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거리성자 페터 노이야르 영상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10. 12:12

거리성자 페터 노이야르 영상을 보고

 

 

세상에는 학위가 없어도 학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보통사람이지만 학자보다 더 학자다운 사람이 있고, 보통사람이지만 스님보다 더 스님다운 수행자가 있다. 페터 노이야르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도반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페터 선생에 대한 영상을 공유한 것이다. 어제 저녁에 보았다. 55분 분량으로 KBS에서 촬영된 것이다. 시기를 보니 2000 1 23일에 방영되었다. 요즘 유튜브 시대를 맞이하여 무려 21년만에 방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상 제목은 무소유 삶 거리 수행자 페터 노이야르’(
https://www.youtube.com/watch?v=35m5m2-MK8k )이다. 그때 당시 ‘KBS 스페셜로 특별제작된 프로이다. 그런데 유튜브에 공개된지 3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반이 우연히 발견하여 공유한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거지성자라는 책을 접해서 알고 있고, 또한 책의 저자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페터 노이야르에게 붙여 주는 수식어가 있다. 그것은 거지성자이다. 왜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거지처럼 살지만 거지같지 않은 거지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거지처럼 보이고 노숙자처럼 보였지만 청정한 삶을 사는 모습이 성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페터 선생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려 주었다. 1980년대 가난한 유학생에게 힘이 되어 준 사람이라고 했다. 거지 형상의 사람을 발견했는데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통달한 듯한 모습에 끌렸다고 한다. 이후 가난하고 고독한 유학생은 틈만 나면 거지성자와 어울렸다고 한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페터 노이야르가 한국방문 한 것부터 시작된다. 전재성 선생과 대화하며 길을 걷는 장면이 있는데 21년 전의 일이다.

 

 

영상을 보면 전재성 선생의 21년 전의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그때 당시 40대 후반으로 머리는 흑발이고 비교적 젊은 모습이다. 지금은 백발에 도인의 모습이다. 불과 20년 만에 이런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영상에서는 송광사 학인스님들과 대담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무려 4시간 토론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마 스님들이 거지성자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 같다. 출가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성자의 호칭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 같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그 스님은 이 공부는 스승없이 혼자 할 수 없는 공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혼자서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페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살아 있는 스승이 있었다면 그를 모범으로 수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스승이나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후계자를 내세우지 않고 가르침이 바로 스승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영상에 따르면 페터 선생은 나이기 40세 가량 되었을 때 출가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스승을 만났지만 스승다운 스승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쾰른 대학교에서 노숙하며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인 스님들에게 경전이 스승이라고 말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을 보면 부처님이 최후로 당부한 말씀이 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Dhamma)과 계율(Vinaya)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이 스승인 것이다.

스승이 있으면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한다.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거르침에 대한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

 

부처님은 믿고 의지할만한 스승이 없을 때 가르침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어떤 논리로도 부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오늘날 부처님 원음이라고 하여 전해져 오는 빠알리 니까야가 스승이 없는 시대에서는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는 스승없이 공부했다. 쾰른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불교경전이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에서는 이미 백년 전에 니까야가 독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맛지마니까야의 경우 1896년 독일에서 칼 오이겐 노이만에 의해서 독역되었다. 우리나라보다 무려 백년이 빠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는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의 경(M16)'에 나오는 병아리 부화 비유를 읽고서 이를 모티브로 하여 소설 데미안을 썼다고 한다. 이는 소설에서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구절에 해당된다.

페터 선생은 불경 등 동서양 고전을 스승으로 삼아 혼자 공부했다. 쾰른 대학교 숲속에서 노숙하며 음식은 얻어먹고 옷은 주은 것을 기워 입었다. 부처님이 산 것처럼 똑같이 산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거지처럼 보이고 노숙자처럼 보였지만 행위를 보면 성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를 거지성자 또는 거리성자라고 한다. 대체 거지와 성자는 어떻게 구분될까? 초기경전에 답이 있다. 이는 걸인(乞人)과 걸사(乞士)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차이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라고 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이다.

청정한 삶은 바라문 사주기에서 범행기가 연장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불교수행자들은 출가하면 범행기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이를 순결한 삶 또는 고귀한 삶이라고 말한다. 탁발에 의존하는 등 사대필수품에 의존하는 청정한 삶을 말한다.

