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레는 똥벌레?
똥을 밟았는데
똥을 밟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서울 두산위브빌딩 앞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생긴 일입니다. 교계신문 중의 하나인 P사의 J주간기자를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전 행사가 늦게 끝났는지 늦게 나타난 기자를 보고서 손을 흔들며 한 발 디딛는 찰나에 미끌하며 넘어질 뻔 했습니다.
아래를 보니 노랑 치즈덩어리 같은 것이 한쪽 구두에 잔뜩 묻어 있습니다. 바지 끝자락에도 약간 튀어 있었습니다. 똥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물질을 뒤집어 쓴 것 같았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구두를 세척 했는데 냄새를 맡아 보니 분명 똥냄새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건물 앞에서 똥을 쌌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애완견이 싼 똥일까요?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심한 암모니아 냄새 나는 것이 똥냄새였다는 사실입니다.
사고는 순식간에
똥을 밟았을 때 속된 말로 기분이 더러웠습니다. 똥을 밝은 것으로 시작 되는 만남이 못내 찜찜 했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면서 우연과 불의에 대하여 얘기 했습니다. 모든 사고는 순간적으로 발생하는데 순차적 인과법이 적용되기 보다는 동시적인과법이 적용될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순식간에 발생하는데 원인과 조건과 결과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접촉’에 의해 발생됩니다.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측가능한 접촉인지 순간적인 접촉인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예측가능한 접촉이라면 인과의 선후관계가 잘 들어 맞습니다. 그러나 순간적 접촉이라면 인과가 동시에 발생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과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으로 설명합니다.
부처님은 불운한 사건에 대하여 접촉에 의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S36.21) 라 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모두 접촉에서 기인한다고 했습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기 까지 자신의 의지와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업보의 개념이 들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똥이 거기에 있어서 똥을 밝은 것입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밟은 것입니다. 순신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결국 접촉입니다. 접촉은 느낌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한마디로 더러운 느낌이었습니다.
업이 달리 익었을 때
언제 어떻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멀쩡하던 사람이 몇 시간 후에 시체가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기대수명, 기대수명 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수명일 뿐입니다. 아무도 기대수명까지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앞날이 보장 되지 않는 것은 업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지은 업이 익었을 때 사고라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업이라는 것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업은 달리 익기 때문입니다. 이를 업이숙(業異熟, kamma vipāka)이라 합니다.
업이 달리 익기 때문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자가 원수라면 잘 걸린 것입니다. 내 부모를 죽인자나 내 돈 떼 먹고 달아난 자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수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교단에 들어감으로써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지은 업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살해한 자들의 가족이나 친지 등이 나타나 돌팔매질을 했을 때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 죽어 갔습니다. 과거에 지은 살인업이 조건을 만난 것입니다. 살해한 순간 즉각 과보를 받은 것이 아니라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업이 달리 익은 업이숙입니다. 그래서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갔습니다. 부처님은 피투성이가 된 앙굴리말라에게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 년, 아니 수 백년, 아니 수 천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M86) 라 했습니다.
아라한이 된 앙굴리말라는 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었을까요? 세 가지 과보가 있습니다. 한 존재에게 있어서 윤회가 계속되는 한, 지금 여기에서 행위가 1) 현세에서 체험될 수 있는 과보, 2) 다음 생에서 체험 될 수 있는 과보, 3) 다음 생에 이어지는 어떤 생에서 체험 되는 과보 입니다. 그런데 앙굴리말라는 현세에 살인업을 무수하게 지었지만 아라한이 되었으므로 다음 생에서 체험 될 수 있는 과보와 다음 생에 이어지는 어떤 생에서 체험 되는 과보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다음 생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현생에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는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연쇄살인자로 악명을 떨쳤던 앙굴리말라는 현생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살해 했습니다. 그가 비록 다음 생을 받지 않는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현생에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피해할 수 없습니다. 조건이 형성되면, 업이 익으면, 또는 업이 달리 익으면 그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살해자의 가족이나 친지 등에게 발견되었을 때 돌팔매질을 당한 것입니다.
