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박명숙 도예전 ‘연꽃의 빛’에 가길 잘 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1. 09:02

박명숙 도예전 ‘연꽃의 빛’에 가길 잘 했다

 

 

새벽에 무엇을 해야 할까? 잠을 더 잘 수도 있지만 남는 시간을 잠으로 보내기는 아깝다. 이럴 때는 일어나서 경행을 해야 한다. 가볍게 걷는 것이다. 몇 보 안되는 방을 왕래하는 것이다.

 

경행을 할 때 암송을 하면 효과적이다. 암송을 하고 나면 확실히 집중이 된다. 이 집중된 힘으로 경행을 했을 때 행선이 된다.

 

오늘 새벽 행선할 때 오온의 의미를 새겼다. 행선하는 것 자체가 오온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몸은 나무토막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단지 생명 있는 것이어서 신진대사를 스스로 하는 나무토막인 것이다.

 

몸은 정신이 있어야 움직인다. 몸에 정신이 없다면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발을 옮길 때 발을 옮기려는 의도가 있어서 옮긴다. 의도가 없다면 한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이다.

 

암송과 행선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아니 글을 치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엄지치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시간 엄지치기하면 눈이 피로하다. 눈이 침침하여 오전일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오늘 써야 할 글이 있다. 어제 서울에 간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것이다. 엄지치기보다는 자판때리기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찍 일터에 나와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박명숙 도예전 연꽃의 빛

 

어제 도예전 갔었다. 인사동에 있는 마루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연꽃의 빛이라는 이름의 도예전이다. 정찬주 작가의 부인 박명숙 여사의 도예전이다. 어제 정찬주 선생의 페이스북 글을 보고서 알았다. 도예전은 928일부터 104일까지 열린다.

 

 

정찬주 선생과 인연이 있다. 작년 화순에 찾아가서 뵌 적이 있다. 그 때 정찬주 선생 부부가 환대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과의 인연이다. 미천한 블로거의 글임에도 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종 코멘트까지 달아 준다.

 

이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현재 나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의 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다. 공감 표시를 하여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읽어 주시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인사동으로 출발하기 전에 꽃집에 들렀다. 자주 가면 단골이 된다. 꽃집 아저씨에게 장미 세 송이를 달라고 했다. 빨강, 분홍, 자주색의 장미에 안개꽃을 곁들였다. 만원 들었다,

 

 

차를 가지고 갔다. 금요니까야 공부모임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도예전 들렀다 가고자 한 것이다. 주차장이 문제가 되었다. 가장 무난한 곳은 종묘주차장이다. 전시장까지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주차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애용한다. 경차이기 때문에 할인 받는다.

 

도예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간다. 거리가 멀면 만나기 힘들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좋은 기회가 된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작가의 노력과 불의 힘으로

 

전시장에서 설명을 들었다. 정찬주 선생이 작품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갖가지 형상의 도자기 갖가지 색깔의 도자기는 실용적인 것이 아니다. 물병 같다고 하여 물병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화병같다고 하여 화병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도예품은 예술작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고 했다. 도자기에 대하여 안목이 있는 사람은 도자기를 보는 눈이 있을 것이다. 도자기에 대하여 문외한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일지 몰라도 전문가가 본다면 예술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도자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정찬주 선생에 따르면 1,350도의 불에서 구운 것이라고 한다. 기계를 쓰지 않고 오로지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불이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불이 어떻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나의 흙덩이가 불에 들어 갔다 나오면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색깔도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마치 청자처럼 청색도 있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도 있다.

 

작품 중의 작품도 있다. 마치 청자와 백자를 혼합해 놓은 듯하다. 푸른기가 감도는 백자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컬러를 만들어 냈을까? 정찬주 선생에 따르면 이런 색깔을 만들어내기 까지 20년 걸렸다고 한다.

 

 

하나의 작품을 마주 하고 있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을까? 흙을 빚어서 구웠다고 해서 다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수율은 10% 가량이다. 백 개를 구우면 구십 개는 깨버리고 열 개 건지는 것이다.