 

페터 노이야르도 부처님과 제자들이 살았던 것처럼 숲에서 살고 걸식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영상에서는 무소유의 삶을 매우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소유 삶에 대하여 거지상자 책에서는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산다고 했다. 페터 선생은 쾰른 대학교 숲속에 그렇게 살았다. 여기에 더하여 음식을 얻어먹는 등 부처님 당시 수행자처럼 산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거의 완전한 무소유의 실천이었다. 바로 이런 점이 유학생들 눈에 포착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학생들에게 거지성자 또는 거리성자로 불렸을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가 성자가 된 것은 성자가 되고 싶다고 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성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지행합일과 관련이 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유튜브영상에서 페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모르는 것은 책에서 찾아 그 연관성을 찾는다. 단순히 지위나 학위를 추구하는 학생보다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삶의 연관을 깊이 통찰해 내 삶의 해답을 얻으려고 한다.”

 

 

페터 선생은 쾰른대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일과를 보냈다. 아침 9시 문을 열 때 들어 가서 저녁 9시 문을 닫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지낸 것이다. 믿고 의지할 만한 마땅한 스승이 없을 때 도서관에 있는 책이 스승이 된 것이다.

 

페터 선생은 인터뷰에서 단순히 지위나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식을 통하여 삶의 해법을 찾고자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지식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려고 한다.”라고도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아닌 가르침의 실천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청정한 삶은 무소유로 실천된다. 그래서 페터 노이야르는 철저하게 무소유적 삶을 살았다.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 사는 것은 기본이다. 쾰른대학교 숲속에서 노숙을 하는데 영상을 보면 한겨울에도 노지에서 자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부처님의 고행을 연상케 한다.

 

 

맛지마니까야에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이 있다. 경에서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6년 동안 고행에 대한 회상이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나의 고통스런 삶은 이와 같았다.”라며 말했다. 어느 정도였을까?

 

부처님의 수많은 고행 중에서 숲에서 잔 것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라고 했다. 어떤 두려움일까? 이에 대하여 어떠한 자든지 아직 탐욕을 제거하지 못한 자로서 이 우거진 숲에 들어오면 거의 모두가 몸에 털이 곤두선다.”(M12.33)라고 했다.

 

숲에서 잔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고 자는 것과 다름없다. 더구나 겨울철 추울 때도 숲의 노지에서 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겨울 차가운 밤에 서리가 내리는 팔 일간이 찾아오면, 나는 노지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M12.34)라고 했다.

 

페터 노이야르는 부처님을 닮고자 했던 것 같다.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삶을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추운 독일의 겨울날씨에서도 쾰른대학교 숲속에서 잠을 잔 것이다.

 

작년의 일이다. 금요모임 멤버들 식사모임이 있었다. 그때 전재성 선생은 페터 선생과 연락이 닿았다고 말했다. 무려 20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인터넷 시대에 어떤 연유로 해서 편지와 사진을 받은 것이다.

 

 

사진을 보니 마치 페터 선생은 성자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 머리는 백발로 변했다. 얼굴은 맑고 평온해 보여서 도인처럼 보였다. 손으로 쓴 편지를 보니 한글자 한글자 정과 성을 다해서 쓴 것 같다. 이후로도 전재성 선생은 페터 선생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거지성자 책이 나온 것은 1999년이다. 페터 선생에 대한 KBS스페셜이 방송된 것은 21년전의 일이다.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페터 선생은 동구권을 여행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페터 노이야르는 한국에서 거지성자 또는 거리성자로 알려져 있다. 책도 나오고 방송도 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삶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거지성자 후편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번역 일 때문에 바빠서 그 동안 소홀 했는데 페터 선생도 만나고 시간이 된다면 후편도 쓰고 싶다고 했다.

 

무소유,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페터 선생처럼 살면 거의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출가 수행자들도 완전한 무소유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청정한 삶은 무소유로 완성된다.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 살면 무소유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가수행자라면 탁발에 의존하는 삶이 무소유적 삶의 실천이 요구된다.

 

무소유의 삶을 살면 청정한 삶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S22.59)라고 했다. 청정한 삶이 이루어졌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범행기가 연장된 것이다. 청정한 삶은 순결한 삶, 고귀한 삶이다. 누구나 고귀한 삶을 살면 고귀한 자가 된다. 그 첫번째 조건은 무소유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은 숲에서 살았고, 걸식에 의존했고, 분소의를 기워서 입었다. 페터 노이야르는 청정한 삶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 모습이 성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2021-11-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