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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7. 7. 10. 15:56

 

욕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

  

 

비를 내리려거든

 

하늘이 번쩍 하니 우르르쾅쾅하며 하늘이 울어댑니다. 마치 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불과 이삼주전까지만 해도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논바닥이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모습을 연일 TV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번개와 천둥과 거센 빗줄기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온대지방에서 칠월은 비가 오는 계절입니다. 열대나 아열대지방은 우기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올 때 보다 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번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듯이 세 차게 내립니다. 부처님 당시 숲에 사는 제자들은 우기에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초암은 지붕이 이어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쾌적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Thag.1)

 

 

테라가타 1번 게송은 초암에 들이친 비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비는 번뇌를 상징합니다. 초암의 잘 엮어진 지붕은 감각기관이 잘 수호 되어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꾸띠(kui:처소)의 조건

 

부처님 제자들은 사람들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심산유곡이 아닙니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곳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수행승들이 걸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소(kui)의 조건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처소의 경(10.11)’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여기 처소가 너무 멀지 않고 너무 가깝지 않고 오고 가는데 적당하다.” (10.11) 라 했습니다. 이는 탁발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너무 멀면, 탁발하러 가고 오는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곤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삼매를 일으키거나 이미 생겨난 삼매를 견고히 할 수 없다. 너무 가까우면 많은 사람 때문에 번잡해진다.”(Mrp.V.3)라 했습니다.

 

초암이나 동굴 등 처소가 너무 멀면 탁발하는데 곤란하고 너무 가까우면 시끄러울 것입니다. 모두 삼매에 방해 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사람들과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수행처가 심산유곡에 있습니다. 사람의 손길 닿지 않는 곳에서 숨어 살듯이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급자족이 될 수밖에 없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마을을 떠나 살 수 없었습니다. 삼매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처소나 동굴에 살았습니다. 그런 처소는 비바람이 불어도 안심입니다.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베바라 산과 빤다바 산의 동혈에

번개가 연이어 내린다.

하지만 그 비할 데 없는 님의 아들은

산의 동혈에 들어가 선정에 든다.”(Thag.41)

 

 

베바라 산과 빤다바 산은 라자가하 시를 둘러 싸고 있는 오악 가운데 두 개라 합니다. 마가다 국의 수도인 라자가하 근교 동굴에 사는 수행자가 비바람에 몰아 침에도 게의치 않고 삼매에 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아가씨들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우기에 번개 치면 반드시 천둥을 칩니다. 그럼에도 초암이나 동혈에 사는 수행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삼매에 듭니다. 그런 초암은 잘 덮여 있고 안락한 곳입니다. 그래서 비를 내리려거든 비를 내리십시오.”(Thag.51)라 합니다. 마음이 잘 집중 된 자, 몸이 잘 집중 된 자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음을 말합니다. 초암에 사는 수행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확신의 믿음으로 주어진 나의 초암은

즐거운 곳이고 즐길 만하니

아가씨들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여인들이여,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Thag.58)

 

 

수행자가 사는 한적한 초암(kuti)이 있습니다. 이곳에 아가씨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행자는 아가씨는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탐욕을 여읜 수행자에게 여인은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 게송을 보면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을 연상케 합니다.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

 

선종에 ‘파자소암’공안이 있습니다다. 지난 2000년 도림 법전스님이 동안거결재법어와 함께 파자소암공안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월간해인’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검진삼천조관(盡三千條貫)하여
갱무정죄가단(無情罪可斷)이로다.
삼천조항의 법규를 다 뒤져도
정과 죄를 판단할 길이 없도다.

 

옛날에 한 노파가 암자의 스님을 20년 동안 시봉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노파는 공양을 날라주던 딸에게 말했습니다


“스님을 껴안고는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라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나에게 전해다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하였습니다. 공양을 마친 후 그릇을 거두고는 가만히 스님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시킨대로 물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


“고목枯木 의한암倚寒巖하니 삼동三冬 무난기無暖氣로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딸은 돌아와서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내가 20년 동안 겨우 속인을 공양시켰구나.” 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 스님을 내쫓고는 암자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것이 종문에 전해오는 유명한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입니다.