 

도자기는 공산품이 아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양산되는 것이 아니다. 도예가의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불의 힘이다. 도자기는 도예가의 노력과 불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사진으로 도자기를 접하고 있다. 마음에 쏙 들어 온다. 가지고 싶어진다. 아파트 거실이나 사무실에 하나 가져다 놓으면 근사할 것 같다. 그러나 도자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도자기는 생활용품이 아니라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두 가지를 지적해 주었는데

 

도자기 구경을 마치고 차를 마셨다. 정찬주 선생과 박명숙 선생과 셋이서 자리를 함께 했다. 작년 봄에 한번 만났는데 이제 두 번째 만났으니 구면이 된다. 그러나 매우 익숙하다. 이미 에스엔에스와 전화로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찬주 선생 부부와 한시간 반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긴 글을 읽어 주시는 정찬주 선생이 조심스럽게 두 가지를 말해 주었다.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다.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스승도 없는 글쓰기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 다소 거친 것 같다. 때로 과격한 표현도 한다. 글에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글을 쓸 때 동어가 반복되는 것을 피한다. 가능하면 다른 것을 찾아서 쓰고자 한다. 그런데 글에서 종종 같은 문장을 쓸 때가 있다. 마치 후렴구처럼 쓸 때도 있다. 정찬주 선생은 가능하면 같은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정작업이 이루어져 할 것이다.

 

글을 쓸 때 좀더 맛깔나게 쓰기 위해서 유행어나 비속어를 쓰기도 한다. 글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도 사용한다. 그러나 지나친 유행어나 통속어, 비속어는 글의 품위를 떨어뜨리기 쉽다는 것이다. 마치 잘 흘러가는 물에 바위가 하나 있어서 물이 우당탕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정찬주 선생은 두 가지를 말해 주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아직까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동일문장과 유행어 사용을 자제하면 훌륭한 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법구경에서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Dhp.252)라고 했다. 나의 글쓰기 습관에 대해서 누군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무나 지적하지 않는다. 애정이 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적해 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기비하에 대하여

 

정찬주 선생에게 한가지만 더 지적해 달라고 했다. 생각나지 않는 듯 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문제에 대해서 말 했다. 그것은 자기비하에 대한 것이다.

 

종종 글에서 자기비하를 한다. 이런 경우는 자극 받았을 때이다. 어떤 경우인가?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여겼을 때 그렇다. 이른바 인정욕구가 발동된 것이다. 특히 작가나 시인 등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이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에 나는 비주류, B, 3류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것도 자만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열등감도 자만이다. 자만이라 하여 우월적 자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열등적 자만도 있고 심지어 동등적 자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열등적 자만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발생된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글을 올릴 때는 반드시 날자와 서명을 잊지 않는다.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의미한다. 이런 글쓰기는 십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쓰는 작가나 시를 시인을 보면 일종의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난다.

 

시기와 질투심은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대개 열등적 자만이 되기 쉽다. 작가도 아닌 것이 글을 쓰고, 시인도 아닌 것이 시를 쓴다고 하여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비주류, B, 3류라고 자기비하는 것이다.

 

정찬주 선생은 예상대로 자기비하는 글을 쓰지 말라고 했다. 내가 쓰는 글은 소설이나 시와 같은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소설가는 소설가의 길이 있고, 시인에게는 시인의 길이 있고, 블로거에게는 블로거의 길이 있다. 그럼에도 장르가 다른 분야와 비교해서 열등감을 표출한다면 자기비하가 될 것이다.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불교를 주제로 하여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다. 물론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올린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정찬주 선생은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독보적인 글쓰기라고도 볼 수 있다.

 

불교를 주제로 하여 경전적 글쓰기 하는 사람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이에 정찬주 선생은 저술가라고 말했다. 더 덧붙인다면 불교저술가라고 했다. 불교저술가, 마음에 드는 말이다. 작가도 아니가 시인도 아니고 블로거라고 했는데 불교저술가라고 하니 품위가 있어 보인다.

 

 

윤회속에서 유전하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자가 없는 것처럼

어떤 때는 공덕을 짓고

어떤 때는 악덕을 짓는다.”(Vism.17.119)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태어나면서 맹인인 자는 남이 인도하지 않으면 어떤 때는 길로 가고 어떤 때는 길 아닌 곳으로 간다.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 때는 선행을 하기고 하고 어떤 때는 악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 현상을 잘 관찰하면 무명이 그쳐서 적정에 든다고 했다.

 

본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학도 출신으로 개발업무에 종사하던 자가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이라는 것을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스타일대로 쓰게 되었다.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동일문장도 쓰게 되고 유행어도 쓰게 되었다. 때로 자기비하 하는 글도 쓰게 되었다.

 

나는 불교저술가

 

어제 박명숙 선생 도예전에 가서 정찬주 선생 부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가장 큰 수확은 글에 대하여 몇 가지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마치 위빠사나수행센터에서 수행점검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찬주 선생에 따르면 불교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는 유일하다고 했다. 더구나 내용도 좋다고 했다. 다만 몇 가지를 보완하면 훌륭한 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불교저술가라는 칭호까지 붙여 주었다. 이 말에 대단히 고무되었다. 어제 박명숙 도예전 연꽃의 빛에 가기를 잘 했다.

 

 

2022-10-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