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0. 09:44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
 
 
내 기억력에 문제 있는 것일까?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 버렸다. 어제까지 잘 되던 것이 오늘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안에서 열어 주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세 차례 겪었다. 정말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파트에는 두 개의 비밀번호가 있다. 동 입구 현관에 하나 있고, 집 입구 현관에 하나 있다. 동 입구에 있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손 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아무생각없이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집 현관 비밀번호는 손 때가 묻지 않았다. 기억해서 눌러야 한다. 외기도 어렵다. 번호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위치는 기억난다. 위치만 기억해서 누르다가 사고가 난 것 같다.
 
비밀번호 사건을 겪자 덜컥 겁이 났다. 나도 초기 증상이 아닌지 염려스러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엉뚱한 것을 들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을 때 그런 것 같다. 핸드폰을 들고 있으면서도 핸드폰을 찾는 것도 해당된다. 나만 그런 것일까?
 
한동안 경을 암송을 하지 못했다. 한두 번 하지 않게 되자 관성이 되어서 계속 하지 않게 되었다. 거의 이주 되는 것 같다. 출입문 비밀번호 사건을 겪게 되자 나의 기억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어제 새벽에 빠나다경(Sn.3.2)을 외워 보기로 한 것이다.
 
법구경에 “경구는 외우지 않음이 티끌이다.”(Dhp.241)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경전 구절이나 기술은 그것을 반복하거나 거기에 종사하지 않으면 잃어 버리거나 기억을 상실한다.”(DhpA.III.347)라고 했다. 틀림 없는 사실이다. 무려 25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빠다나경을 2주 동안 암송하지 않았더니 기억이 상실된 것이다.
 
예전에 수많은 경을 외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전법륜경이다. 거의 천수경에 버금가는 글자수이다. 한번 암송하는데 십여분 걸렸다. 외는 데만 한달 보름 걸렸다. 그것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초전법륜경을 암송하면 충만된다. 어느 정도일까? 마치 내가 정각을 이룬 것 같다. 정각을 이룰 당시 부처님이 된 것 같다. 그것은 내용이 감동적이고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순간이 있다. 경에서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S56.11)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구를 아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이런 문구를 접했을 때 나도 아라한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문구는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뜻이다.
 
초전법륜경을 외운 감흥을 잊을 수 없다. 사성제를 세 번 열두 가지 형태로 굴려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음을 선언했을 때 감동하지 않을 자 어디 있을까? 초전법륜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의 도가니라 아니 할 수 없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사성제 설법을 이해 했을 때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S56.11)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마치 생멸의 지혜를 얻은 것 같다. 그렇다고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네 번째 지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구경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는 문구와 동일한 생멸의 지혜일 것이다.
 
꼰당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 했다. 그리고 실천했을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바로 이해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행자의 수행이 무르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툭 터져 버릴 것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준비된 수행자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생멸의 지혜를 얻는 것으로 나온다. 사리뿟따도 그랬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경행에 감동했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와 대화 하지 않을 수없었을 것이다. 사리뿟따가 궁금한 것을 묻자 앗사지가 연기법송을 말했다. 그때 사리뿟따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Vin.I.40)라고 바로 이해했다.
 
꼰당냐와 사리뿟따는 어떻게 법을 바로 이해했을까? 준비된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수행을 해야 한다. 어떤 수행을 해야 생멸의 지혜에 이를 수 있을까? 주석에서는 25가지 방식으로 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생멸의 지혜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가 무명, 갈애, 행위, 자양분, 접촉의 다섯 가지를 통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DhpA.II.270)라고 했다. 다섯에 다섯을 곱하니 스물 다섯이 되는 것이다.
 
당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수다원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또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수다원 오도송이라고 한다. 이런 깨달음을 달리 말하면 견도(見道)가 된다.
 
견도는 진리를 본 것이다. 진리를 보았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을 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견도 다음에는 수행도가 된다.  수행도는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룰 때 아라한 선언을 했다. 이는 완전히 청정했을 때 선언하는 것이다. 어떤 청정을 말하는가? 이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리고 열두 가지 형태로 점검한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철저하게 점검했다. 만약 하나라도 미흡한 것이 있었다면 사성제를 진리로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청정과 관련이 있다. 청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선언했다. 누구에게 선언했는가?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랑 삼마삼보딩(anuttara sammāsambodhi)”이라고 했다. 이를 한국빠알라성전협회에서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했다. 공통적으로 ‘위없다’라는 말이 들어 간다. 이는 아눗따라(anuttara)를 번역한 말이다.
 
