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여기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함평 예덕리 고분 기행
누가 왜 여기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함평 예덕리 고분 기행
케이티엑스(KTX)를 탔다. 광명역에서 오전 6시5분에 탔는데 광주송정역에 정확하게 7시 41분에 도착했다. 300키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불과 1시간 36분만에 주파했다. 순간 시속이 300키로미터에 달했는데 마치 공간이동 하듯이 데려다 주었다.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는데
고향가는 길이다. 역에서 함평 월야면 문장까지는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뒤에 있는 송정공원역에서 영광가는 500번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면서 맞은 편에 있는 고등학교 정문에 걸려 있는 가로 현수막을 보았다. 현수막에는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자랑스런 역사를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고등학교 정문에 있는 현수막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자랑스런 역사를 지켜나가겠다고 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5.18은 자랑스런 역사가 된 것이다. 한때 ‘광주사태’라 하여 폭도들에 의한 폭동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정당성이 복원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5.18의 의미를 잘 모른다.
지난 5월 김동수열사 추모제를 참석하고 난 다음 5.18의 의미를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알고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유튜브에서 한홍구 선생의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이다. 이에 대하여 ‘장엄한 패배 거룩한 부활’(2019-05-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놓은 바 있다.
5.18정신 또는 광주정신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도청사수(道廳死守)’에서 알 수 있다. 죽음으로서 지키고자 한 것이다. 그날 마지막 날 계엄군으로 요청대로 도청을 비워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광주민중항쟁은 폭동이 되었을 것이고, 가담한 자들은 폭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백명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5.18이 빛난 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7년 후에 6.10 항쟁이 있었고, 37년 후에는 광화문 촛불이 있었던 것이다.
내 준 것은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빼앗긴 것은 되찾을 수 있다. 도청은 빼앗긴 것이다. 그때 살고자 도청에 들어 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채 의식 때문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것이 6.10항쟁이고 광화문 촛불이라 볼 수 있다. 만일 도청사사수가 없었다면 6.10도 없었고 2017년 광화문촛불도 없었을 것이다. 한 고등학교에 걸린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자랑스런 역사를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과연 학생들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유년시절 엄마 손잡고
버스가 문장에 도착했다. 문장에서 조금만 직진하면 영광으로 넘어 가는 고개가 나온다. 문장사거리는 작은 타운으로서 교통의 요충지이다. 북서쪽으로 가면 영광이고, 북동쪽으로 가면 장성이다. 남쪽으로 가면 송정리가 나온다. 그래서일까 옛날부터 오일장이 열리던 곳이다. 유년시절 엄마 손잡고 오일장 갔던 기억이 있다. 시골에서 여덟살 때까지 살았다.
문장에서부터 화산까지는 약 4키로 거리로 50분 가량 걸린다. 문장택시가 있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유년시절 추억도 있다. 무엇보다 공기가 좋다. 그렇다고 산길이 아니다. 탁트인 평야 또는 야트막한 구릉지대이다. 그러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가끔 자동차가 ‘쌩’하며 지나갈 뿐 사람 하나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타지에서 보낸 자가 귀향하는 것처럼 배낭을 메고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갔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지 않는다. 농촌의 풍광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렇다고 도시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개발 광풍과는 무관한 지역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이런 점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도시화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산업화로 공단이 들어선다면 추억 어린 장소는 모조리 파괴 될 것이다. 그러나 산은 파괴되지 않는다. 아무리 개발의 시대라고 해도 높은 산은 그대로이다. 높은 산은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역사를 모두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고향가는 길은 유년시절 엄마 손잡고 걷던 길이다.
문장 기미4.8만세 100주년 추모식
문장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만세탑이 하나 있다. 이를 4.8만세탑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오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난 요인은 무엇일까? 나이가 드신 사촌형님 말에 따르면 교통의 요충지 문장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마을이 있어서 학교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4.8만세 백주년을 맞이하여 ‘문장 기미4.8만세 영령 추모식’이 열린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송정에서 본 고등학교 현수막 같은 것이다.
