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패배 거룩한 부활
장엄한 패배 거룩한 부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광화문에서 울려 퍼졌던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그날 사람들은 합창했다. 이를 어떤 이는 ‘떼창’이라고 했다. 백만명이 부른 합창이다. 2016년 겨울 광화문에서의 일이다. 찾아 보니 12월 9일이다. 이에 대하여 ‘당신은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 7차 촛불에 참가하고’(2016-12-11)라는 제목으로 기록해 놓았다.
광화문 촛불은 1차부터 참가했다. 10월 29일 처음 촛불이 열렸는데 나중에 보니 1차가 된 것이다.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국정원댓글사건이나 세월호와는 달리 혁명적 분위기가 감지 되었다. 이후 매주 토요일이 되면 촛불현장으로 갔다.
광화문에서 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을까? 이에 대하여 그때 당시 글에서 “먼저 간 자의 넋을 달랜다는 개념으로 선택된 노래인데 세월호로 희생된 자들의 추모분위기도 담고 있는 듯합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세월호와 관련지어 생각한 것이다. 광화문촛불이 세월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홍구 선생의 유튜브 강의를 듣고 감을 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주와 관련이 있었다.
김동수열사 추모제에서
2019년 5월 25일 광주에 다녀왔다. 대불련에서 주관하는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것이다. 서울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했으므로 몸만 실으면 되었다. 조선대에서 추모제가 거행되었는데 이제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광주에 대한 것이 말끔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5.18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김종배선생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김종배 선생은 도청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980년 5월 26일의 일이라고 했다. 계엄군이 자정까지 도청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비워주지 않으면 진입하겠다는 것이다. 도청에는 5백명 가량 있었다. 끝까지 싸울 자신이 있는 사람만 남고 집에 갈 사람은 가라고 했다. 그 결과 200명 가량 남았다고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엠원이나 칼빈소총 뿐이었다. 이에 비하여 계엄군은 2만명 가량 되었다. 그것도 3공수, 7공수, 11공수, 20사단 등 정예부대와 전교사, 31사단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되었다. 계엄군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개시 하자마자 17명이 즉사했다. 거기에 김동수열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신은 망월동에 가매장 되었는데 나중에 대불련 선배가 수습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왜 남았을까?
의기양양한 시민군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죽었다. 지위가 높거나 많이 배운 사람들은 많지 않다. 총을 든 사람들 역시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시민군들의 면면을 보면 나이든 사람이나 지식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로서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청년들이다. 이는 국립5.18묘지 시민군 동상에서도 확인된다.
5.18 주역은 시민군이다. 그것도 젊은 시민군이다. 5.18 기록관에 가보면 무장한 시민군에 대하여 “시민군은 개선병사들처럼 의기로 충만했고, 시민들의 환호는 열광적이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민군들의 면면을 보면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폭도라 부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면 폭도는 아니다. 자위권 차원에서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총을 들어야만 했다. 누구나 시민군이 될 수 있었다.
최근 ‘김군’이라는 다큐영화가 발표되었다. 김군은 시민군 중의 한사람이다. 누구나 김군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감독에 따르면 시민군 사진을 보고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는 시민군을 폭도 내지 외부세력으로 왜곡했기 만든 것이다.
영화 김군에 등장하는 시민군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그래서일까 지만원은 ‘제1광수’라고 했다. 지만원이 말하는 광수는 광주의 북한군 특수부대를 말한다. 시민군을 폭도로 모는 것도 부족해서 북한군 특수부대출신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사진속의 시민군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도청에 남았을까?
최후의 날이 왔다. 5월 26일 도청에 있던 시민과 시민군은 최후통첩을 받았다. 자정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안전보장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최근 5.18과 관련하여 한홍구 선생의 유튜브 강의를 보았다. 강의 제목은 ‘1980년 광주, 5·18을 다시 생각한다’이고 2시간 40분 분량이다.
한홍구 선생의 강의를 녹취하며 들었다. 한마디 한구절이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의문이 풀렸다. 김동수열사 추모제에서 김종배선생이 말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왜 그들은 도청에 남았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항쟁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 일어난 소요사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념을 달리 하는 자들은 왜곡하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광주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일까?
한홍구 선생의 유튜브 강의를 듣고 광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들어 보니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있기까지 광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도청에서 결사항전에 대한 것이다.
김종배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아무도 남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집에 간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했다. 누가 남아 있어야 할까? 왜 남아 있어야 할까?
한홍구 선생은 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라며 솔직하게 답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 같으면 도청으로 갔을까 아니면 집에 갔을까?”라고 끝까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왜 그들은 도청에 남았을까?”라는 말에 알아야 할 것이 다 있다고 했다.
