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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원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담마와나 선원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9. 18:07

수다원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담마와나 선원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서
 
 
불청객이 있다. 청하지도 않은 손님을 말한다. 불청객이 주인 행세하면 어떨까?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인터넷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데스크탑 컴퓨터를 켰을 때 사이트가 바뀌어 있었다. 인터넷이 부팅되면 가장 먼저 메일 사이트가 뜨게 만들어 놓았다. 일하는 메일을 말한다. 하루일과는 메일을 열어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떤 주문이 들어 왔는지, 어떤 문제가 발생 했는지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줌(Zum)이 뜬다.
 

 
포털 줌은 불청객 같은 것이다. 원치 않은 것이 초기화면에 자리잡고 있다. 아마 어제 알집과 관련된 알씨, 알캡쳐 등 서브사이트를 누르는 과정에서 올라 갔을 것이다.
 
줌이 시작페이지로 되어 있다. 원치 않던 것이다. 첵크를 해제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워메프, 쿠팡, 하프클럽이 바탕화면에 깔리게 되었다. 불청객들이 집을 점거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불청객 사이트를 제거해야 한다. 본래의 메일 사이트로 시작화면을 만들어야 한다. 예전에는 쉽게 바꾸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변화가 있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 없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조치하려 했으나 되지 않는다. 이 문제로 인하여 한시간을 허비 했다. 빨리 시작화면을 바꾸고 나서 해야 할 일을 하려 했으나 차질이 생겼다. 마음은 분노로 흥분되었다. 불청객에게 집이 점거 당한 것 같은 불쾌가 지배했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이 있는 날
 
불청객 사이트로 인하여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청파동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빤냐와로 스님 법문이 있는 날이다.
 
법문은 몇 주전부터 예고 되어 있었다. 빤냐와로 스님이 태국에서 안거를 마치고 귀국함에 따라 법회가 열린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 선원에서 2023년 4월 9일(일) 오전 10시부터 열렸다.
 
하루일과 시작이 엉망이 되었다. 청파동에서 주차하는데 자리가 없다. 청파동 주민센터 지하 공영주차장에 들어 갔으나 자리가 없다. 지상에도 자리가 없다. 주차하려 보니 송곳 하나 박을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주차 딱지를 뗄 각오하고 빈 곳이 있어서 주차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선원이 커서 “주차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말한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선원은 몹시 비좁다. 당연히 주차 공간이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알아서 주차해야 한다.
 
주차 문제로 한바퀴 돌다 보니 법회에 늦게 참석했다. 법당에 들어가보니 이미 법회는 시작되고 있었다. 빤냐와로 스님은 수다원에 대해서 법문했다.
 

 
어떻게 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을까?”라는 말과 같다. 일단 수다원이 되면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열반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열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열반을 말씀 하셨다. 그리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불교라는 종교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열반을 듦으로 인하여 불교라는 종교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열반은 성자가 되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다.
 
성자의 흐름, 즉 열반에 들려면 열반체험을 해야 한다.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려면 먼저 열반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향사과와 열반에 대하여 구출세간법이라고 한다.
 
라따나경을 보면 수다원의 조건이 있다. 이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는 상태는 즉시 소멸된다.”(Stn.231)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수다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다. 범부는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볼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은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만, 반대로 범부는 깨달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의 정신세계와 범부의 정신세계는 다르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범부는 수다원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사다함은 수다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아나함은 아라한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라한은 아나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점검이 가능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종종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제가 수다원에 들었는지 알고 싶습니다.”라며 물어 본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수다원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런가? 유신견이 타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견(有身見)은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며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내가 수다원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나의 것, 내 것, 나의 자아라고 여기고 있는 한 그는 수다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닌지는 유신견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했다.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하는 순간
 
나에게 유신견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수행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을 해서 실체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수다원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법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수행을 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틀림 없는 사실임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수행을 해야 할까?
 
빤냐와로 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려면 열반 체험을 해야 한다. 스님이 수행체험을 해야 한다는 말에는 열반 체험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열반에 들어서 반조가 일어나야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하는 순간이 기술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1)길을 성찰하고, 2)경지를 성찰하고, 3)이미 끊어진 오염원을 성찰하고, 4)남아 있는 오염원을 성찰하고, 5)열반을 성취한다.”(Vism.22.19)라고 했다. 수다원이 되려면 반드시 열반을 성취해야 함을 말한다.
 
