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늘도 감각을 즐기기에 바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10. 10:00
오늘도 감각을 즐기기에 바쁜

평범한 삶을 살다 죽으면 곧 잊혀진다. 영화대사에서 본 자막이 기억에 남는다. 보통사람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그는 보통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고 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의 죽음관에 대한 글을 보았다. 죽음에 대해 토론하다가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 간다."라는 취지로 써 놓았다. 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이는 허무주의에 바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자는 인생을 원타임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생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등 감각된 것만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나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결과 지극히 현실주의적으로 된다.

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 즉 '지금 여기'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현금' 또는 '현법'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딧따담마' 또는 '딧떼와 담마'라고 한다. 현실주의자들은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후회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는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감각을 즐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선정삼매를 즐기는 것이다. 어느 것을 즐기든지 자아에 기반하고 있다면 현법열반론자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 1번경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현법열반론자는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열반과 같다고 말한다. 물론 가짜열반이다. 마치 열반주라 하여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현법열반론자는 지금 경험하는 선정삼매의 즐거움에 대하여 열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사이비열반이다. 왜 그런가? 자아에 기반한 선정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이 일체가 된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든지 자아에 기반하면 허무주의자 아니면 영원주의자가 된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두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오온의 생성을 관찰하면 허무주의는 무너지고, 오온의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 역시 무너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지금 이순간을 즐기자'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순간을 관찰하자'고 말했다. 이는 연기법에서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자는 말과 같다. 관찰하다 보면 조건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라는 식으로 설명된다.

조건발생하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한다. 그 결과는 다음 것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갈애 다음에 대해서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가 된다. 이렇게 해서 연기가 회전된다. 우리 일상이 이렇다. 이를 윤회한다고도 말한다. 순간윤회를 말한다.

일상이 윤회이다. 연기가 회전되면 윤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윤회는 순간윤회라는 사실이다. 접촉하는 순간 윤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윤회는 접촉으로 부터 시작된다. 삼사화합촉에서 부터 연기가 회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윤회가 시작된다. 육입부터 시작하여 감각접촉, 느낌, 갈애, 집착 순으로 연기가 회전 된다. 이를 팔지연기라고 한다.

연기에는 십이지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팔지연기도 있다. 이밖에도 십지, 구지 등 여러 연기가 있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십이지연기가 대표적이다.

십이지연기의 시작은 무명으로 부터 시작된다. 과거 원인에 의해서 현재 내가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무명, 행, 식에 따른 것이다. 십이지연기는 삼세에 걸친 윤회를 설명하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가 된다.

팔지연기 출발점은 접촉에서 부터 시작된다. 시각접촉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청각접촉이 이루어지면 또다른 세상이 전개 된다. 이렇게 육처에서 매순간 세상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된다. 이것이 순간윤회이다.

팔지연기가 순간윤회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십이지연기는 일생윤회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무명부터 연기가 회전되기 때문이다. 과거 생에서 지은 행위에 대한 업이 익어서 현생에서 과보로 나타났을 때 일생윤회가 된다.

팔지연기이든 십이연기이든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 이는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기 마련이다."(S56.1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이지연기이든 팔지연기이든 공통적으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정형구로 끝난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행위를 했으면 반드시 과보가 따르게 되어 있다. 과보는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간을 두고 익을 수 있다. 빚을 진 자가 죽는다고 빚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세세생생 빚을 지고 간다. 빚을 갚기 전에는 윤회할 수밖에 없다.

삶은 본래 괴로운 것이다. 누군가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한다면 일시적인 것이다. 인생의 본바탕은 괴로운 것이다. 접촉이 이루어져 연기가 회전되었을 때 이는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정형구로도 확인된다.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확인된다. 고성제에서도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또 감각접촉으로 세상이 시작될 때도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라고 했다.

십이지연기와 팔지연기, 그리고 고성제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삶은 늘 절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1)슬픔(soka), 2)비탄(parideva), 3)고통(dukkha), 4)근심(domanassa), 5)절망(upāyāsā)이라는 다섯 단어가 복합된 것이다. 마치 괴로움에 대한 '괴로움의 5종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것이다.

지금 이순간을 즐길 것인가 관찰할 것인가? 지금 이순간 감각을 즐기고자 한다면 '괴로움 종합선물세트'를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한다면 불사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당연히 후자의 길로 가야 하지만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오늘도 감각을 즐기기에 바쁘다.

"벗들이여, 탐욕은 작은 잘못이지만 극복하기 어렵고,
분노는 커다란 잘못이만 극복하기 쉽고,
어리석음은 커다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극복하기 어렵다.”(A3.68)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 (Dhp63)

2021-11-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