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과거 이미지때문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14. 11:53

 

 

 

과거 이미지때문에

 

 

 

 

 

이미지로 당선된 정치인이 있다. 그는 TV에서 사회자로 얼굴을 알렸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알린 것으로 본다.

 

 

 

그는 잘 생겼다. 호감형 미남이라 볼 수 있다. 키도 훤칠하고 언변도 좋다. 더구나 변호사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젊었다. 이런 인재는 정치권에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아주 쉽게 정계에 입문했고, 무난히 국회의원이 되었고, 서울시장까지 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승승장구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미지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상품가치와 대중이 바라는 욕구가 딱 맞아 떨어져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것이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이다. 그래서일까 이미지 관리를 한다. 아니 이미지 세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을 소개하는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출마하고자 할 때 볼 수 있는 학력, 경력 등 꽤 긴 이력을 말한다.

 

 

 

갖가지 이력이 빼곡히 적혀 있을 때 이미지 세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덜 알려진 사람일수록,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일수록, 무언가 숨기고 싶은 사람일수록 갖가지 학력과 경력으로 이력은 화려하다.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것이다.

 

 

 

대중은 이미지에 약하다. 이른바 비주얼이 좋으면 몇 발 접고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여기에 학력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유학파이면 성공이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외국에서 놀다가 왔거나 방황하다 왔을지라도 외국 물먹은 것이 플러스로 작용한다. 같은 실력이라도 이미지에 따라 스타가 되기도 하고 그저 그런 연예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블로그에 글 쓰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대표라는 직함을 사용한다. 명함에는 대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인사업자이기 때문에 일인사장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인사장은 수백만명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길을 가다가 누군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상당수가 뒤돌아 본다고 한다.

 

 

 

자기소개 할 때 난감할 때가 많다. 일인사업자가 자신을 대표 또는 사장이라고 말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블로거라고 소개한다. 블로그하여 먹고 사는 것이 아님에도 마땅히 소개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하루 일과 중에서 반은 글쓰기로 보낸다. 십여년 이런 세월이다. 그러다 보니 저는 미디어 다음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필명 담마다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블로그에는 일체 개인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가족 이야기도 쓰지 않는다. 십여년전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아내가 가족이야기는 절대로 쓰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체 가족 이야기는 물론 사진도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일체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글로서만 소통하고자 했다. 그러나 페이스북에서는 달랐다.

 

 

 

3년전 본격적으로 페이스북에 진출했다. 본거지는 블로그이고 페이스북은 세컨드개념이라 볼 수 있다. 블로그에서 하던 대로 필명을 쓰고자 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출신지와 학교까지 밝히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실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페이스북에서 실명을 사용하니 발각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출신지와 학교는 밝히지 않고 있다. 어떤 이미지가 형성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페이스북 할 때 얼굴을 숨겼다. 블로그에서 하던 방식대로 연꽃으로 대신했다. 그랬더니 어떤 이가 얼굴 공개하지 않는 사람과는 친구 안합니다.”라며 페절하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의 특성상 신상은 공개하게 되어 있다. 실명은 필수이다. 얼굴은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모두 얼굴을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최초로 인터넷에 얼굴을 공개하게 되었다. 마치 커밍아웃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글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가 있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노래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신인들은 이미지와 관계없이 오로지 가창력 하나로 승부하려 한다. 그러다가 얼굴을 공개했을 때 실망감도 있을 것이다. 라디오시대에 성우들의 목소리만 듣다가 실물을 보았을 때 실망감 같은 것이다. 여기에다 학력도 별볼일 없다면 엠비정부시절 필명 미네르바 사건을 떠 올리게 할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무엇하나 자신있게 내 세울만한 것이 없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에게 화려한 이력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에서는 끊임없이 털어 놓으라고 다그치는 것 같다. 그래서 겨우 이름과 얼굴만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것도 이미지로 작용할 것이다.

 

 

 

얼굴을 공개하면이런사람이라고 이미지가 고착된다. 단지 어느 날 한때 순간에 지나지 않은 외모임에도 마치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온은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과거의 이미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 모습을 보고서 현재를 판단하려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미지 관리하려 한다. 심지어 이미지 세탁까지 하려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원초적

 

 

 

사람들은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도 이런 태도는 엿보인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라며 생각을 물어보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이미지로 대신하려는 것 같다.

 

 

 

이미지는 원초적이다. 이미지는 즉각적인 것이다. 이미지는 생각이전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대상을 접촉했을 때 알 수 있다. 그런 이미지는 이름일 수도 있고 형태일 수도 있다. 이름을 접했을 때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떠 오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나에게 좋게 했다면 좋은 이미지일 것이고, 힘들게 했다면 나쁜 이미지일 것이다. 생각 이전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미지는 일종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통표지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운전자는 교통표지판의 이미지만 보고서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턴표시가 있다. 알파벳으로 (U)’자를 이미지화 한 것이다. 이런 표지판은 세계공통이다. 외국에 가서 그 나라 말을 몰라도 표지판을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이미지는 이름과 형태로 되어 있다. 이름을 보면 그 사람 이름이 떠오르고, 반대로 그 사람을 보면 이름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런데 실물이 아닌 개념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이다. 이름은 있지만 형태는 없는 것들이다.

