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20. 10:06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가 있다. 스님에 대한 글이다. 스님들이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 때 침묵해야 할까? 할 말을 하면 비방이 되고 비난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삼보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스님은 승보로서 부처님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 없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물(施物)을 받았을 때

 

스님의 언어가 있다. 천인사,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스님은 말을 할 때 신중해야 한다. 신도들로부터 시물(施物)을 받았을 때 고맙습니다.”라든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축원을 해 주어야 한다.

 

법구경에 아유 반노 수캉 발랑”(Dhp.109)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은 건강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길!”이라는 축원문이다장로가 시물을 받았을 때 축원해 주는 말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축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의 어떤 스님들은 고맙습니다.”라든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닌다.

 

성자의 과위에 오른 출가 수행승은 복전(福田)이다. 복밭으로서 스님에게 시물을 공양하면 커다란 공덕이 된다. 테라와다 예불문이자 수호경인 라따나경’(Sn.2.1)에서도 확인된다. 이는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님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 길로 가신 님의 제자로서 공양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27)라는 게송이 말해준다.

 

스님은 재가불자와 다른 사람이다. 세속의 사람이 아닌 출세간의 사람이다. 아무리 스님 같지 않아 보이는 스님이라도 공양해야 한다. 안거 한철 나면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스님은 어버이와도 같다.

 

자식은 어버이에게 용돈이나 먹을 것 등을 선물한다. 그때 어버이가 자식에게 고맙습니다.” 라든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받는 것이다. 스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은 절대로 고맙습니다.” 라든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스님은 아유 반노 수캉 발랑이라는 말로 충분하다. 시물을 공양하며 공덕을 바라는 신도들에게 고맙습니다.” 라든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

 

어느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말이 되어 버렸다. 원문을 우리말로 바꾸었는데, 그 우리말 해석을 또다시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해석한 것이다. 상가(sagha)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한국불교에서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승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상가에 대하여 스님들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한 스님들에게 귀의합니다.”로 되어 버렸다.

 

한글삼귀의문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입학했었을 때이다.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배정받아 들어 갔었다. 음악시간에 처음 가르쳐 준 것은 삼귀의와 사홍서원이었다. 그때가 1973년이다.

 

한글삼귀의문이 처음 나온 때를 1970년대 초반으로 본다. 그러고 보니 한글삼귀의문이 처음으로 보급되기 시작할 때 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사십대 중반이 되어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한글삼귀의문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승보는 거룩한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심하게 망가졌다고 본다. 자승 전총무원장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교가 이렇게 훼손된 것은 한글삼귀의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승보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요즘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왔다. 누구든지 사서 볼 수 있다. 니까야를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승보의 개념도 스님들이 아닌 승가공동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되면 한국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은 가능하면 원어로

 

스님들을 비롯하여 불교인들은 될 수 있으면 원음을 접해야 한다. 경전도 원음을 직역한 것을 보아야 한다. 예불문이나 수호경이 있다면 원문으로 암송하는 것이 좋다. 왜 그런가? 경전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지방어를 고집하고 보편어를 침해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상처를 수반하고 불안을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하는 것으로 잘못된 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M139)

 

 

부처님은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방어는 오늘날 각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도 같은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인도에서는 수많은 언어가 있었는데 수행승들도 각각 수많은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행승이 자신의 언어로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했을 때 뜻이 잘못 전달될 가능성도 높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분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말에 다르고 다르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방어로 사용되었을 때 왜곡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러 지방에서 같은 것을 두고 접시라고 여기고, 그릇이라고 여기고, 사발이라고 여기고, 받침이라고 여기고, 팬이라고 여기고, 옹기라고 여기고, 컵이라고 여기고, 대야라고 여긴다.”(M139)라고 말했다.

 

부처님 말씀은 가능하면 원어로 쓰는 것이 좋다. 그래서일까 한역경전을 보면 원어를 종종 볼 수 있다. 지혜를 뜻하는 반야는 빠일리어 빤냐(pañña)에서 유래된 것이다.

