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이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24. 20:17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이려면

 


맛지마니까를 읽고 있다. 머리맡 맛지마니까야를 말한다. 오미크론에 확진 된 이후 집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소설 읽듯이 읽지는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읽는다. 읽다 보니 어느 새 26번 경을 읽고 있다.

 


경을 읽을 때는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까? 한자 한자, 한구절 한구절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처음 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이해가 가야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각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고작 십여페이지 읽는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때로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정신영역이다. 한번도 체험해 보지 않은 선정이나 해탈,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줄 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깨달음은 본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갖가지 비유로 설명해 놓았다. 열반에 대해서는 안전하기가 섬과 같다고 했고, 안은하기가 동굴과도 같다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포커스는 열반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언어로서 설명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M26)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왜 그랬을까?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은 전지성에 도달하여 뭇삶의 오염의 정글과 가르침의 깊이에 대해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다."(Pps.II.176)라고 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는 사함빠띠 브라흐마에게 "하나님이여, 나는 곤란을 예견하고 극히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M26)라며 게송으로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게송에서 '곤란을 예견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나는 내가 만들어낸 극히 미묘한 최상의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피곤하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인류가 그들의 요구를 충족하게 될 믿음의 그릇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Srp.I.203)라고 되어 있다.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설하기란 피곤한 일일 것이다. 소의 귀에 경 읽기나 같은 것이다. 탐, 진, 치로 사는 자들에게 무탐, 무진, 무치를 설하면 먹혀 들어 갈까? 아마 그들은 크게 웃어 버릴지 모른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열반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힘만 들고 입만 아플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지 않고자 했었을 것이다.

부처님 원음을 접한지 십년이 넘었다. 나는 언제 처음 접했을까? 따져 보니 2009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한국명상원 다니면서 묘원선생으로 부터 1년 동안 법문을 들은 것이 본격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와 본격적인 만남은 13년 되었다.

초기불교와의 만남은 니까야를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었다. 세상에 이런 가르침도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있는줄조차 몰랐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불교에서도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이후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상 초기불교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역경전도 있기는 했지만 대중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통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불교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이제 니까야 경전은 자연스러운 것이 될지 모른다.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신념체계를 바꾸지 않는다. 개종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부처님 원음은 어떨까? 불교인이라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마치 새로운 것을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때로 경계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 원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종교는 대체로 보수적이다. 신흥종교가 발흥해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도 종교의 보수성 때문일 것이다. 이단이 오래 가지 못하고 신흥 종파가 대를 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할까?

불교에는 다양한 불교 전통이 있다. 그러나 모든 불교전통의 뿌리는 초기불교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가 가장 보수적이다. 그런데 어느 종교이든지 보수회귀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갈수록 보수회귀 본능은 강하게 작동된다. 불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보면서 불교의 진수를 맛본다. 이 세상 그 어느 고전보다도 탁월하다. 니까야 하나만 있으면 다른 책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혜의 보고이다. 그러나 니까야를 접한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옆에 보물이 있음에도 알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맛지마니까야가 번역된지 20년 되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전재성 선생이 2002년 초판 발행한 것이 시초이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다. 과연 얼마나 읽고 있을까?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본다. 아마 소수 사람들만 접했을 것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면서 종종 오자와 탈자 등 오류를 발견한다.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음에도 발견되는 것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류가 발견되면 사진을 찍어서 지체 없이 전재성 선생에게 문자로 발송한다. 개정판이 거듭될수록 완성도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사상과 종교가 그렇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M26)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신념체계를 내려 놓아야 함을 말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와 같은 것이다.

"이 문에 들어 오려거든 기존의 신념이나 사상이나 신앙을 먼저 내려 놓으시오."

2022-04-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