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조용히 살고 싶다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19. 6. 21. 10:11


조용히 살고 싶다는데

 



 

조용히 살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유행가 중에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촌은 조용한 이미지이다. 시골에 가면 사람 하나 보기 힘들 정도로 정적이 흐른다. 가끔 소란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고요해진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시골은 대체로 정태적(靜態的)이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피곤하다. 힘들고 지칠 때 집이 최고이다. 일이 끝나면 집에 틀어 박힌다. 안락한 집에 틀어박혀 꼼짝 안한다. 흔히 말하는 방콕이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칩거한다. 조용히 사는 것이다. 도시에 살지만 강촌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조용히 사는 것은 쉽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조용히 산다고 하지만 가만 있지 않는다.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한다. 즐길거리가 없으면 무료하고 따분하다. 권태로운 삶에 쾌락은 활력소이다. 사람들은 심심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눈과 귀와 코와 혀, 그리고 신체적으로 즐길거리를 찾아 기웃거린다. 조용히 살고자 하지만 오욕락의 갈애로 살아간다.

 

초전법륜경 집성제에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nandiragasahagata tatratatrabhinandini)”(S56.11)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다.”라는 뜻이다. 즐기는 삶에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이 없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눈으로는 매혹적 형상을 보려고 하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tatratatrabhinandini)”이라고 한다. 맛집을 찾아 먼 거리도 감수하는 것도 맛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조용히 산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즐기기 위해 분주하게 사는 것이다.

 

즐기는 삶에 반드시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다. 돈 많은 부자라면 예산에 있어서 한정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 쾌락을 추구할 것이다. 대마초나 마약같은 것이다. 돈 없는 가난뱅이라 하여 즐길 거리가 없을까?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장난감이 없으면 흙놀이라도 한다. 모래로 성을 쌓고 허물기도 한다. 가난한자도 한정된 예산에서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즐길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두리번거린다. 누구든지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무료와 권태, 하품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나 조용하게 살 수 있다. 조용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누구나 즐기며 산다. 즐기며 사는 것 역시 쉬운 일이다. 게으른 자는 즐기면서 산다. 이 세상에서 게을리 즐기면서 사는 것이 제일 쉽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법구경에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pamattā yathā matā)”(Dhp.21)라는 구절이 있다. 게으른 자는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욕락을 추구 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와 같다.”라는 말과 같다. 왜 그럴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는 존재에 대한 갈애와 같기 때문에 결국 다시 태어남(ponobhavika: 再生)’을 초래하고 만다.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삶은 필연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게으른 자가 이미 죽은 자라면 부지런한 자는 죽지 않는 자이다. 불방일자(不放逸者)는 왜 죽지 않는 것일까? 번뇌다한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그는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갈애가 부셔졌고,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하여 자만이 사라졌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하여 유신견이 타파되었다. 자아관념이 파괴 된 무아의 성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에 따른 죽음도 없다. 죽음이라는 말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게으른 자는 필연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즐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다시태어남을 초래한다. 그런데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뇌다한 아라한이 되면 불사(不死: amata)가 된다. 불사이면 불생(不生)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후 말씀에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D16)하라고 당부했다. 이 말은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이라는 뜻이다. 사띠(sati)를 잃어 버리지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는 말이다.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2019-06-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