논이 잔디밭으로
고향으로 가는 길 산하대지는 옛날 그대로이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사람이 바뀌었다. 또 먹고 사는 방식이 바뀌었다. 가장 극적인 현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논이 잔디밭으로 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축사가 이곳저곳에 생겨 났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오로지 쌀농사만 지었다. 너른 들판에는 모내기한 벼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논이 잔디로 바뀐 것이다. 벼농사를 짓는 것보다 잔디농사를 짓는 것이 더 수익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농촌 풍광이 변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물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있다. 4키로 가량 걸으면서 본 농촌의 풍광은 벼농사 짓는 논이 반이라면 또한 잔디밭 농사짓는 논이 반이다. 마치 초원에서나 보는 그린필드가 펼쳐졌다. 잔디농사가 끝나고 방치된 곳도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농촌의 모습도 변해 간다.
공장식 축사를 보고
마침 간 날이 6월 22일로 하지날이다. 연중 낮이 가장 긴 날이다. 하지날 산하대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신록은 녹음이 되어 온통 초록의 세상이다. 그런데 이곳 저곳 축사가 눈에 띈다. 4키로를 걷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축사를 보았다. 이른바 ‘함평한우’라 하여 이제 브랜드이미지가 생겨날 정도가 되었는데 함평한우 공급기지가 된 것 같다.
축사를 지날 때 냄새가 난다. 이른바 공장식 축사장에서 나오는 각종 오폐수가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래서일까 축사 부군의 논은 땅이 시커멓다. 축사 안은 마치 작은 감옥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소가 사육되고 있다. 그런데 작은 공간에 송아지가 있다. 송아지는 어미 소의 젖을 빨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어미소가 경계 자세를 취한다.
최첨단 돼지공장 축사
축사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 옛날처럼 벼농사 밭농사 하면서 사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벼농사와 밭농사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잔디농사도 하고 공장식 축사도 짓는다. 그런데 고향마을 거의 다 와서 작년에 보지 못한 커다란 건물을 발견했다. 소를 기르는 공장식축사 옆에 마치 체육관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저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새로 생긴 건물은 창문도 몇 개 보이지 않는다. 거의 밀폐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먼 조카뻘 되는 사람이 돼지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조카는 축산학과를 졸업한 다음에 고향에 와서 오로지 돼지만 길렀다. 들은 바에 따르면 두 세 번 실패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닭고기 대량생산으로 유명한 H사의 도움으로 돼지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돼지축사에 40억원 들었다고 한다. 물론 조카의 돈이 들어간 것이 아니다. 조카는 땅만 제공한 것이다. H사에서 투자한 것이다. 이제 오픈된지 한달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축사 내부는 컴퓨터로 가동되는 완전자동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른바 최첨단 공장식축사이다. 마치 공산품 찍어 내듯이 돼지가 자동으로 생산 되는 돼지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장식 축사는 혐오시설이다. 대량으로 사육하면 공장이라고 부른다. 닭공장, 돼지공장, 소공장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환경을 오염시킨다. 오폐수 처리가 되지 않았을 때 재앙에 가깝다. 이곳저곳 보이는 곳마다 축사가 있다. 이번에는 돼지 축사이다. 아무리 최첨단 시스템으로 가동된다고는 하지만 땅을 오염시킬 것임에 틀림 없다. 외지인이라면 주민이 반대 했을 것이다.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 같다.