똥과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똥을 밟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기분이 더러웠습니다. 그런데 똥이 묻으면 아주 작은 양이라도 심한 악취를 풍긴다는 사실입니다. 경전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아주 소량만 있어도 똥은 악취를 풍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손가락 튕기는 동안 존속하여 소량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존재에 대하여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A1.348) 라 했습니다. 존재 하고 있는 것 자체를 오염원으로 보아 악취가 풍기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욕망과 분노와 사견으로 오염된 자는 존재 하는 한 악취가 날 수 밖에 없는 오염원과 함께 있음을 말합니다.
똥과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똥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똥처럼 말하는 사람, 꽃처럼 말하는 사람,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A3.28) 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똥처럼 말하는 사람일까요?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누가 똥처럼 말하는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공회 가운데서나 군중가운데서나 친족 가운데서나 조합원 가운데서나 법정가운데서나 증인으로 소환되어, ‘이 사람아, 와서 자네가 말해 보게!’라고 추궁받으면, 그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이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다.”(A3.28) 라 했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가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똥에 관한 비유는 많습니다. 목갈라나가 어느 마을에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산을 내려 오다가 머리 끝까지 똥구덩이에 빠진 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는 똥구덩이에 빠진 자의 전생을 보았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간통자였습니다. 간통을 일삼는 자가 죽었을 때 그 업보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 간통업의 남은 과보로 인하여 똥구덩이에 빠진 자가 된 것입니다.
돈벌레는 똥벌레?
똥에 관한 비유는 돈을 연상케도 합니다.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열중하는 수행승에게 똥벌레와 같다고 했습니다. 똥벌레는 똥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똥벌레는 똥을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똥을 적게 가진 동료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어떤 똥벌레가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똥벌레는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내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똥벌레들을 무시한다.” (S17.5)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똥을 돈으로 바꾸면 기가 막힌 문장이 됩니다. 이를 패러디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돈벌레가 돈을 먹고 돈으로 배를 채우고 돈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돈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돈벌레는 ‘나는 돈을 먹고 돈으로 배를 채우고 돈으로 충만하고도 내 앞에 큰 돈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돈벌레들을 무시한다.”
똥이라는 말을 단지 돈으로 바꾸었을 뿐인데도 현실과 잘 들어 맞습니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수행승에게 똥벌레와 같다고 했지만, 현실을 사는 세계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돈벌레와 다름 없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살고,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고, 돈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똥’과 ‘돈’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영어로 똥을 ‘덩(dung)’이라 합니다. 돈을 세게 발음하면 ‘똥’으로 들립니다.
국회청문회에서 어느 여성 장관후보자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패스하여 변호사로 일한 바 있는 여성은 관운이 좋아서인지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하는 등 잘 나가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번 청문회에서 1년 생활비로 5억원을 썼다 하여 화제가 됐습니다. 또한 부부가 변호사일을 하여 3년 여동안 벌어들인 돈이 23억이라 하는데 재산증가는 5억원에 그쳤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요? 변명이 궁하자 모두 써 버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장관후보자는 93평짜리 아파트를 사는데 전세로 1억5천만 정도에 산다고 합니다. 말이 93평이지 운동장 같은 넓이의 집입니다.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이 권력까지 넘보았을 때 국민들의 정서가 용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대통령이 해외순방중에 전자결재를 하여 장관이 되었다고 하지만 국민정서법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록 그가 또는 그녀가 이 사회에서 난사람이고 든사람이라 해도 모든 것을 다 가졌을 때 저항감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법과 탈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면 악취나는 것입니다. 마치 똥벌레가 똥을 많이 모았다고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돈만 아는 사람을 돈벌레, 아니 똥벌레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일까요?
2016-09-10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표교수는 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할까? (0) | 2016.09.19 |
---|---|
인생무상이 아니라 오온무상 (0) | 2016.09.13 |
커피에 대한 갈애 (0) | 2016.09.09 |
덕천마을 메가트리아에서 무상(無常)을 (0) | 2016.09.06 |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0) | 2016.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