지식인은 증언을 남기고
만약에 그때 당시에 광주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지식인이라면 집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달할 의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박완서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박완서는 1.4후퇴 당시 서울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텅빈 서울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라고 했다.
세상이 바뀜에 따라 겪은 고초에 대하여 언젠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라고 했다.
“빼앗길 망정 내 주지 말라.”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집으로 돌아 갔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김동수 열사와 같은 학번 같은 학과 세 명이서 도청으로 가느냐 마느냐로 토론했다고 한다. 소주 잔을 앞에 놓고 한시간 동안 침묵했는데 마침내 한사람이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가 너무 슬퍼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슬퍼할 것 같아 도청에 가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한명, 두 명, 세 명 빠져 나가다 보면 누가 남아 있을까? “내가 남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은 목숨이다. 칼빈소총으로 탱크를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도청에 남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그냥 남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홍구 선생은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을 했다. 그것은 “빼앗길 망정 내 주지 말라.”라는 말을 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내주면 되찾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들은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그들은 왜 끝까지 싸우려 했을까? 이에 대하여 한홍구 선생은 “그것은 싸운 것에 대한 의미를 지키려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지켜내려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엄한 패배 거룩한 부활
다음날 새벽 3시 계엄군이 진입해 왔을 때 30분도 안되어서 상황이 종료 되었다. 실제로 진입한지 5분 만에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살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반은 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장엄한 패배’라고 했다.
광주항쟁은 계엄군의 도청진입으로 끝났다. 시민군이 패배한 것이다. 그런데 장엄한 패배라는 것이다. 왜 장엄한 패배라 했을까? 그것은 도청을 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내 주면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후까지 싸운 것에 대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하여 김종배 선생은 “그 죽음이야말로 광주항쟁의 최고 가치입니다.”라고 말했다.
집에 간 사람들은 부채의식으로 살았을 것이다. 5월 달에는 집에 갔지만 6월 달에는 다시 돌아 왔다. 1987년 6월 항쟁을 말한다. 도청을 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텅빈 도청에 전두환 일당이 들어 왔다면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도청에서 결사항전이 있었기 때문에 거리로 나온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장엄한 패배’가 있었다. 그러나 내 주지 않고 빼앗겼기 때문에 다시 되찾아 올 수 있었다. 그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 5월에 집에 갔던 사람들이 6월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그래서 6월에 대하여 ‘거룩한 부활’이라고 한다. 그것은 “끝까지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기억하자.”라고 말 할 수 있다.
현재가 바뀌면 과거의 의미도 달라진다
역사와 대화할 수 있을까? 과거 역사는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는 과거의 역사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가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역사와의 대화는 가능할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한홍구 선생은 “현재가 바뀌면 과거의 의미도 달라집니다.”라고 말했다.
한홍구 선생에 따르면 80년 광주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어느 정도 승리한 사건이라고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패배로 기록된 듯했다. 미래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1980년대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80년대 광주는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였다. 마치 AD와 BC로 나누어 지듯이, 민주화운동은 광주이후와 광주이전으로 나뉘어졌다. 그래서 5월이 없었으면 6월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확장한다면 광화문촛불도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정권이 들어 섰을 때 사람들은 좌절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만든 역사인데 이렇게 끝낼 순 없잖은가?”라고 생각했다. 만일 광화문 촛불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은 계속 그렇게 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 다시 한번 도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계속되고 더구나 후속 정권이 이어졌다면 어떤 마음이 들어갈까? 아마도 “내가 이러려고 도청에 남았었나?”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광주항쟁으로 죽은 사람들은 개죽음이 되고, 시민군은 폭도로 내몰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을 바꾸면 과거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촛불로 정권이 바뀜에 따라 의미가 다시 살아났다. 현재가 바뀌면 과거의 의미도 달라진다.
잘 하라고 말을 거는 듯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대화는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런데 6월항쟁, 보수정권의 등장, 그리고 촛불에 따라 민주정부의 부활을 보면 분명히 과거와 대화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현실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업치락뒤치락 했다. 그때 마다 광주의 의미는 달라졌다. 그래서 한홍구 선생은 “80년 5월 광주는 우리한테 정말 잘 하라고 말을 끊임 없이 걸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80년 5월 광주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박근혜정권 시절 암울 했을 때 촛불을 든 것도 광주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도청을 내 주었더라면 6월도 없었고 광화문도 없었을 것이다. 2016년 12월 9일 광화문 7차 촛불 때 백만명이 “산자여 따르라~”라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2019-05-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