빛그린산단과 전기자동차공장
고향으로 가는 길에 본 농촌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최근 십수년 동안 온통 축사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농촌의 풍광마저 바꾸어 놓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나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 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개발열풍은 피해 갈 수 없다. 월야면에 ‘빛그린 산단’이라 불리우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로 지나가는 길에 빛그린산단을 보았다. 포크레인으로 기반을 다지는 공사중에 있다. 무려 20만평이 넘는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것이라고 한다. 전기자동차는 미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신성장 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함평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고향 가까이 있는 월야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고향이 산업단지에서 뚝 떨어져 있기 때문에 파괴될 염려가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발에 대하여 상당히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전기차 공장이 들어서면 하청업체와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지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땅값이 크게 올라서 개발의 이익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생겼다는 것이다.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조용한 농촌 마을에 전에 없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나비는 청정지역에서 산다는데
천천히 시골길을 걷다 보니 고향마을 근처에 이르렀다. 이정표가 보였다. 나비모양의 이정표이다. 왜 하필이면 나비모양일까? 그것은 90년대부터 시작된 지자체와 관련이 있다.
요즘은 어느 지자체이든지 문화나 특산품을 주제로 하여 지역축제를 연다. 그런데 함평에는 뚜렷한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지자체장이 나비를 하여 축제를 하나 만들었다. 그래서 함평나비축제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비는 청정지역에서만 산다. 환경이 오염된 지역에서 나비가 살 수 없다. 나비를 주제로 한 함평나비축제가 이제 함평의 브랜드가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환경은 나빠져 가고 있다. 대규모 공장식 축사가 이곳저곳에 들어서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전기차를 생산 할 수 있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과연 미래에도 나비를 볼 수 있을까?
이정표를 보면
이정표를 보면 가장 먼저 예덕리고분군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도로 입간판에도 유적지를 알리는 적황색 컬러로 예덕리 고분군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번 고향방문에서 예덕리 고분군을 더 자세하게 살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예덕리 고분군을 알리는 안내판도 있다. 함평군 전체 관광지도와 같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함평군 북쪽 끝자락 부군에 세 개가 있는데 4.8만세터와 신덕고분군과 예덕리고분군이다.
전방후원형(前方後圓型) 신덕고분
제사는 12시 넘어서 지낸다. 두 시간 가량 일찍 도착 했기 때문에 예덕리 고분군을 먼저 가 보기로 했다. 걸어서 십여분 걸린다. 차로는 5분이내이다. 차를 빌려서 가 보았다.
예덕리 고분군은 꽤 알려져 있다. KBS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안내 표지판을 보면 고분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신덕고분군이고 또 하나는 예덕리 고분군이다. 먼저 신덕고분군을 보았다.
신덕고분군은 봉우리가 두 개이다. 처음에는 무덤이 두 개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무덤은 연결되어 있다. 사촌형님에 따르면 예로 부터 ‘장고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치 장구처럼 봉우리진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덕고분은 매우 크다. 마치 왕릉처럼 거대하다. 옛날 사람들은 마치 동산처럼 보였기 때문에 장고봉이라고 했을 것이다. 입간판을 보니 한쪽은 네모지고 다른 쪽은 둥근 ‘전방후원형(前方後圓型)’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신덕고분 크기는 얼마나 될까? 입간판에 따르면 전체길이가 51미터에 달한다. 원형부는 직경이 30미터이다. 네모난 방형부는 25미터이다. 높이는 19미터에 달한다. 어린아이가 보았을 때는 동산이라고 할만 하다. 신덕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사된 전방후원형 고분이라고 한다.
고향마을을 바라보니
신덕고분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두 개의 봉우리가 마치 쌍봉낙타처럼 보인다. 인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월 하지 날이다. 봉분과 주변에는 온통 흰 꽃이 피어 있다. 5세기 말 경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16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덕고분에서 고향마을을 바라 보았다. 평야지대이지만 구릉으로 되어 있어 있다. 큰 산은 멀리에 있다. 온통 녹음으로 우거진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 옛날 왜 왕족과 같은 무덤이 이곳에 있었을까? 사람들은 이런 무덤과 함께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4세기와 5세기 예덕리 고분군
신덕고분을 보고 난 다음 바로 인근에 있는 예덕리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예덕리 고분군은 신덕고분과는 달리 그룹을 이루고 있다. 또 형태도 다르다. 신덕고분이 왕릉 같다면 예덕리 고분군은 집단으로 있어서 왕족에 준하는 자들의 무덤처럼 보인다.