수다원이 되려면 수행을 해서 다섯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다섯 단계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다시 말해서, 그는 “실로 나는 이 길로 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2) 그 다음에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3)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원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철하고,
4)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
5) 마지막으로 “나는 이 진리를 대상으로 꿰뚫었다.”라고 불사의 열반을 성취한다.”(Vism.22.20)
 
 
이와 같은 다섯 단계의 성찰은 청정도론에서 클라이막스로 보여진다. 이 경지를 성취하기 위해서 달려 온 것이다. 과거 전생에서부터 수없이 수행했을 것이다. 마침내 열반을 성취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수행의 길로
 
청정도론에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즉 수다원이 되었을 때 하나의 게송을 소개 하고 있다. 수다원 과에 들었을 때에 대하여 “그 흐름에 든 님이라 불리는 두 번째 성자가 된다. 그는 아무리 방일하더라도 일곱 번 천상세계와 인간계를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수 있다.”(Vism.22.18)라고 쓰여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라따나경 ‘Stn.230’과 병행한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이다.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범부에서 성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까지 보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자가 되었을 때 성자처럼 행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수다원이 아닌지 의문할 수 없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는 열반에 들었을 때 다섯 단계로 반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면 “나에게 이러한 오염원이 끊어졌다.” 라며 제거된 오염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며 남아 있는 오염을 알 수 있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오염은 무엇일까? 이는“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Vism.22.20)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세 가지 길은 일래향, 불환향, 아라한향을 말한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면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의 길로 가게 된다.
 
수다원이 해야 할 일은?
 
수다원을 견도단계라고 말한다. 진리를 맛본 단계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라따나경에서는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diṭṭhapadassa vutta)”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길은 열반을 말한다. 수다원은 열반 체험을 한 자이기 때문에 그 열반의 길로 가는 것이다.
 
열반을 체험한 수다원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오로지 열반의 길로만 가면 될 것이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나는 내 할일 만 할뿐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수다원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일만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범부와 수다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밖으로 표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오로지 제 할일 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닌지 알아 보고 싶을 것이다. 이런 행위 자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를 한다면 수다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가 수다원인데”라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수다원이 아닐 확률이 높다. 왜 그런가? 유신견이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조금만 있어도 수다원이 아닌 것이다.
 
내가 수다원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
 
빤냐와로 스님은 들을만 하다. 그래서 스님이 서울에 와서 법문할 때 빠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수다원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수다원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또 한가지 방법이 있다. 스님은 오늘과 같은 사월의 맑은 공기를 접했을 때 “아 좋다.”라고 말한다면 수다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말했다. 수다원인 자는 어떻게 느끼는 것일까? 스님에 따르면 닿는 느낌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수행자는 늘 알아차려야 한다. 특히 느낌을 알아차려야 한다. 차가운 공기가 닿았을 때 “아, 추워”라고 말하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수행자라면 얼굴에 닿는 차가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예비수행을 강조한 빤냐와로 스님
 
빤냐와로 스님은 수행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혼자 수행할 때는 망상이 일어나는지 체크해야 하고, 망상이 일어난다면 자애수행 등 사마타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수행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수행한다고 하여 무턱대고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일까?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막바로 좌선에 들어간다면 준비운동 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좌선에 임하기 전에 자애관, 불수념 등 염불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냥 앉아 있지 말라는 것이다.
 
스님은 예비수행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했다. 이 말에 매우 공감했다.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좌선에 임하면 번뇌망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런 때는 암송을 한다. 빠알리 경 외운 것을 암송하는 것이다.
 
경을 암송하고 나면 집중이 된다. 왜 그럴까? 경을 암송하는 행위는 사마타 수행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사마타 수행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경을 암송하는 행위 자체가 집중이다. 이렇게 집중된 힘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가면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해본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약 40분 가량 법문했다.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애의 마음이다. 말하거나 행동할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라고 했다. 자애를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자애를 지니지 않고 말하고 행위 하려 한다면 꼼짝말고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말라고 했다.
 
빤냐와로 스님이 당부한 것이 있다. 수행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하라는 것이다. 수행은 시간 될 때 마다 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 늘 사띠하며 생활하길 바랍니다.”라며 말을 마쳤다.
 
점심공양은 김밥으로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점심공양시간이 되었다. 이날 법회에서는 테라와다 상가에서 네 분의 스님이 왔다.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빤냐완따 스님, 떼자사미 스님, 빤냐왐사 스님을 말한다. 중앙승가대 박사과정 비구니 스님 세 명도 왔다. 재가자는 약 23명 가량 참석했다.
 

 
재가들 점심공양은 김밥으로 했다. 사람들이 20명 이상 되어서 법당에서 식사를 했다. 작은 탁자가 동원 되었다. 공부할 때는 책상이 되고 밥 먹을 때는 밥상이 된다. 밥상을 이열로 붙여서 함께 식사하니 식구가 밥 먹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
 
세 명의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었다. 공통적으로 수행을 강조했다.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것은 수행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라고 말했고, “아무리 늦어도 지금이 가장 이른 시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선원의 액자에 있는 문구 “그대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말과 오버랩된다.
 

 
법회가 끝났다. 차를 이용한 귀가길에서 오늘 들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후기를 남기기 위해서이다.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으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후기를 쓰는 과정에서 마음이 누그러졌다. 인터넷 불청객으로 인하여 아침부터 불쾌했으나 시간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다.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로 분노한 것으로 보아 수행이 덜 된 것 같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2023-04-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