늙은 할망구가 암자를 불사르고 중을 쫓아낸 법문인데 피상적으로 볼 때는, 그 스님네가 공 빠지고 고요한데 머물러서 여자에게 음심淫心 내지 않는 것만 알았지 참으로 살아서 자재自在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노파가 ‘속인’이라고 꾸짖으면서 내쫓았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만약 참으로 그렇게 본다면 그 노파가 암자를 불사르고 그 중을 쫓아낸 뜻도 영 모르거니와, 또 그 스님네가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라고 한 뜻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 참뜻은 저 깊은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해서 그 노파가 암자를 불지르고 그 중을 쫓아낸 뜻을 확실히 알면, 일체법과 모든 공안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전체를 다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안은 그렇게 아주 깊은 법문이라 선종에서도 중대하게 관찰하는 것이니, 피상적 관찰로써는 그 법문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마른 나무가 차디 바위에 기댔을 뿐이니, 월간해인 2000 5 219)

 

 

화두는 공안참구를 위한 것입니다. 정답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노파가 암자가 불지른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딜레마입니다. 아가씨를 덥썩 끌어 안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밀쳐 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금강신문에 따르면 바짝 마른 대나무 조각같이 건조한 수행은 결국 물을 떠난 파도요, 번뇌를 여의어 버린 보리다. 번뇌가 곧 보리임을 철견하는 게 선수행이다. 번뇌를 보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인위적인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로 번뇌를 회피한 선객의 20년 수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 합니다. 이것이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이유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파자소암공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계행이 무너진 것이라 여겨 전쟁에서 패한 자를 뜻합니다.

 

흙먼지가 이는 모습만 보아도

 

앙굿따라니까야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A5.75)’에 따르면 어떤 전사는 흙먼지가 이는 모습만 보아도 용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하고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A5.75)라 했습니다. 어떤 자는 적의 깃발만 보아도, 또 어떤 자는 적의 함성만 들어도 전의를 상실하여 전쟁에 패한 경우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를 수행승에 빗대어 말 할 수 있습니다.

 

숲속 초암에 사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이 수행자는 마을로 탁발 나갔을 때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소녀를 떠 올리기만 해도 더 이상 정진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전사가 적의 흙먼지만 이는 것을 보고도 전의를 상실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수행자는 마을에 탁발하러 갔을 때 아름다운 소녀를 보았습니다. 소녀의 인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수행정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전사가 적의 깃발만 보고서도 위축이 되어 전의가 상실된 것과 같습니다.

 

어느 수행자이 탁발을 마치고 한적한 숲속에 앉아 있습니다. 이때 여인이 가까이 다가와서 비웃고, 말을 걸고, 큰 소리로 조롱했습니다. 이에 견디지 못하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전사가 적의 함성만 들어도 전의를 상실하여 전쟁을 계속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에게 패배한 자

 

전사는 적의 흙먼지가 이는 것도, 깃발의 모습도, 함성도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적과 맞닥뜨려 백병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 어느 수행자는 소녀가 있다는 소문도 견디어 내고, 소녀를 보았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인으로부터 조롱하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여인이 터치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파자소암의 공안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Puna ca para bhikkhave sahati rajagga, sahati dhajagga, sahati ussādana.  Api ca kho sampahāre āhaññati9 vyāpajjati. Kimassa sampahārasmi?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a vā rukkhamūlagata [PTS Page 092] vā suññāgāragata vā mātugāmo upasakamitvā abhinisīdati, abhinipajjati, ajjhottarati. So mātugāmena abhinisīdiyamāno abhinipajjiyamāno ajjhottariyamāno sikkha apaccakkhāya dubbalya anāvīkatvā methuna dhamma patisevati. Idamassa sampahārasmi.

 

수행승들이여, 또한 어떤 수행승은 흙먼지가 이는 모습도 견디어 내고 깃발의 모습도 견디어 내고 함성도 견디어 내지만, 싸움에서 공격을 받아 패한다. 그에게 무엇이 싸움인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한적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있는데, 여인이 가까이 와서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안는다. 여인이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안으면,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배움이 허약해져서 성적교섭을 행한다. 그에게 이것이 싸움이다.”(A5.75, 전재성님역)

 

 