예덕리 고분군 역시 인적이 없다. 흰색의 억새 비슷한 꽃이 만발해 있어서 푸른 초원에 와 있는 듯 하다. 안내표지판을 보니 마치 한변이 긴 삼각형 모양의 무덤 여러 개가 포개져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도 전방후원형이라고 본다.
예덕리 고분군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엄청난 크기의 무덤이다. 이곳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작은 동산 여러 개가 겹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전설이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 무덤이 있었는데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왕릉이었을 것이라고 전해져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입간판을 보면 역사가 4세기와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 지역은 마한지역이었다. 나중에 백제에 통합되었는데 그럼에도 마한의 영향은 남아 있어서 무덤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여기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누가 왜 여기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무덤의 역사는 4세기부터 시작된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 커다란 세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덤의 주인이 한국인이라는 설이 있고, 또한 일본인이라는 설이 있다. 또 어떤 이는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이 있다. 최근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2003년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한 고고학자는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모든 주장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국사 미스터리](13)‘장고형 고분’(下), 경향신문 2003-07-28)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 ‘일본에서 귀화한 마한인의 것’이라고 했다. 영산강 유역에 세력을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 해서 살았는데,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한이 백제에 통합 되었기 때문에 지배층은 백제로부터 작위를 부여 받아 백제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덤에서 발굴된 환두대도와 같은 유물로도 알 수 있는데 백제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마한지역은 백제에 통합되기는 했지만 거의 반 독립적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는 이들의 귀환에 대하여 “이들의 귀환은 당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긴다. 대격변기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다. 그 틈을 타 왜로 이주한 마한세력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너 돌아왔다는 가설이다.” ([한국사 미스터리](13)‘장고형 고분’(下), 경향신문 2003-07-28)라고 써 놓았다.
신덕리와 예덕리 고분군을 보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형이다. 이를 일본식 무덤이라고 하는데 그때 당시 유행했던 무덤양식이 일본 전역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일본식 무덤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하나가 고향 마을 부근에 있는 신덕리와 예덕리 고분군이다.
무덤의 주인은 누구 것일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일본에서 귀화한 마한인의 무덤일 것이라고 한다. 마한이 백제에 통합 되었기 때문에 백제로부터 작위를 부여 받은 마한인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전방후원형 무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으로 알 수 있다.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 와서 백제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설이다. 이 무덤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저 멀리서 개발열풍이
하지날 무덤에 서 있었다. 구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반은 평야이고 반은 야트막한 구릉이다. 구릉과 구릉 사이에 이곳저곳 마을이 산재해 있다. 화산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큰 집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일년에 한번 제사 지낼 때 전국 각지에서 사촌들이 모일 때 사람 사는 집이 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허물어진다. 그리고 왕성하게 자란 시누대 등 각종 나무로 인하여 정글이 되어 간다.
장비를 동원하여 가지치기를 했다. 칠십년 이상 된 감나무와 가죽나무가 베어 졌다. 나무가 너무 자라서 태풍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집을 덮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사촌들과 함께 노동을 했다. 함께 일을 함으로 인하여 더 가까워 지는 것 같다.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늘 보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촌들이 하나 둘 떠 났다. 작년 나이 든 두 명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무상을 느낀다. 인생만 무상한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가 떠 났다. 그러나 산하대지는 그대로 있다. 1600년 된 무덤도 그 자리에 있다. 자연도 무상하지 않다. 저 멀리서 개발열풍이 몰아쳐 오고 있다. 자연도 무상하지 않다. 과연 이곳도 개발열풍을 피해 갈 수 있을까?
2019-06-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