 

뜻이 잘 통하지 않으면 원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밖에도 사람 이름 이나 지명 등 수많은 말이 음역되어서 사용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능하면 원음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부처님은 지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 지방 사람들에게 지방어를 사용해야 가르침이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방어를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다. 잘못하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상가를 스님들이라고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가능하면 보편어를 사용하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어는 부처님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던 중앙어인 마가다어를 말한다. 오늘날 빠알리어가 보편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5세기 붓다고사는 나는 깨달은 님의 말을 그 자신의 언어(즉 부처님이 사용하신 보편어인 빠알리어)로 배우도록 처방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율장에도 있다.

 

율장에 지방어와 보편어에 대한 논쟁이 있다. 율장 소품 제5장에 있는 사소한 일의 다발에 실려 있다. 여러 지방에서 온 수행승들이 각자 자신의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가르침을 해석해서 말했을 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어느 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그들은 깨달은 님들의 말씀을 자신의 언어로 오염시킵니다.”(Vin.II.139)라고 말했다.

 

지방어로 가르침을 해석하면 잘못 전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류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사용해도 잘못 전달 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는 상류층 언어로서 권위가 있고 또한 운율로 되어 있어서 암송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찌 그대들은 원컨데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운율적인 언어로 바꾸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Vin.II.139)

 

 

부처님은 권위가 부여된 상류층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가르침이 전승되기를 거부했다. 언어가 바뀌면 뜻도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언어학자 가이거는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스승 스스로가 선언한 것 이외에는 다른 형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한때 TV에서 개그맨 허참이 진행하는 프로에서 귀속말 전달하기 놀이가 있었다. 그런데 놀이를 보면 처음 전달한 말과 나중에 전달 받은 말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어로 뜻을 바꾸어 유통시켰을 때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역 경전이 있다. 한역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상류층이 사용하던 우아한 언어이다. 그런데 산스크리트어 경전은 민중어인 마가다어에서 바꾼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한역경전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무려 언어가 세 번 바뀌었다.

 

경전은 마가다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으로, 한역에서 우리말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행승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상가(sagha)’스님들로 바뀐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선언했다.

 

 

수행승들이여, 깨달은 님들의 말씀을 운율적 언어로 바꾸지 말라. 바꾸면 악작죄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깨달은 님들의 말씀을 그 자신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Vin.II.139)

 

 

불교인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운율적 언어로 바꾸지 말라고 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방어로도 바꾸지 말라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그 자신의 언어로 사용하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사용하던 언어인 마가다어를 말한다. 오늘날 빠얼리가 이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각주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이 직접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오늘날의 영어처럼 쓰이던 보편어인 빠알리어로 표현된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이다.”(KPTS, 2464번 각주)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능하면 원어로 접하는 것이 최상이다. 빠알리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뜻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번역이 힘들다면 원어를 사용해도 될 것이다. 지혜를 뜻하는 반야가 좋은 예이다. 오늘날 사띠도 좋은 예이다. 마음챙김, 알아차림, 새김 등 여러 가지 뜻의 번역어가 있지만 빠알리 원어 사띠를 그대로 쓰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부처님은 가능하면 부처님의 언어를 쓰라고 했다. 그럼에도 다른 언어로 바꾸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악작죄(惡作罪)가 된다고 했다. 다른 언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잘못(dukkaa)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불문이나 수호경처럼 암송을 요하는 경은 가능하면 빠알리 원문으로 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즘 빠알리 원문으로 경을 암송하고 있다. 천천히 뜻을 새기면서 암송한다. 이렇게 원문을 암송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부처님의 언어로 암송하기 때문에 감응을 기대할 수 있다. 과거 수많은 수행승들이나 재가불자들이 빠알리원문으로 암송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천상에 태어났다면 익숙한 말을 접하고 감응하지 않을까?

