면 미미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갈마하고 탁발을 하면서 살면 테라와다라 볼 수 있지만 독각승으로 살면 더 이상 테라와다라 볼 수 없습니다.

 

(마성스님)

 

 

 

 

 

마성스님의 따끔한 질책이다.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창립된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살이하고 있는 것에 대한 추상 같은 지적이다. 중생을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지 말고 한 장소를 물색하여 함께 살면서 갈마도 하고 탁발도 하면서 테라와다 불교의 삶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만일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한국불교 방식으로 독살이 한다면 한국불교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영향력 또한 대단히 미미해질 것이라 한다.

 

이러한 마성스님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제안에 방청석에서도 거들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재가불자는 발언 기회를 얻어 마성스님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청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탁발을 해야 합니다.”라고 거들었다.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최대경쟁력은?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이제 창립된지 5년이 되었다. 해마다 창립기념으로 세미나를 연다고 하였다. 한국불교역사문화박물관 2층 국제회의실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나 아직까지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단 한줄의 기사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직까지 한국테라와다불교가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영향력 또한 보잘 것 없음을 말한다.

 

불과 20여명의 빅쿠들로 이루어진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한국불교와 한국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어떻게 뿌리내려야 할까? 한국테라와다불교 대표를 맡고 있는 빤냐와로 빅쿠는 세미나가 열리기 전 모두 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한국테라와다 불교에는 기도나 천도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불자들의 보시에 의하여 유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가자 한국테라와다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청정함’일 것입니다. 우리 테라와다불교는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테라와다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상가가 보배로서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빤냐와로 빅쿠, 한국테라와다불교 대표)

 

 

빤냐와로 빅쿠는 청정에 대하여 말하였다. 청정함이 바로 한국테라와다 불교의 존재이유라 하였다. 이와 같은 말에 크게 공감한다. 종교의 경쟁력은 청정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대궐 같은 사찰과 수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계행에 어긋나는 승려가 있다면 구린내가 날 것이다. 지금 체육관 같은 교회에서 오케스트라와 같은 합창단으로 신을 찬양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직자가 부도덕 하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하지만 탁발에 의존하며 하루 한끼를 먹는 수행자 집단이 있다면 청정한 것이다. 비록 건물도 작고 구성원도 적고 신도 역시 많지 않아도 청정한 집단이라면 경쟁력이 있다. 그래서 종교의 경쟁력은 성전과 신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정함에 있는 것이다.

 

테라와다와 대승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가

 

이렇게 한국테라와다불교 대표 빤냐와로 빅쿠는 청정함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런 선언에 덧 붙여 마성스님은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청정함과 함께 모여 살 것을 강조하였다. 모여 살아서 갈마를 하고 탁발을 하지 않으면 테라와다불교로서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말한 이유로서 테라와다의 대승의 차이점을 들었다.

 

스님에 따르면 테라와다 불교는 전통을 고수해야 하고, 대승불교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테라와다 불교의 존재이유가 전통고수에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신 것처럼 모여살고 갈마하고 탁발에 의존하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적 현실에서 각자 떨어져서 독살이 하면서 갈마도 탁발도 없다면 테라와다불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고 보살 사상 등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었다. 심지어 21세기에 적합한 경전을 편찬하자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처럼 끊임 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주의자들에 따르면 불교는 진화하여 왔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는 테라와다를 옹호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이번 세미나에서 한국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쓴소리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마성스님의 탁발론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조준호 교수는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다. 아직까지 한번도 글이나 논문에 표현된 것은 아니라 하는데 그것은 앞으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 지지를 할 것이라 하였다.

 

조준호교수에 따르면 이제까지는 테라와다를 옹호 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승에서 소승이라고 비하하는 것에 대하여 옹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얀마에서 단기 수행체험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왜 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 하였다. 자신이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실제로 체험을 해 보니 자신이 이제까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과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교리문제, 승가문제 등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사항을 발견하였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긴장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마성스님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스리랑카 비구들과 생활한 바 있는 마성스님은 스스로 경계인이라 하였다. 대승불교와 테라와다에 모두 걸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승불교도 아니고 테라와다 불교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양 불교전통에서 많이 알다 보니 차마 입으로 말 못할 것도 있다고 하였다.

 

조준호교수와 마성스님이 언급하였듯이 차마 말못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마성스님의 말에 따르면 테라와다 불교는 전통을 고수해야 하고,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말이 답인 것 같다.

 

 

 

2013-11-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