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나에게
하필이면 나에게
새벽이다. 동트기 전이다. 여명이 시작 될 때 깨어 있는 마음은 착 가라 앉아 있다. 어제 격정은 온데간데 없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수 많은 업을 지었다. 행위 하는 것 자체가 업이 되었다. 업은 반드시 과보를 가져 오게 되어 있다. 업이 익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간다.
항상 새벽같은 마음이었으면 한다. 새벽이 되면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의 마음이 된다. 억울 했던 일도 마음 하나 돌이키면 이전 마음이 된다. 분노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체된다. 낙담 했던 마음도 이전 마음이 된다. 못 견딜 정도로 참을 수 없는 억울함도 사무량심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빚은 갚으면 된다. 돈은 벌면 된다. 시간 되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얘기가 다르다. 평생 벌어도 그만한 돈을 벌 수 없다. 늙어지면 더욱 힘들다. 아프기라도 하면 이번 생에서는 안된다. 빚만 잔뜩 지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 세끼는 먹어야 한다. 장례식장에서도 끼니는 거르지 않듯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변화는 감지된다. 작은 변화가 누적되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 일이 터질 때도 있다. 사고가 날 때도 있다. 파란을 넘어 곡절(曲折)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아이들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가족 생각이 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있으면 더욱더 간절하다.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야 주변도 돌아 볼 수 있다.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심지어 원한 맺힌 사람까지. 동트기전 새벽의 마음은 위대하다.
“하필이면 나에게.” 억울할 때 하는 말이다. 억울함은 분노에 해당된다. 분노를 분노로서 풀 수 없다. 자애의 마음도 연민의 마음도 소용 없을 때가 있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사람의 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더 좋은 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다 겪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9-04-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