 

유튜브에서 큰스님 법문을 듣고

 

요즘 유튜브에서 큰스님 법문을 듣고 있다. 큰 스님 법문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인가? 실례를 무릅쓰고 일부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주진심 평등원광 이런 것을 깨닫는게 그게 부처님의 깨달음에요. 삼세제불이나 역대조사나 미진수 선지식들이 다 평등원광 상주진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느끼는 삶과 죽음과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잠든 나에서 꿈꾸는 나가 생겼을 때 그 꿈에서 느끼는 것과 같다. 이것을 확실히 안거에요. 확실히.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J스님, 35분 근처)

 

 

J스님은 꿈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꿈의 비유를 들어서 깨달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어디에도 꿈을 깨달음에 비유한 것은 없다.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드물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아마 그것은 깨어 있음에 철저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S35.239, A4.37) 라는 정형구에서도 알 수 있다.

 

잠 자기 전에도 사띠하고 잠에서 깨어서도 사띠하면 꿈을 꿀 수 없다. 그럼에도 큰스님은 깨달음을 꿈에 비유하면서 현실은 꿈속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현실의 나는 가짜이고 진짜 나가 있다고 했다.

 

추론으로 두드리고 탐구로 뒤쫓아서

 

큰스님은 큰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체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지만 무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 말할 뿐 말하지 않는다. 마치 스승의 주먹 안에 무언가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추론자이자 탐구자이다. 그는 추론으로 두드리고 탐구로 뒤쫓아서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와 같이 시각이라고도 하고 청각이라고도 하고 후각이라고도 하고 미각이라고도 하고 촉각이라고도 하는 그 자아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아서 전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거나 정신이라거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항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D1.42)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읽고 있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처음부터 소설읽듯이, 각주까지 남김없이 읽다 보니 새로운 느낌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 이르러 큰스님이 말하는 것과 오버랩되었다. 그것은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큰스님은 진짜 나가 있다고 말한다. 그 진짜 나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이르러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는 62가지 사견 중의 하나인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가 떠오른 것은 어찌된 일인가? 큰스님이 말한 것과 경에 실려 있는 사견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큰 스님이 말하는 진짜 나는 부분적 영원주의에 해당되고, 스님이 말한 가짜 나는 부분적 비영원주의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진짜 나가 있다면 가짜 나는 있을 수밖에 없다. 큰 스님이 진짜 나를 말하면 말할수록 현재 나는 가짜 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짜 나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다. 생노병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큰스님은 꿈속 같은 현실에서 꿈을 깨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경에서 추론자이자 탐구자가 말한 것과 같다. 경에서는 추론으로 두드리고 탐구로 뒤쫓아서 스스로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을 보면 마음은 그때마다 앞서며, 뒤따르는 조건(paccya)을 부여하기 때문에 시각 등의 파괴보다 강하더라도 마음의 파괴를 볼 수 없다.”(Smv.114)라고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큰스님은 불교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공부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마음공부는 어떤 것일까? 본래 마음을 보자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내가 태어나기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을 말한다. 진짜 나를 보자는 말과 같다.

 

경을 보면 놀랍게도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예견한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영원한 자아에 대하여 마음이라거나 정신이라거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항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D1.42)라고 했다. 이는 부분적 영원주의라는 사견에 해당된다. 큰스님이 말씀하신 마음공부를 비판한 것 같다.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 큰스님의 말한 것을 비판했다. 이런 글을 쓰면 속된말로 본전도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부처님 말씀에서 용기를 받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서 부처님은 62가지 사견을 말씀하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D1.5)

 

 

부처님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진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큰스님이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을 말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침묵한다면 가르침이 훼손될 것이다. 그렇다고 언급한다면 비방한다고 말할 것이다. 큰스님이 시물을 받을 때 고맙습니다.”라든가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을 했을 때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큰스님이 상가에 대하여 스님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다.

 

큰스님은 마음공부라고 말한다. 큰스님 법문을 들어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꿈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현재 나는 가짜 나이고 진짜 나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할까? 침묵한다면 사견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022-10-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