다섯 종류의 전사 중에 네 번째는 적과의 싸움에서 패한 자입니다. 이를 수행승에게 적용하면 여인에게 패한 자가 됩니다. 여인이 신체적 접촉을 가 했을 때 무너짐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여인이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안으면,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배움이 허약해져서 성적교섭을 행한다.”라 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 대림스님은 그는 여인이 가까이 앉고 가까이 눕고 껴안으면 공부지음을 버리고 나약함을 드러낸 뒤 성행위를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전재성님역)공부지음을 버리고”(대림스님역) 입니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두 번역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전재성님은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라 했고, 대림스님은 공부지음을 버리고라 했습니다. 빠알리원문을 보면 “sikkha apaccakkhāya” 에 대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sikkha'training'의 뜻으로 ‘Buddha's disciple’이라 합니다. 이는 보다 높은 계학,    보다 높은 정학, 보다 높은 혜학에 대한 것입니다. 전재성님은 배움이라 번역했습니다. 대림스님은 공부지음이라 번역했습니다. 문제는 빠알리어 apaccakkhāya’에 대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apaccakkhāya’‘apaccakkha’형태로서 ‘unseen; not realised; not tested.’의 뜻이 있습니다. 빠알리어 apaccakkhāya’에 대해서는 in Instr. f. apaccakkhāya as adv. without being seen, not by direct evidence Miln.46 sq. (Page 51)”라는 설명이 PCED194에 있습니다.  보여지는 것 없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sikkha apaccakkhāya”의 뜻은 배움에 대한 가르침을 실현하지 않고라 볼 수 있습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이 번역한 공부지음을 버리고가 맞을 듯 합니다.

 

한편 빠알리어 apaccakkhāya’에 대하여 a+paccakkhāya’의 형태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빠알리어 ‘paccakkhāya’‘[abs. of paccakkhāti] having rejected; having refused; having disavowed; having given up’의 뜻입니다. 여기에 부정접두어 ‘a’가 붙으면 apaccakkhāya’포기할 수 없는의 뜻이 됩니다. 따라서 “sikkha apaccakkhāya”의 뜻은 배움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고가 됩니다. 전재성님의 번역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가 바른 것이 됩니다.

 

전재성님의 번역과 대림스님의 번역은 정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 “Again, some.bhikkhu can endure the cloud of dust, the crests of the standards, and the uproar, but he is struck down and wounded by a blow. What is the blow in his case? When the bhikkhu has gone to the forest, to the foot of a tree, [92] or to an empty hut, a woman approaches him, sits down or lies down next to him, and embraces him. When she does so, he has sexual intercourse with her without having given up the training and

disclosed his weakness.” (NDB, 75 (5) Warriors (1),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sikkha apaccakkhāya” 에 대하여 without having given up the training”라 하여 전재성님이 번역한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와 일치 합니다. 이는 ‘apaccakkhāya’에 대하여 ‘a+paccakkhāya’형태로 보아 without having given up’의 뜻으로 번역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누구 번역이 맞는가?

 

한문단만을 놓고 보면 대림스님 번역이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재성님과 빅쿠보디가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라 번역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세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마치 전장에서 흙먼지를 보기만 해도 전의를 상실하는 것처럼, 미모를 가진 소녀가 있다는 것을 듣기만 해도 배움을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또 깃발, 함성으로 표현 했는데, 이는 여인을 보는 것, 여인으로부터 경멸적인 말을 듣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흙먼지, 깃발, 함성은 여인을 들은 것, 여인을 본 것, 여인으로부터 말을 들은 것에 대응됩니다.

 

배움이 덜 된 자는 세 가지에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에 공통적으로 배움이 허약해져서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 간다. (Sikkhādubbalya āvīkatvā sikkha paccakkhāya hīnāyāvattati)”라는 문구를 적용했습니다. 여기서 배움을 포기한다는 말이 ‘sikkha paccakkhāya’입니다. 빠알리어 ‘paccakkhāya’‘having given up’의 뜻이기 때문에 ‘sikkha paccakkhāya’는 배움을 포기한다는 뜻이 됩니다. 초불연에서도 빅쿠보디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 번째 경우에는 여인이 신체적 접촉을 가해 왔을 때 수행승은 성적교섭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을 경우 이전 세 가지 경우에서와 같이 배움을 포기한다(sikkha paccakkhāya)’라는 문구를 사용해야 하나 정반대로 “sikkha apaccakkhāya”라 했습니다.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추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승은 단련 된 것입니다. 세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배움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배움이 약화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dubbalya(Weakness)’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일지 초불연에서는 앞서 세 가지 경우에서와 같이 동일하게 적용하여 공부지음을 버리고라 번역했습니다. 이는 적절치 않은 번역으로 봅니다. 

