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운명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9. 11:36

운명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빠알리법명 담마다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글을 쓰고 난 다음에는 날자와 함께 서명하는데 반드시 담마다사 이병욱이라고 써넣는다. 이전에는 진흙속의연꽃이라고 했다. 스스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2018년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에서 수계법회 했을 때 빤냐와로 삼장법사로부터 담마다사(Dhammādāsa)라는 빠알리법명을 받고 나서부터는 이 법명을 사용한다.

 

담마다사는 우리말로 가르침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法鏡(법경)이다. 법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담마는 진리, 가르침, 원리, , 것 등의 뜻이 있다. 그래서 담마다사는 진리의 거울, 가르침의 거울, 원리의 거울, 법의 거울이라는 뜻이 된다.

 

 

담마다사(Dhammādāsa)는 담마(Dhamma)와 아다사(ādāsa)의 합성어이다. 진리를 뜻하는 담마라는 말과 거울을 뜻하는 아다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경전을 보면 다마다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이 많다는 것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를 이용하여 아다사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해 본 결과 ‘Vin.II,107; D.I,7, S.V,357 (id.); A.V,92, 97 sq., 103; J.I,504’이 발견된다. 청정도론에서는 ‘Vism.450, 456, 489’에 실려 있다.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테라가타 171번과 395번 게송에서도 보인다. 부처님 직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테라가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담마다사를 볼 수 있다.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멍에로부터 안온을 얻기 위해

가르침의 거울을 들어

자신에 대한 앎과 봄을 이룬다.”(Thag.171)

 

 

이 게송은 뿐나마싸 장로가 읊은 것이다. 장로는 다섯 가지 장애를 버렸다고 했다. 이는 탐욕과 성냄 등 오장애를 말한다. 멍에로부터 안온은 요가케마(yogakkhema)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瑜伽安隱(유가안은)’이라고 말한다.

 

멍에를 뜻하는 요가(yoga)는 소의 목과 등사이에 있는 구부정한 막대로서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사용한다. 이 막대를 채우면 마치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멍에로부터 안온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를 벗는 것과 같다.

 

네 가지 멍에가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 존재의 멍에. 견해의 멍에, 무지의 멍에를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멍에에서 벗어나야 열반에 이른다.

 

부처님 제자는 가르침의 거울을 들었다.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비추어 보면 앎()과 봄()이 생겨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아는 것이다.

 

어떻게 내면을 보는가?

 

평소에는 자신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나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드러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일곱번째 청정인 앎과 봄의 청정āadassana-visuddhi)’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는 실로 나는 이 길로 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서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Vism.22.20)

 

 

지견청정에 대한 것을 보면 네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자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예류도와 예류과를 성취하고 난 다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이 얼마나 되는지 반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알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앎과 봄의 청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하여 수행한다.

 

수다원 도와 과, 사다함 도와 과, 아나함 도와 과를 거쳐서 마침내 아라한 도와 과에 이르면 더 이상 오염원이 남아 있지 않게 됨을 알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완전하게 청정해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며 스스로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부처님 제자는 가르침의 거울로 스스로를 비추어 보았다. 이와 같은 가르침의 거울 담마다사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거울이 살펴보는 자의 몸에 여러가지 덕성을 보여주듯, 통찰이라는 가르침들에 대한 보편과 특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앎과 봄이 되는 가르침의 거울(法鏡)은 통찰자의 오염을 정화하는 원리를 밝혀 그것을 끊어 해결함으로써 특별히 정신적 측면에서의 덕성을 나타내 보인다.”(ThagA.II.47)라고 했다.

 

가르침의 거울로 무상, , 무아를

 

테라가타에서 담마다사에 대한 또 하나의 게송이 있다. 이는 앎과 봄을 얻기 위해 가르침의 거울을 붙잡고 이 몸이 안팍으로 공허한 것을 관찰했다.”(Thag.395)라는 꿀라 장로의 게송을 말한다.

 

부처님 제자는 가르침을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이는 겉모습만 보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도 비추어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앎과 봄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자신에게 어떤 오염원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면 보인다. 마치 자신의 얼굴에서 기미나 주근깨, 잡티 등을 보듯이, 내면에서 탐욕, 성냄 등 오염원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에 의해서 앎과 봄을 가르침의 거울이라고 한다.