위 없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덜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부처님과 버금 간다는 논사를 부처님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심지어 그들이 말한 것이나 글을 부처님 가르침보다 더 중요시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전통의 불교에서는 법회의식할 때 공과 관련된 주문을 외우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 M스님이 용기를 내었다. 스님은 초전법륜경을 법회의식할 때 독송하자고 주장했다. 초전법륜경이야말로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성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처음이자 끝과 같다. 사성제 없는 부처님 가르침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동아시아 전통의 불교에서는 공의 논리로 사성제를 모두 부수어 버린다. 더 이상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공의 논리만 이해 하면 다 깨닫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깨달음의 시작일 뿐이다. 공의 논리는 견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의 완성은 아라한이 되어야 끝난다. 그 중간에 수행도를 필요로 한다.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을 타파 했다고 해서 다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무식을 드러낸 것이고 밖에 보지 않을 수 없다.
 
공의 논리는 명쾌하다. 공의 논리는 모든 언어적 형성을 부수어 버린다. 이는 빤냣띠라는 개념을 타파하는 것과 같다. 빤냣띠를 부수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일까? 거기서 그친다면 더 이상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거기서 더 들어 간다. 그것은 빠라맛타를 보는 것이다.
 
빤냣띠와 빠라맛타, 수행자라면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빤냣띠라는 개념을 부수려면 빠라맛타라는 실재로 관찰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이름과 명칭이라는 빤냣티를 부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위빠사나는 공의 논리와 유사하다.
 
공의 논리로 개념을 부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논리는 거기까지가 한계이다. 개념을 부수는 것은 이제 수행초입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에 지나지 않는다. 칠청정 단계에서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인 ‘견해청정(diṭṭhi visuddhi)’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공의 논리로 된 주문을 법회 할 때마다 조석으로 독송하고 있다.
 
M스님은 법회 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고 제안했다. 왜 이런 제안을 했는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가 잘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괴로움의 원인, 소멸, 소멸방법에 대해서 설해져 있다. 이런 가르침을 들었을 때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꼰당냐에게 생멸의 지혜가 생겨났을 때 극적인 장면이 있다. 이는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S56.11)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런 외침은 마치 릴레이 하듯이 전 우주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하느님(Brahma)도 듣게 되었다. 이 순간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0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외운 것은 2013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십년전이다. 어렵게 외운 것을 잊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매일 암송했다. 그런데 암송할 때마다 감흥이 있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각을 이룬 순간, 꼰당냐에게 법안이 열리는 순간, 그리고 우주가 진동하고 빛이 가득한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구를 접했을 때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충만되었다.
 
초전법륜경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암송하라고 말하면 암공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반납한 것은 아니다. 아마 기억 저편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초전법륜경을 지금 당장 암송할 수 없다. 그러나 며칠만 시간이 주어지면 옛날처럼 경을 보지 않고서도 외울 수 있다. 왜 그런가? 옛날에 해 보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단지 불러 오기만 하면 된다. 다만 몇 번의 연습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늘 새벽에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잠에서 깨어 정신이 맑을 때 어제 독송했던 것에 대한 기억을 떠 올렸다. 나지막이 소리 내어서 암송했다. 신기하게도 문구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빠나다경 25개 게송을 거의 빠짐없이 암송했다. 나의 기억력이 아직까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확인한 것이다.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을 때 난감하다. 위치만 기억하고 누르다 보니 이런 사고가 난 것이다. 전화번호도 기억나지 않을 때는 다반사이다. 스마트폰 주소록에 이름과 함께 등재해 놓았기 때문에 이름만을 기억할 뿐이지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족의 전화번호도 기억할 수 없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기억력은 문제 없는 것일까?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기억력을 의심했다. 그리고 패닉에 빠졌다. 기억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두 주간 중단했던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다행히 기억력은 문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노화됨에 따라 기억력은 약해 질 것이다. 나중에는 망각의 세월을 살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기억력이 살아 있을 때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기억력 증진에 경을 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 자야망갈라가타, 담마짝깍빠왓따나경, 십이연기분석경, 팔정도분석경, 빠다나경 등 수많은 경을 빠알리어로 외웠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담마짝깍빠왓따나경, 즉 초전법륜경이다. 한국불교에서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기 바란다. 독송하면 충만 될 것이다. 내가 해 보아서 안다. 자신한다.
 
 
2023-03-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