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왜 인내하는 자가 승리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26. 09:18

왜 인내하는 자가 승리할까?

 

 

여행을 다녀 오면 여행기를 작성한다. 작년 12월 스리랑카 순례를 다녀 왔다. 다녀온지 네 달이 지났지만 나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순례기를 다 써야 여행이 끝난다. 현재 26편 작성했다. 앞으로 두 달 더 써야 할 것 같다.

 

영화를 보면 후기를 작성한다. 강연을 들으면 역시 후기를 작성한다. 책을 읽어도 후기를 작성한다. 니까야모임도 역시 후기를 작성한다. 이렇게 십여년 작성하다 보니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나중에 모아서 엮으면 책이 될 것이다.

 

요즘 책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달에 네 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89권까지 만들었다. 2006년부터 매일 쓰다시피 한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책을 만드는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과 관련해서 네 권의 책을 만들었다. 20172월부터 모임이 시작된 이래 20233월 현재까지 매달 두 번 모임이 열렸는데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모임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후기 형식으로 남겼는데 나중에 모으니 책이 되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3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에서

 

3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이 324일 한국빠알리성접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이번 모임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이병욱, 장계영, 홍광수느 유경민, 방기연, 안진현, 김경예, 정진영 선생이 모였다.

 

모임에 참석하려면 대단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첫째는 거리가 멀다. 고양시에 있기 때문에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둘째는 힘이 든다. 장거리를 이동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많은 것이다. 셋째는 비용이 든다. 아무래도 이동하면 교통비와 식비가 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먼 거리를 달려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 있다. 친구는 만나면 반갑다. 도반은 친구와 같다. 이주만에 만났을 때 반갑다. 일주일만에 만나면 너무 짧아서 자주 만나는 것 같다. 한달에 한번 만나면 너무 먼 듯한 느낌이다. 한달에 두 번, 이주일에 한번 만나는 모임이 최상인 것 같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나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가장 큰 목적은 담마를 접하는 것이다. 경전을 함께 읽고, 담마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함으로 인하여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분위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수행자가 미얀마의 유명한 사야도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사야도에게 질문할 것을 잔뜩 준비해 가지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사야도를 친견했을 때 한마디도 물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행자는 왜 한마디 질문도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야도의 청정함에 압도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비로움에 감화되었을지 모른다. 굳이 질문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모습과 분위기로 보여 준 것이다. 아마 부처님 앞에선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삶의 과정에서 궁금한 것은 모두 니까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부니까야를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보면 의문이 해소된다. 그럼에도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해가면서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는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분위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요모임에 대한 책을 만들었을 때 책 제목을 원음향기 가득한 서고의 저녁이라고 했다.

 

무례한 말로 모욕을 당했을 때

 

3월 두 번째 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는 무례한 말로 모욕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심우도의 원형-마음의 밭을 어떻게 갈아야 할까’, ‘스승만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존경하지 말아야 할까라는 제목의 경이다.

 

무례한 말로 모욕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반격을 할 것이다.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이다. 말싸움 하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댓글 공방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말로 거칠게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인내가 무엇인가 안다면

승리는 바로 그의 것이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것은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S7.3)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아쑤린다까의 경’(S7.3)에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한 것 같다. 니까야 이곳 저곳 도처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 실려 있으면 중요한 가르침이다. 반복적인 가르침 역시 중요한 가르침이다.

 

아쑤린다까는 바라문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아수라의 제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바라다와자 가문에서 어른 바라문이었던 같다. 바라문 청년들이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자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무례하고 추악한 말을 던졌다.

 

부부싸움 네 단계를 보면

 

상대방이 도발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욕설과 함께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침묵했다. 왜 가만 있었을까? 이는 부처님이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S7.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견해 차이가 발생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시작하지만 공방이 오갈수록 거칠어진다. 나중에는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개싸움이 된다. 부부싸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부싸움과 관련하여 BTN에서 강연을 들었다. 김송호 선생의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을 듣고 녹취한 후에 글로 남겼다. 그런데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부부싸움에 대하여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감정이 상하면 감정의 골이 깊어져 진짜 칼로 베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부부싸움에는 네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비난단계, 경멸단계, 방어단계, 담쌓기 단계를 말한다.

 

부부싸움은 처음에는 비난단계로부터 시작된다. 남자의 경우 “당신 왜 맨날 하는 게 그 모양이야?”라고 말하거나, “하루종일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와 같은 비난의 말을 퍼붓는 것이다. 이럴 때 여자는 “아니 말하는 것이 당신 엄마를 꼭같이 닮았어?” 라든가 “왜 하는 것이 없어? 당신이 그러니까 애들도 나를 깔보지” 라며 맞받아 친다. 이쯤 되면 막가는 것이다.