 

수행승은 여인의 접촉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배움이 허약해져서 성적교섭을 행한다.(sikkha apaccakkhāya dubbalya anāvīkatvā methuna dhamma patisevati)”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전사가 전쟁에서 적과 싸워 패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배움을 포기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배움이 허약해져 있을 뿐입니다. 이는 이전 세 가지 경우 즉, 흙먼지, 깃발, 함성으로 비유된 것에서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배움이 약해졌을 뿐 배움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공부지음을 버리고 나약함을 드러낸 뒤 성행위를 한다.”라 하여 배움을 포기한다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승리이다

 

전사가 전장에서 적과 싸워서 이 승리자가 됩니다. 수행자가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면 역시 승리자가 됩니다. 반대로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성적접촉을 하면 패배자가 됩니다. 그래서 승단추방죄(波羅夷)에 해당하는 자는 패배자입니다. 승단추방죄를 빠라지까(pārājika)라 하는데 원래 의미는 패배자라 합니다. 반대로 승리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승리자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승리자는 어떤 것일까요? 다섯 번째 전사의 비유를 들어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어떤 수행승은 흙먼지가 이는 모습도 견디어 내고 깃발의 모습도 견디어 내고 함성도 견디어 내고 싸움도 견뎌낸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쟁의 승리자로서 전장을 제패한다. 그에게 무엇이 전쟁의 승리인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한적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있는데, 여인이 가까이 와서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안는다. 여인이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안으면, 그는 그것을 풀어버리고 거기서 벗어나 바람직한 곳으로 간다.” (A5.75, 전재성님역)

 

 

 

 

 

 

여인의 터치에 굴복하지 않는 수행승에 대하여 승리자라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승리자입니다. 여인이 안으려는 것을 뿌리치고 바람직한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숲이나 나무 아래, 산이나 협곡, 산굴이나 묘지나 정글 등에 있는 외딴 처소입니다. 수행승은 외딴 처소에서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갑니다.

 

수행승은 선정에 들어 선정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과 평정을 맛 봅니다. 이런 선정삼매의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라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번뇌가 번뇌가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네 번째 선정 다음에 사성제를 설합니다. 있는 그대로 분명히 보아 해탈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졌다. 청정한 삶은 이루어지고,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며,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해탈지견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것이 전쟁의 승리이다.”(A5.75)라고 했습니다.

 

승리자에 대한 노래

 

파자소암 공안을 보면 수행승은 여인을 뿌리쳤습니다. 노파가 자신의 딸을 시켜 공부가 얼마나 됐는지 점검하려고 유혹하려 했으나 이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수행승은 여인에게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라 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노파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헛공양을 했다며 암자를 불질러 버립니다. 그리고 수행승을 쫒아 내 버립니다. 이것이 선가에서 말하는 공안입니다. 이렇게 조치한 것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수행승은 승리자라는 사실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노파가 헛공양을 한 것이 아니라 공양을 잘 한 것입니다.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은 승리자에 대한 노래입니다.

 

 

초암에 누가 있는가, 초암에 수행승이 있다.

탐욕을 여의고 마음이 잘 집중되었으니,

그러므로 벗이여, 그대는 알아야 하리.

그대가 만든 초암이 헛되지 않은 것을!”(Thag.56)

 

이것은 낡은 초암이라고 그대가 말하니.

이제 다른 초암을 원한다.

초암에 대한 소망을 버려라.

수행승이여, 새 초암은 다시 괴로운 것이 되리.” (Thag.57

 

확신의 믿음으로 주어진 나의 초암은

즐거운 곳이고 즐길 만하니,

아가씨들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여인들이여,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 (Thag.58

 

확신의 믿음으로 나는 출가했고,

초암은 한적한 숲속에 지어졌으니,

방일을 여의고, 용맹정진하고,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보했다.” (Thag.59

 

의취를 품고 초암에 들어간

나의 의도가 이루어졌으니,

자만과 그 경향을 버리고,

나는 명지와 해탈을 실현하리라.” (Thag.60)

 

 

 

2017-07-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