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의 맛을 알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7. 00:37

법의 맛을 알면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가르침에 비추어 나의 경험을 대비시켜 보아 설명하고자 할 때 길어지는 것이다. 여기다 조금만 전문적인 술어가 들어가면 패스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경전은 쓰레기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사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경전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사람에게 있어서 경전은 그저 케케묵고 낡은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맛에 대한 갈애가 있다. 한번 맛본 것은 못잊는다. 한번 맛보면 다시 찾는다. 그래서 단골이 된다. 이 맛보다 저 맛이 더 뛰어나면 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필코 달려간다. 그런데 맛에는 음식 맛만 있을까?

법의 맛도 있다. 이를 법미, 가르침의 맛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경전을 통해서 법을 맛본다. 남들이 보기에 케케묵어 보이는 경전에도 맛이 있는 것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가르침의 맛, 법미는 일체 맛을 이긴다고 했다. 법의 맛이야말로 최상의 맛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갖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가르침의 즐거움만 못하다는 것이다.

항상 가르침과 함께 한다. 초기경전, 즉 빠알리 니까야와 함께 하는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는 사부니까야뿐만 아니라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 등과 같은 경전도 해당된다. 니까야를 읽으면 법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마음이 심란할 때 경전을 펼친다. 아무 경전이나 상관없다. 특히 법구경을 펼치면 게송 몇 개 읽지도 않아서 마음이 청정해진다. 이는 경전이 치유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약을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법구경 게송을 접하면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이것이 경전의 힘이다. 그리고 가르침의 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에 대하여 케케묵은 것, 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법의 맛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깔리면 술 생각이 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면 삼겹살에 소주가 간절할지 모른다. 술맛과 고기맛을 알기 때문이다.

술맛과 고기맛을 알면 다시 찾게 된다. 매일 마시고 매일 먹게 될 것이다. 실제로 주변에 이런 사람들 많다.

친구는 매일 소주 한병을 마신다. 저녁에 반주로 마시는 것이다.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다. 그래서 쌓이는 것은 소주병뿐이라고 한다.

친구는 왜 매일 마시는 것일까? 맛을 알기 때문이다. 맛에 중독되어 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사람에게 경전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크게 웃어버릴 것이다.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고 했다. 가르침은 담마를 말하는 것이고 담마는 법으로도 번역된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자는 법이 보호해준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매일 술 마시는 사람은 누가 보호해줄까? 아무도 보호해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는 행위는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고 더구나 술은 모든 악행의 근원이 된다. 결국 술로 인해 파멸될 것이다.

가르침을 따르면 가르침이 보호해 준다고 했다.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해주는 것과 같다. 매일 경전을 접했을 때 보호된다. 경전을 읽고, 경전을 외우고, 경전을 암송하고, 경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삶이 보호받는다.

경전을 접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 등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읽어서 마음이 청정해졌다면 어떤 감각적 쾌락의 욕망보다 더 강렬한 것이다.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고 했다. 법의 맛을 아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유한다. 니까야를 읽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가 뭐꼬?"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적대감을 보인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라든가 심지어 쓰레기로도 본다. 심지어 스님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법의 맛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니까야는 몰라도 금강경은 알 것이다. 금강경에서 법보시가 재보시보다 더 수승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니까야에서도 재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법구경에서는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Dhp.354)라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 더구나 싸리뿟따와 몇몇 수행승들은 부처님이나 연각불이나 거룩한 님의 도움없이 혼자서 일겁동안 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 숫자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통찰을 지녔어도 진리의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장로 앗싸지와 같은 거룩한 님[阿羅漢]이 선언한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수행자의 경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가 가장 고귀한 보시이고 가르침의 보시가 다른 모든 보시를 이긴다.”(법구경 1753번각주)


주석을 보면 법보시가 재보시보다 수승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주석을 읽는 맛이다. 재보시만 강조한다고 해서 재보시를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법보시를 해서 법의 맛을 알게 했을 때 재보시는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것이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절에서는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법문을 해도 기승전보시가 된다. 그러나 법보시를 해서 법의 맛을 알게 해주면 보시는 하지말라고 해도 하게 되어 있다. 법보시가 먼저 있어서 재보시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맛이 있다. 대부분 감각적 욕망의 맛이기 쉽다. 삼겹살에 소주가 간절한 사람에게 경전은 먼나라 이야기이고, 케케묵은 것이고, 낡은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법의 맛을 아는 자는 법을 찾게 되어 있다. 경전을 펼쳐 드는 순간 청정한 마음이 되었을 때 일체의 맛을 이긴다.


2022-1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