 

 

 

이미지와 개념으로 된 것을 오온에서는 상()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상()이라고 한다. 상을 척파해야만 진정한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에 대하여 빠알리어로는 산냐(saññā)라고 한다. 영어로는 ‘perception’ 또는 ‘cognition’이라고 한다.

 

 

 

과거 이미지 때문에

 

 

 

산냐는 존재를 다섯 가지로 구성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지각으로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인식으로 번역했다. 산냐는 원초적이고, 즉각적이고, 생각이전이기 때문에 인식(cognition)보다는 지각(perception) 이 더 가까울 듯하다.

 

 

 

오온에서 산냐는 이미지의 다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에 저장해 놓은 것들이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과거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이미지가 형성되면 그 사람 이름을 들었을 때 부정적으로 본다. 반대로 그 사람이 나에게 잘 해 주었다면 항상 좋은 이미지로 있게 된다.

 

 

 

사람들은 좋은 이미지를 주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다. 얼굴을 성형하는 것도 그렇고 옷을 잘 입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이는 외향적이다. 아무리 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해도 나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설령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반응하기 때문에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과거 이미지에 매여 살고 있다. 그 사람은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닐 수 있음에도 그 사람의 과거 이미지에 매여 살고 있다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미지 세탁하는 것이다.

 

 

 

이미지 세탁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이미지에 현혹될 것이다.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그렇다는 것이다. 직접 접할 수 없기 때문에 매스컴에 놀아날 수 있다.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정치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네 가지 유신견(有身見)

 

 

 

이미지는 왜곡되기 쉽다. 한번 잘못된 설정된 이미지에 집착하면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 이미지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했을 때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니까야에 답이 있다. 부처님은 오온에서 상온에 대하여 이렇게 보라고 했다.

 

 

 

 

 

장자여,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지각을 자아로 여기거나,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거나,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부처님의 유신견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는 “1)지각을 자아로 여기거나, 2)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거나, 4)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라고 네 가지 유신견(有身見)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사람의 나쁜 이미지에 대하여 지각에 대한 네 가지 공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사람의 이미지를 자아로 여기거나로 시작하여 네 가지 잘못된 견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형성되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 사람을 미워하면 그사람이 미움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내가 괴로워서 고통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라고 한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을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이름만 보면 좋지 않은 이미지가 떠 오른다. 그 이미지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좋은 이미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혹적인 이미지에 집착되어 있다면 그 이미지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지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도 없는 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는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에서는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라고 했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느낌이 발생하는 것은 십이연기에서 연기가 회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느낌이 망상으로 전개될 때는 지각이 개입한다. 느낀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과거의 이미지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한다.”(M18)라고 했다. 여기서 희론이라는 말은 빠빤짜(papañca)의 번역어로서 망상과 같은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속된말로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과 같다. 마치 허공속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오직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수행으로 극복해야

 

 

 

망상이 일어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과거 좋지 않았던 일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마음에서는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내 돈을 떼어먹고 달아난 사람일 수도 있고, 나를 버리고 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면 할수록 나만 괴롭다는 것이다. 이미지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내 것이라고 굳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미워했던 그 사람은 개과천선해서 잘 살고 있을지 모른다. 또 그 사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실체도 없는 과거 이미지를 붙들어 매고 있다면 괴로운 것이다. 그것이 설령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미지이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배운 부처님제자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니까야에 답이 나와 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지각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지각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지각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지각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지각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

 

 

 

 

 

부처님은 수행하라고 했다. 이미지를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수행을 통하여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수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철하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오온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 하기 때문에 실체도 없는 이미지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지각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S22.15)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이미지에

 

 

 

오온은 본래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면 괴롭다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가만 앉아서 사념처로 오온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의문에서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 올랐을 때 관찰하면 망상의 단계까지 전개되지 않는다. 지각단계에서 알아차려 끝내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만든 이미지에 괴로워 한다면 그 이미지의 포로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 이미지의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화가가 귀신을 그려놓고 귀신의 무서운 이미지에 속박당해 있는 것과 같다. 또 매혹적인 여인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이미지에 매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미지는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이미지에 집착해 있다면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지각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실체가 없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지각이 어찌 실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S22.20)라고 했다.

 

 

 

겉모습만 보고서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외모나 스펙만 보고서 판단한다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지에 놀아나는 것과 같다. 요즘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양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 라이브카페에서 무명가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 아이돌 가수는 현란한 댄스로 입만 벙긋할 뿐이다. 그 사람의 학력과 경력만 보고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것도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인지는 오랫동안 같이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정직한지는 대화를 통해 왕래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토론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A4.192)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답은 공통적인 것일지 몰라도 질문은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그 사람의 개성을 나타난 것으로 그 사람의 현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질문은 그 사람의 한계를 말해 주기도 한다.

 

 

 

토론 과정에서 질문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수준과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일까? 이는 토론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지혜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 존자는 심오하고 고요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한다.”(A4.192)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목숨 걸 필요 없다

 

 

 

사람에 대하여 이미지로 판단하면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물사진만을 보고서 판단하려 한다면 잘못 판단하기 쉽다. 이미지는 어느 때 한순간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미지로 승부하려 한다면 세상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 세탁으로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을 현혹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이미지는 진실이 아니고 아니고 조건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무상한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22.21)라고 했다. 상을 척파해야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이미지에 목숨 걸 필요 없다.

 

 

 

 

 

2020-03-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