 

가르침의 거울로 오염원을 알고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 몸, 사실의 집적, 나의 자신을, 안팍으로, 일체 남김없이 가르침의 거울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ThagA.II.47)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가르침의 거울로 무상, , 무아를 보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

 

사람들은 매일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자신에게 더러움이 있는지 확인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라면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에게 있는 오염원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담마의 거울로 왜 비추어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긴자까바싸타의 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법문이 있다.

 

 

“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의 나아간다.’라고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을 설하겠다.”(S55.8)

 

 

경에서 부처님은 담마다사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의 거울로 비추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더 이상 악처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수다원이 되면 거친 번뇌는 제거 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이는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1)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매일 거울을 보듯이

 

앙굿따라니까야에도 거울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담마다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거울을 뜻하는 아다사만 나오지만 사실상 담마다사를 말하는 것과 같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수행승이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숙달하는가? 예를 들어, 장신구를 좋아하는 젊은 청춘의 남자나 여자가 맑고 밝은 거울이나 맑은 물의 대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거기에 더러운 것을 보거나 때가 묻은 것을 발견하면, 그는 더러운 것이나 때가 묻은 것을 지우려고 노력한다.”(A10.51)

 

 

사람들은 매일 거울을 본다. 얼굴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에게는 얼굴은 자기자신과 다름 없다. 얼굴에 뾰로지 하나라도 나면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거울은 외모를 비추어 준다.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비추어 흠결을 발견하지 못하면 만족한다. 자신이 만족하면 남도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도 있는 것이다.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 보아야

 

외모보다 마음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 마음의 거울은 다름 아닌 담마의 거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볼 것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는가,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는가,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는가,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게으른가, 자주 열심히 정진하는가?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하는가, 자주 집중에 드는가?”(A10.51)

 

 

모두 스무 개 항목이다. 오장애 대한 것도 있고 정진에 대한 것도 있고 삼매에 대한 것도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경에서는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담마다사는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것을 잘 해야

 

나의 법명은 담마다사이다. 담마다사 법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담마다사에 대하여 경전을 찾아 보니 더욱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닌 마음의 거울임을 말한다. 어떤 가르침의 거울인가?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A10.51)등으로 끊임없이 의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것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답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질문하는 것은 창의적인 것이다. 인류는 질문함으로 인하여 발전해 왔다. 수행자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등으로 질문해야 발전이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 마음의 때가 묻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하여 마음의 때가 발견되었다면 그 수행승은 그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끊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내고 정진하고 분발하고 책려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일으켜야 한다.”(A10.51)라고 했다.

 

운명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얼굴을 보는 거울은 수동적이다. 거울은 액면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은 능동적이다. 왜 그런가? 이는 청정도론에서 이숙적 마음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Vism.14.100)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숙적 마음은 과보의 마음(과보심)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현재심)은 유익한 마음이다. 이를 욕계를 예로 들어보면, 이숙적 마음(과보심)은 욕계 과보 여덟 가지 마음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현재심)은 욕계 유익한 여덟 가지 마음을 말한다.

 

쌍으로 되어 있는 두 종류의 여덟 가지 마음은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마음도표에서 31번째 욕계유익한 마음(착하고 건전한 마음, 현재심)‘31)기쁜, 지혜○,자극×’로 표현되고, 39번째의 욕계과보의 마음(이숙심, 과보심)‘(39)기쁜,지혜○,자극×’로 표현되어서 차이가 없다.

 

과보심(이숙심)의 마음과 현재심(유익한 마음)마음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이숙적 마음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Vism.14.100)라고 했다.

 

욕계과보의 마음(이숙심)은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액면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다. 이는 결과(과보)로서 나타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얼굴은 다르다. 얼굴에 때가 묻었다면 닦으면 된다. 현재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설령 과거 전생에 잘못을 하여 이 생에서 악과보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여 유익한 마음이 되었다면, 이는 자신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

 

현재심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과도 같아서 능동적이다. 그러나 과보심은 액면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서 수동적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숙적 마음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고 한 것이다.

 

마음의 거울은 내면을 비추어 준다. 이때 마음의 거울은 가르침의 거울이다. 착하고 건전한 가르침의 거울로 비추면 오염원이 드러난다. 스스로 질문을 하여 오염원이 드러났을 때 오염원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의 거울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비추어 자신의 오염원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얼굴의 때를 제거하는 것처럼 능동적이라고 했다. 얼굴에 때가 묻었다면 닦아 내듯이 마음의 때도 닦아 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2021-08-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