 

부부싸움 두 번째 단계는 경멸단계이다. 남자는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 라고 말한다. 또한 여자의 약한 부분예를 들면 정치나 사회현안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대응을 잘 못하면 “야그것도 모르냐?”라고 면박을 준다좀더 심하게 머리는 뒀다가 국 꿇여 먹어?” “그런건 네가 잘 보는 TV에는 안나오디? 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이렇게 경멸하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열받기 시작한다여자는“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있어? “아니, 꼴에 남자라고”라며 남자를 깔아 뭉게는 발언을 한다. 이 단계가 경멸의 단계이다.

 

부부싸움 세 번째 단계는 방어단계이다. 여자가 “당신은 맨날 그 모양이야?” “왜 맨날 술만 먹어?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라고 공격하면, 남자들은 “내가 맨날 그랬다고 그래” “일주일에 다섯 번 밖에 안했어” 라고 말하면서 방어모드로 들어간다. 그래도 계속 비난을 하면 “당신은 그러는게 문제야” “당신은 안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방어단계이다이제 막판으로 가는 것이다여자의 경우 “당신이나 잘하셔” “그래나 이러는 거 이제 알았어? “나, 원래 그런사람이야!” 라고 말하면서 대든다. 위험수위에 온 것이다.

 

부부싸움 네 번째 단계는 담쌓기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일절만 해라, 일절만 응?” 라든가 “알았어, 됐어, 이제 그만해!”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알았거든! “됐거든! 와 같은 말이다그리고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이것이 담쌓기이다가장 위험수위가 높은 단계이다담쌓기 단계에 들어서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그 다음 부터는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문제가 심각해지는 단계이다.

 

부부싸움 네 단계는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네 단계를 보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단계는 부부싸움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친구와도 있을 수 있고 고객과도 있을 수 있다. 감정이 격화되기 전에 멈추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부부싸움을 하면 서로 아수라가 된다. 말싸움이 감정싸움이 되어서 서로 비난을 일삼았을 때 거울로 얼굴을 본다면 아수라의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부처님에게 온갖 욕설과 모욕적인 말폭탄을 퍼부은 아쑤린다까 바라문도 아수라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분노의 밥상을 받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인내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인내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바라밀로 설명했다. 인내바라밀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자기를 초월해서 궁극에 도달합니다.”라고 말했다.

 

자타카는 십바라밀에 대한 것이다. 열 가지 바라밀중에 인내바라밀(khanti-pāramī)이 있다. 그런데 어떤 바라밀이든지 목숨 걸고 시행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인내바라밀의 진수가 실려 있다.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을 때도 분노하지 않는다.

 

인내와 관련하여 최상의 인내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만약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도적들이 잔인하게 그대들의 사지를 조각조각 절단하더라도, 그 때 만약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M21)라고 했다.

 

바라문 아쑤린다까는 부처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그의 것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쑤린다까는 의기양양했다. 부처님이 침묵하자 자신이 이긴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내했다. 인내하는 것이 곧 승리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인내하는 자가 승리할까?

 

아수라는 전투적이다. 그리고 인내할 줄 모른다. 이에 반하여 제석천은 온화하다. 그리고 인내할 줄 안다.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상윳따(S11)’를 보면 신들의 전쟁이 있다.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을 말한다. 그런데 항상 아수라가 먼저 싸움을 걸어 온다는 것이다.

 

아수라의 왕이 도발 했을 때 제석천은 어떻게 했을까? 제석천은 부처님처럼 인내했다. 이럴 때 아수라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바라문 아쑤린다까가 부처님에게 했던 것과 똑 같다. 그렇다면 제석천은 도발하는 아수라의 왕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참는다고

제 맘대로 생각하든 말든

참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S11.4)

 

 

제석천은 아수라보다 힘이 더 센 천신이다. 힘이 약한 아수라가 도발해 왔을 때 침묵했다. 힘이 없어서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자이기 때문에 가만 있는 것이다.

 

완력이 센 자가 완력이 약한 자에게 힘을 과시하면 깡패가 될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것과 같다. 그런 세상은 아수라판이 될 것이다.

 

진리를 수호하는 자, 힘 있는 자 제석천은 폭력전인 아수라의 도발에 침묵했다. 본래 힘 있는 자가 인내하는 것이다. 힘 있는 자가 힘을 과시하려 한다면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될 것이다.

 

부처님은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다. 분노하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분노하고 욕설을 퍼붓는 자에게 가만 있으면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제석천이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S11.3)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힘 없는 자는 인내하지 못한다. 인내는 지혜로운 자가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인내하지 못한다. 욕설을 듣고 모욕을 당했을 때 침묵하는 것은 힘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자리이타행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 어리석은 자들이 부부싸움을 한다. 물론 견해차이로 다툴 수 있다. 그러나 비난-경멸-방어-담쌓기 단계로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비난단계에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내 해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아야 한다.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리이타행으로 설명했다. 인내하면 자타가 좋은 것이다.

 

분노하는 자에게 화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백만대군에게 승리하는 것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더 어려움을 말한다.

 

 

2023-03-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