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보살과 아라한의 갈림길 상카루뻭카냐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9. 4. 26. 18:09

 

보살과 아라한의 갈림길 상카루뻭카냐나

 

 

이혼한 전처가 있다. 이혼한 전남편일수도 있다. 서로 무관심하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형성들에 대하여 마치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되고 ‘나’와 ‘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다.(Vism. 21.61)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을 형성적 평정으로 이루어진 앎이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상카루뻭카냐나(Sakhārupekkhāñāa: 行舍智)라 한다.

 

이혼한 아내의 비유

 

상카루뻭카냐나에 대하여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또는 행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 한다.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 최고 단계의 지혜라 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 11단계에 해당된다. 이혼한 아내의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아내가 있다면, 그는 그녀 없이는 한 순간도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그녀를 애지중지할 것이고, 그는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서 있거나 앉거나 이야기하거나 웃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불쾌하고, 극도의 우울을 경험할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 여자의 부정을 보면 헤어지고자 그녀와 이혼을 할 것이고, 그녀를 나의 아내라고 붙잡지 않을 것이다. 그후로는 그녀가 어떤 누구와 함께 어떤 무슨 짓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일체의 형성에서 벗어나고자 성찰적 관찰로 형성을 파악하여 라든가 나의 것이라고 붙잡아야 할 만한 것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환희를 버리고 일체의 형성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된다.”(Vism.21.62)

 

 

청정도론에 따르면 상카루뻭카에 대하여 무관심중립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설명했다. 이를 이혼한 아내에 비유했다. 이혼 하기 전에는 나의 아내이었으나, 이혼한 후에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카라(現像)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 11단계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위빠사나 수행자는 자신이 11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정말 11단계까지 이르렀을까? 그러나 개인의 정신적 세계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줄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있다. 도와 과의 지혜에 이르기 전에 최고 지혜를 상카루뻿카냐나라 한다. 이와 같은 지혜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 28에서 마음이 대상에 매우 깊게 집중되어지기 때문에 꿰뚫어보는 지혜는 모든 것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짐으로써 고요하고 집중되고 평온하게 봅니다.”(430p)라고 말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평온이다.

 

집중된 상태에서 마음의 평온하게 되었을 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관찰 되어지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게도 호감이 갖지 않고 비호감도 갖지 않고 중립이 된다. 이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꺼려하지 않으며 게으름도 느끼지 않습니다. 허둥댐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관찰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등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집중은 아주, 아주 깊고, 마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위빳사나 수행 28, 431p)

 



 

형성에 대한 평정의 지혜(Sakhārupekkhāñāa)’에 도달하면 몇 시간도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집중은 매우 깊은 상태라 한다. 행선에 대해서는 걸을 때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발의 모든 움직임을 매우 명확하게 깨닫습니다. 때로는 발의 형태의 감각을 잃은 채로 단지 움직임만을 깨닫습니다.”(431p)라고 말했다.

 

상카루뻭카냐나에 대하여 빤딧짜스님은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에서 아라한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상카루뻭카가 아주 강할 때를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면 별로 놀라는 일도 없고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화도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423p)라고 말했다. 지극히 중립적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형성에 대한 평등에 상태가 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통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던 막내아들이 갑자기 죽으면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 상태에 있으면 눈물을 마구 쏟거나 쉽게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계속 무상--무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을 평정심으로 받아들입니다.” (11일간의 특별한 수업, 423p)

 

 

어찌 보면 마치 냉혈한을 보는 듯 하다. 자식이 급작스럽게 죽었음에도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는다면 보통사람들은 이해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면 눈물도 흘리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계속 지금 여기에서 무상, 죽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 ‘, 죽었구나를 아는 순간 그 마음이 슬프기 마련인데. 그 슬픔이 일어나는 즉시 싹 사라지고 계속 중립이 유지되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423p)라고 말했다.

 

외아들이 죽었어도 태연한 것은

 

상카루뻭카는 무관심과 중립을 특징으로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그저 죽은 줄 아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부처님 80대 제자가 있다. 그 중에 청신녀로서 웃따라 난다마따(Uttara Nandamātā)’가 있다. 부처님의 재가 여제자 중에서도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로 알려져 있다.

 

주석에 따르면 난다마따는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모범적인 청신녀이다. 어느 날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숫따니빠따의 피안으로 가는 길을 읊었다. 벳사바나 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던 중 그녀의 집에 들렀다가 노래를 듣고는 감탄하여 발길을 멈추고 칭찬했다. 그녀는 그를 정중하게 맞이 했다. 그녀는 그에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벨루깐다로 오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카들과 함께 기뻐하고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사리뿟다는 난다마따를 칭찬했다. 난다마따가 사대왕천에서 북방을 지키는 벳사바나 대왕과 대화를 나눈 것을 칭찬한 것에 대하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난다마따는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예전에 없었던 일도 아니라고 했다. 난다마따는 다음과 같이 더욱 더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존자여, 바로 저에게는 난다라고 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이 그를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끌고 가서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존자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

 

 

이 말을 듣고 사리뿟따는 아주 놀라운 일이라 했고 예전에 없던 일이라 했다. 어느 부모이든지 자식이 갑자기 죽으면 매우 슬퍼한다. 더구나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보면 슬픔에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다마따는 태연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경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하나는 그녀가 계율을 어긴 바가 없고, 또하나는 그녀가 네 번째 선정에 마음대로 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녀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오하분결)을 이미 끊은 돌아오지 않는 님(不還者)였기 때문이다. 또한 난다마따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외아들이 죽었어도 태연했을 것이다.

 

보살과 아라한의 갈림길 상카루뻭카냐나

 

상카루뻭카냐나는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위빠사나 지혜에 해당된다. 여기서 더 올라 가면 도와 과를 이루게 되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면 범부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은 갈림길에 대하여 빤딧짜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상카루뻭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깨달음이 일어날수 있는 기회이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중단 없이 수행하면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 지혜의 마음에 머물 수 있으면 사람이 지극히 청정해지면서 도지혜가 어떤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에서 도가 일어날 때는 상카루뻭카를 한 단계만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도를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11일간의 특별한 수업, 424p)

 

 

상카루뻭카 상태가 갈림길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카루뻭카냐나에 대하여 보살의 길과 아라한의 길로도 설명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십바라밀 보살행을 하시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많이 했는데 상카루뻭카 상태에서 딱 멈추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상카루뻭카 상태를 넘어서면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부처가 될 수 없다.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기로 서원을 세운 자는 절대로 상카루뻭카 상태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보살인지 아닌지는 상카루뻭카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는 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지혜도 뛰어나고 노력도 대단하고 건강과 신심 등 더할 나위 없이 조건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11단계인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또는 행에 대한 평등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면, 또한 가고 싶지도 않다면 틀림 없이 보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보살의 길이고 하나는 깨달음의 길이다. 보살의 길을 가는 자는 상카루뻭카 상태에서 딱 머물러 버린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로 가는 자는 오로지 그 길로 갈수밖에 없다.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머물면 범부이고, 넘어서면 성자가 된다. 보살의 길로 갈 것인가 아라한의 길로 갈 것인가?

 

 

2019-04-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