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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권 담마의 거울 2017 I, 단멸론자들을 참교육 시키기에 적합한 경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4. 10:53

87권 담마의 거울 2017 I, 단멸론자들을 참교육 시키기에 적합한 경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매일매일 아침을 맞고 있지만 오전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올해가 시작 되었는가 싶었는데 벌써 3월이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어느덧 연말이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의 흔적을 글로 남기는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 글을 남겨 놓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 이제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기별로 주제별로 pdf파일을 만들어서 인터넷의 바다에 띄어 놓는 것이다.
 
이번에 만든 책의 제목은 ‘87권 담마의 거울 2017년 I’이다. 통산 87번째 책으로 2017년 1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약 3개월가량 담마에 대하여 쓴 것이다. 목차는 30개에 달하고 271페이지 분량의 책이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2.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3. 그릇을 깨자
4.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
5. 부처인 내말도 그대로 믿지 말랐다고?
6. 쌓아 두면 썩는다
7. 듣기 거북한 비호감 법문
8.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과 깨달음 사칭
9.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일곱 가지 재물
10.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11. 우빠까(Upaka)는 인연 없는 중생이었을까?
12. 외도사상이 총집합된 꿈의 비유
13.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지만
14. 소라고동의 비유와 자심해탈(慈心解脫)
15. 오역죄가 아니라 육역죄인 이유
16.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즉문즉설 스님의 윤회관
17. 삿된 견해를 지닌 채 임종을 맞았을 때
18. 테리가타 출간에 즈음하여
19.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20. 아름다운 것은 성스럽다
21.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
22. 어떻게 일심동체가 되는가? 육화(六和)와 이상적 공동체
23.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24.  담마딘나장로니 인연담
25. 천진불(天眞佛)사상과 동자승
26. K교수의 윤회무용론
27. 고귀한 포살에 대하여
28. 왜 태아는 폭발적으로 성장할까?
29. 중도체계론으로 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30. 봄은 오고야 말았는데

87권 담마의 거울 2017 I_230307.pdf
2.41MB

 

 
어떤 이는 보아야 할 책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고 한다. 선물 받은 것도 있는데 그렇다고 다 읽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에 따르면 서문과 목차만 읽어 보아도 된다고 말했다.
 
책의 서문에 책의 대강이 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목차까지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어 보면 최상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을 때는 목차에서 읽고 싶은 것만 골라 읽어도 된다.
 
2017년 담마에 대한 글을 작성한 것을 보면 뚜렷한 주제가 없다. 단지 그날그날 쓴 것을 시기별로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개별 글은 그 글 자체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제가 산만하다. 어찌보면 중구난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출간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목차에서 16번 글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즉문즉설 스님의 윤회관’(2017-02-16)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의 법문을 비판한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지금도 스님의 윤회관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쓰기 사작하면서 단멸론자들과 싸웠다. 놀랍게도 불교에는 단멸론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멸론자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단지 자신의 깜냥으로 판단하다 보니 단멸론자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을 말했다. 이런 열반에 대하여 불이 꺼진 것으로 묘사했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죽으면 끝이라고 여길 것이다.
 
죽음이 곧 열반이라면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래 살아서 고통받느니 지금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니까야를 접하지 않으면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부처님이 지멸, 적멸, 열반을 말씀하신 것은 단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베란자의 경’에서 바라문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며  비난했을 때 알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부처님은 가르침에 답이 있다. 이는 초기경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질문에“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단멸, 즉 열반에 대하여 설한 것은 탐, 진, 치의 단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되치기로 한판 제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에 ‘빠야씨의 경’(D23)이 있다. 이 경은 단멸론자들을 교육시키기에 최상의 경이라고 볼 수 있다. 빠야씨 왕자가 의문하는 것이 단멸론자들이 의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단멸론자가 되는 것은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죽어서 지옥이나 천상을 본 것에 대하여 말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달의 신과 태양의 신의 비유, 흉악한 도둑의 비유, 똥구덩이의 비유, 서른 셋 하늘나라 신들의 비유, 눈먼 봉사의 비유 등 갖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니까야를 읽어보면 수많은 비유를 접할 수 있다. 이렇게 비유로 말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상에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도 말한 의미를 이해합니다.”(D23.10)라고 했다.
 
궁금한 모든 것은 니까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멸론자들과 논쟁을 했을 때 인터넷에 흘러 다니는 단편적인 지식을 활용했으나 이번에 디가니까야를 보니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단멸론자에게 대처 하는 기법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D23)은 단멸론자들을 참교육시키기에 적합한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문즉설 스님의 윤회관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올해 국회에서 법문한 것도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윤회는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동설과 지동설을 들어서 윤회를 설명했다. 윤회를 믿는 자는 천동설을 믿는 자와 같다고 했다.
 
즉문즉설 스님은 윤회를 믿음이라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17번 글에서도 확인된다.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똑 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고 그러면 증명을 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하겠어요? 이런 걸 뭐라 그런다? 믿음에 속한다. 알았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요 이거는.”(2017-02-16)라고 말했다.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라고 물었다. 이런 태도는 전형적인 과학적인 접근방식이다. 내생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러다 보니 천상, 내생, 윤회는 믿음의 영역이 되어 버린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문즉설 스님은 윤회를 믿는 자에 대하여 천동설을 믿는 자와 같다고 했다. 윤회가 비과학적임을 말한다. 천동설이 비과학적이라면 지동설은 과학적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윤회를 믿음의 영역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런 스님에게 과감하게 한마디 할 수 있다. “스님은 니까야를 보지 않았다.”라고.
 
즉문즉설 스님은 니까야를 보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스님이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을 보았다면 함부로 윤회가 믿음의 영역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스님의 윤회관은 언제나 변화가 있을까?
 
서문에서 목차에 있는 글을 다 소개할 수 없다. 그 중에 일부만 소개하는 것은 책에 흥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책을 접했을 때 다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문과 목차만은 읽어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책이 추가 되었다. 이런 책을 누가 읽을까? 언젠가 누군가 단 사람이라도 pdf를 다운 받아가서 읽어 본다면 그로써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3-03-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