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9. 20:21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목이 칼칼하다. 감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감기는 목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전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잡아야 한다. 약국에 가서 알약 한다스를 구입했다. 그러나 효과가 나지 않는다. 밤이 되자 더욱 더 심해졌다. 침을 넘기기 힘들정도가 되었다. 바이러스가 급속히 퍼진 모양이다.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는다. 건강진단도 받지 않는다. 그런지 십년이 넘은 것 같다. 이로 인하여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병원에 갈 때가 있다. 이빨에 문제 생겼을 때와 감기 걸렸을 때이다. 약국에서 주는 약보다는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이 더 잘 듣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 사무실 부근 병원에 갔다.

 

오뉴월에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변에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막상 감기 초기 증상이 오고 나니 자신만만 하던 것이 자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제 어느 때 급작스럽게 병이 올지 모른다. 건강을 자신하며 육체를 혹사하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가 뒤따른다. 보왕삼매론에 따르면,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라고 했다. 왜 그럴까?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고 했다.

 

건강한 사람은 자만하기 쉽다. 이 건강이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착각하여 막행막식하게 된다. 그결과는 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보왕삼매론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다. 부처님은 건강의 교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건강한 시절에 건강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하면, 건강한 시절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이유로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 해야 한다.(A5.57)

 

 

건강하면 건강에 대한 자만으로 악행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계를 어기는 것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몸을 마구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힘의 남용이다. 그 결과는 반드시 질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할 때일수록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관해야 함을 말한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삼대 교만이 있다. 그것은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이다. 대체로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교만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나이 들어 병에 걸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는 교만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젊음의 교만은 늙음으로 무너지고, 건강의 교만은 질병으로 무너지고, 삶의 교만은 죽음으로 무너진다. 야샤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야사는 요즘 말로 하면 재벌2세 또는 3세 정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파티를 했는데 !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외쳤다. 즐거워야 할 파티임에도 왜 괴롭다고 했을까?

 

야사이야기를 보면 요즘 회자 되고 있는 버닝썬사건을 접하는 듯하다. 마약을 먹고 환각파티를 벌이는 모습이 연상된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는 재벌2세와 3세들을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자가 괴롭다고 외쳤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졌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는 늘 따라 붙는 위험이 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위험이다. 일반사람과 달리 돈 쓰는 데 있어서 한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씀씀이 매우 크다. 왠만한 쾌락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남들이 함부로 즐기지 못하는 것에 손을 대게 된다. 마약이 대표적이다.

 

일반사람들은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 월급생활자라면 주어진 금액 내에서 살아 가야 한다. 어쩌다 삼겹살 먹는 날은 행복한 날이 된다. 소고기라도 먹는 날이면 매우 특별한 날이 된다. 그러나 예산에 있어서 한정이 없는 재벌2세와 3세들은 매일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소고기를 매일 먹는다면 식상하게 된다. 아무리 맛있는 반찬도 매끼니 마다 올라 오면 손을 대지 않게 된다. 그 대신 물리지 않은 것을 찾게 된다. 그것은 마약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매일 술을 마신다. 그러나 술을 무한정 마실 수 없다. 돈 없는 자들이 소주를 마시지만 아무리 위가 좋아도 하루 종일 마실 수 없다. 부자들은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실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마실 수 없다. 체력이 버텨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약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짜장면을 열그릇, 백그릇 먹는 것과 같다.

 

짜장면을 처음 한그릇 먹으면 매우 맛있다. 그러나 두 그릇째 먹으면 맛은 반으로 떨어진다. 세 그릇 째 까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그릇을 먹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고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약은 아무리 먹어도 그 즐거움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약은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재벌2세나 재벌3세와 같은 부자들이 즐기는 것이다. 서민들은 돈이 없어서 즐기고 싶어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부자 삼대 못 간다고 한다. 왕조 역시 삼대 가기 힘들다. 창업자는 헝그리 정신으로 자수성가 했기 때문에 결핍의 괴로움을 알고 있다. 그러나 2세와 3세에 이르면 모든 것이 구족 되어 있기 때문에 즐기는 삶에 있어서 장애가 없다. 경제학적 용어로 따진다면 한계효용의 법칙한계균등의 법칙에서 자유롭다. 그 결과 쾌락에 젖어 사는 삶이 되기 쉽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즐거운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괴로워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에 빠진다고 한다.

 

삼대 가지 못하는 것에 종단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조계종단의 경우 1960년대에 창종 되었다. 이제 6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 크고 작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공분을 산 것이 승려도박사건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승단에는 도박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모이면 도박판을 벌이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재벌2세나 3세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조계종단은 막대한 토지와 문화유산을 물려 받았다. 종단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승려들은 재벌2세나 3세와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을 구족하고 있는 입장에서 즐길거리를 찾다 보니 도박인 것이다. 그런데 도박이라는 것은 피곤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밤새도록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는 한두시간 하면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도박은 마약처럼 한계가 없다. 그래서일까 돈 있는 권승들이 도박을 즐기는 모양이다.

 

돈 부자나 시간 부자들은 돈과 시간을 주체할 줄 모른다. 가진 것은 돈과 시간 밖에 없어서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도 한계가 있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계가 없는 마약과 도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든 것이 구족 되어 있으면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일까 보왕삼매론 두 번째를 보면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부족한 삶의 방식이 요청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에 승가가 형성되어 오늘날에 까지 이르고 있다. 수천년 동안 가르침의 바퀴가 굴러 온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부족한 삶의 방식을 살아 왔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매일 탁발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살았을 때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질 수 없다. 오늘날 테라와다불교 승단이 건강한 것은 부족한 삶, 결핍된 삶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 건강은 질병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알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젊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늙고 나서야 젊음은 늙음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이르러야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건강의 교만으로 살아 가고, 젊음의 교만으로 살아가고, 삶의 교만으로살아 간다. 결국 질병, 늙음,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겸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거나 세상살이에 곤란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병고가 때로 약이 될 수 있고, 부족한 삶이 때로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다.

 

 

2019-05-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