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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권 담마의 거울 2015 II,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1. 13:14

66권 담마의 거울 2015 II,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평행선을 달릴 때 끝내야 한다. 그럴 때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렇군요.”라는 말이다.

 

종종 댓글 논쟁을 벌일 때가 있다. 견해차이로 인하여 감정이 상하는 경우도 있다. 선종의 논리를 폈을 때 그렇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특징으로 하는 선종에서는 언어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설령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내쳐진다.

 

이제까지 수많은 글을 써 왔다. 십년이상 매일 썼으니 글은 삶의 일부와 같은 것이다. 글쓰기가 생활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글을 통해서 만난 것이다. 댓글로 만났다.

 

댓글을 보면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긍정적인 글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부정적 글도 종종 발견된다.

 

부정적은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부정적인 글이 된다. 이처럼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득이 되지 않는다. 평행선만 달리다가 감정만 상하게 된다. 이럴 때 빨리 정리 해야 한다. 어떻게 정리하는가? 그것은 그렇군요.”라는 말이다.

 

논쟁을 끝내고자 할 때 그렇군요.”라는 말을 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블로거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다. 부정에 더 가깝다. 이렇게 그렇군요.”한방에 논쟁을 끝내버린다.

 

불로그에 글쓰기 16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하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선종계통 사람들이 그렇다. 논쟁을 해 보았자 피곤할 뿐이다. “그렇군요.”라는 말로 끝내 버린다.

 

선종계통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 같다. 그들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언어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직접 쓴 글을 좀처럼 볼 수 없다. 텅 빈 페이스북을 보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아마 진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전승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언어를 부정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언어로서 진리를 펼쳤다. 부처님이 45년동안 설법한 것이 니까야에 남아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는 니까야를 부정한다. 후대에 편집된 것이고 진짜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한다.

 

경전에 대하여 의심하면 경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불교 스님들 중 일부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조계종 아사리 자현스님이 대표적이다.

 

자현은 선종의 바탕에서 타전통의 불교를 비판한다. 불교TV 등에서 강연한 것을 들어 보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에 가깝다. 테라와다 불교를 츠끼다시불교라고 말한다. 테라와다 전통에 대하여 수많은 부파 중에서 살아 남은 것 중의 하나라고 폄하한다. 또한 구전으로 전승된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록으로 남긴 것이 정확하다고 말한다. 상식을 깨는 말이다.

 

한국불교에는 자현과 같은 사람이 많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니까야를 비난한다. 아마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의 전통에서 읽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대체로 무지하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언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니 경전을 대체로 무시하는 것 같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 글로벌 시대에 사고방식이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한국불교 스님들 중에 아직까지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르는 스님들이 있는 것 같다. 경전을 보지 않으니 교학이나 교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마음을 비워라든가, “내려 놓아라라 등과 같은 말만 되풀이 할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부처님일생부터 공부해야 한다. 부처님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니까야를 읽어야 한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자가 니까야를 비난한다. 니까야를 듬성듬성 보아서도 안된다. 니까야를 필요한 부분만 보아서도 안된다. 마치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담마의 진수를 알 수 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가르침이 있을 때 나의 한계를 본다.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것이다. 니까야를 읽으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불교인이라면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나 경전을 근거로 해야 한다.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니까야에 근거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한다면 그 사람의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말이나 글에서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정직한지 알려면 대화하라고 했다. 한입으로 두 말하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혜 있는지 알려면 토론해 보라고 했다. 토론을 통해서 깊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일까?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 , 치로 아는 것이다. 가장 쉽게 드러나는 것은 분노이다. 그 다음은 탐욕이다. 어리석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토론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말하는 것과 같다. 경전을 근거로 말한다면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것이 된다.

 

불교인이 가장 의지해야 할 것은 경전이다. 왜 경전인가? 경전은 삼보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 승 삼보 중에서 법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경전을 부정한다면 불교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문자에 매이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는 삼보 중에 법보를 부정하는 자가 된다.

 

불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 현실에서 승보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는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는 부처님과 가르침만 있게 된다.

 

부처님은 지금여기 계시지 않다. 그러나 남겨 놓은 말씀은 접할 수 있다. 초기경전이 있어서, 니까야가 있어서 법보는 있게 된다. 불자들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선종스님들은 공통적으로 경전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한다. 선종의 전통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자현 같은 승려가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삼보를 무시하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니까야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불보와 법보를 무시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불자라면 삼보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법보에 의지해야 한다.

 

법보인 니까야에 의지해야 한다. 니까야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해야 한다. 선종스님들이 아무리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말해도 정견을 가진 불자라면 법보인 니까야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해야 한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고 있다. 글을 쓰면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나의 견해라기 보다는 경전에 있는 말씀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시절인연이 되어서 책으로 내고자 한다.

 

책 제목을 ‘66 담마의 거울 2015 II’ 로 정했다. 66번째 책이다. 담마에 대한 글로서 2015815일부터 1030일까지 쓴 글이다. 모두 31개의 글이 실려 있는데 293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모든 곳에 비를 내리는 자

2.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3.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4. 사람 구별하는 방법 네 가지

5.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와 비교된 가르침과 계율

6. 야단치는 것과 훈계 하는 것

7. 불안으로 세상을 관찰하였을 때

8. 악마의 유혹

9. 불사(不死)에 대한 게송

10. 감자를 한 바구니에 넣고 씻으면

11. 오동나무의 뿌리, 번뇌의 뿌리

12. 일상에 적용되는 사띠(sati)

13.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된 윤회의 감옥

14. 다섯 가지 이룰 수 없는 것

15.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을 때

16. 세 가지 행복을 열망하면서

17. 이런 친구

18.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19. 버리고 없애는 삶을 위하여

20.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21. 행복한 수행공동체

22.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23. 저열한 사유를 제거 하려면

24. 사띠(sati)는 바른 기억(正念)으로

25.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

26. 사유의 달인과 사유중지

27.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28.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29. 네 죽음을 기억하라

30.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대죄

31. 연기법적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들

66 담마의 거울 2015 II_220725.pdf
2.47MB

 

 

31개 글에서 어느 한 개의 글도 버릴 것이 없다. 글을 쓸 때 당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쓴 것이다. 경전을 열어 보고 사전을 찾아 보고 각주를 참고하는 등 하나의 완성된 글을 쓰고자 노력했다. 언젠가 책을 낼 것을 염두에 두면서 쓴 것이다.

 

책은 pdf로 만들어 배포한다.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누군가 다운 받아 갈 것이다. 보관용으로는 두 권 만든다. 한권은 사무실에 보관하고 또 한권은 집에 보관한다.

 

부처님은 언어로 진리를 설했다. 부처님이 언어로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은 한자도 설한바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진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되어 왔다고 말한다. 이런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은 볼 수 없다.

 

올린 글에 대하여 종종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를 부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 말을 들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경전을 읽을 필요도 없고 수행을 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을 접했을 때 빨리 끝내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렇군요.”라는 말이다.

 

그렇군요.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립적인 말이다. 상대방에게는 긍정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부정적인 것이다. 상대방 체면도 세워주면서 논쟁을 쉽게 끝낼 수 있는 말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렇군요.라고 말한다.

 

 

2022-08-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