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10. 06:07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은?


유튜브를 보다가 죽음에 대한 것을 발견했다. 죽음학에 대해서 연구한 최준식 선생 강연이다.(https://youtu.be/N-DZaA56yQg) 시리즈로 되어 있는데 현재 BTN(불교TV)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거의 대부분 회피하기 때문에 잘 모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준식 선생의 BTN 강연을 들으면 명확해 진다. 한번 들었던 것을 또다시 듣고 있다. 이번에는 필기구를 준비했다. 메모하며 듣는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몇 편의 영화가 있다. 사랑과 영혼, 식스센스, 디 아더스가 대표적이다. 사랑과 영혼은 영혼과 소통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식스센스와 디 아더스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사는 것에 대한 영화이다. 특히 식스센스에서의 반전은 유명하다. 한 소년으로 인해 자신이 비로서 죽은 것임을 알게 된다.

죽음 이후 상황을 알 수 없다.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근사체험으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특히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영혼에 대한 것은 흥미롭다.

영화를 보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생시에서와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준식 선생에 따르면,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다는 것을 빨리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빨리 다음 세상에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만이 죽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자기인식(Self Consciousness)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인식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인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자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자기인식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만이 장례를 치룰 수 있는 것도 자기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죽음의 극복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종교라고 한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회피할까?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최준식 선생은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이다. 둘째는 죽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다. 셋째는 사후 홀로 남을 것이라는 공포이다. 넷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다. 다섯째는 사후 삶에 대한 무지이다.

죽음은 무섭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고 나면 더 이상 무섭거나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죽음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 다섯 가지 중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에 대하여 최준식 선생은 죽음에 대한 가장 큰 공포라고 했다. 내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장 큰 공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 본 게송이 생각났다.


"Bhavev
āha bhaya disvā,
bhava
ñca vibhavesina;
Bhava
nābhivadi kiñci,
nandiñca na up
ādiyi."

"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를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부처님이 하느님(Brahma) 바까에게 말한 것이다. 색계 초선천에서 일겁의 수명을 가진 망상적 하느님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다. 신통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위 빠알리 게송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 했다. "나는 참으로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고/ 존재하지 않음을 찾지만 존재들만을 보노라./ 나는 어떤 존재도 집착하지 않고/ [존재에] 기꺼워함을 취착하지 않노라.//"라고.

부처님은 왜 존재에서 두려움을 본다고 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에 대한 갈애 때문일 것이다. 집성제에서 말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집착이다.

누구나 영원히 살고자 한다.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특히 복과 수명이 보장된 천상의 존재가 그렇다. 그래서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에게 "존자여, 이것은 항상하고 이것은 견고하고 이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홀로 완전하고 이것은 불멸이고 이것은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으니 따라서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은 없습니다."(M49)라고 말한 것이다.

하느님 바까는 고작 일겁을 살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 했다. 그는 자신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색계 초선천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아와 세계가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홀로 완전하고 이것은 불멸이고 이것은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은 것"(M49)으로 본 것이다. 마치 요즘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참나를 설명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불멸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그대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습니다."(M49)라고 말했다. 무지하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 영원의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무지하기 때문에 사라짐에 따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 바까를 깨우쳐 주고자 했다. 그래서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홀로 완전하지 않은 것을 홀로 완전하다고 말하고 불멸이 아닌 것을 불멸의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생겨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윤회하는 것을 두고 그것에 대하여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있는데도,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M49)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는 유일신교와 같았다. 이는 브라흐마(하느님)에 대하여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M49)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가장 크다고 했다. 더구나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견해에 집착 되어 있는 천신들에게는 충격이 컸을 것이다.

천신들은 자신들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노라."(M49)라는 게송으로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말한다.

천신들은 왜 사라짐에 대한 공포를 느꼈을까? 근본적으로 무명 때문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반대로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느님이여, 존재를 존재로 곧바로 알고 존재가 존재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존재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존재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존재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존재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존재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있는 한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땅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했다.

여기서 땅은 수학에서 X같은 것이어서 어느 말이 든지 대입할 수 있다. 결국 이 말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로 요약된다.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내것은 자만에 대한 것이고, 자아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있는 한 존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다지 두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최준식 선생의 죽음학 강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천신들은 처음 부처님 가르침을 접했을 때 두려웠다. 존재의 두려움이다.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 것 같은 천신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가르침, 죽음을 초월하는 해탈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천신들은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두려움에서 전율로, 전율에서 감동이 일어 났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다.”(It.30)라고 했다.

여기서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이는 태어남 등의 경외의 토대를 조건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은 어떤 뜻일까? 이는 불건전한 것들이 줄어들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늘어나게 함을 말한다.

죽음의 극복에는 두 가지가 요청된다.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다. 배우다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이 있지만 경이로 바뀐다. 다음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하면 전율이 있고 감동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감동을 냐나상베가
āasavega), 지혜에 의한 감동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 죽음을 피하거나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긴다. 하느님 바까처럼 불멸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죽음의 공포에 떨 것이다. 이는 무지에 따른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알면 해소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죽음학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지만 알면 알수록 전율이 일어나고 실천하면 할수록 감동이 일어날 것이다. 죽음의 극복이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복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죽음학을 들어 보지 못했다. 이번에 BTN에서 최준식 선생의 죽음학을 시리즈로 듣게 되었다. 어느 방송에서도 접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학 강연을 듣고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덜할 것 같다.


2022-10-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