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방편품을 읽고
법화경 방편품을 읽고
대승불교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는 불교사적으로도 알 수 있다. 부파불교를 극복하고자 대승불교사상이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려면 경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경전이 찬술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 방편품을 보면 기존 전승된 경전을 잘 아는 논사가 찬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방편품에서 “내 말한 9부의 법(九部法) 중생 근기 따름이니 대승 근본 삼으려고 이 9부의 법을 말하노라.”라고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부법은 경, 응송, 게송 등과 같은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런 구부법에 대하여 단지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다.
방편품을 보면 62견에 대한 게송도 있다. 이것을 보고서 대승경전을 찬술한 사람들이 삼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고 생각한다. 62견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실려 있다. 62견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등 삿된 견해를 말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62견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방편품 게송을 보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62견 구족하고 허망한 법 고집하여 버릴 줄 모르나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삼장에 정통하지 않으면 62견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대승경전을 찬술한 논사들은 대승보살사상구현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집필했을 것이다. 그로나 모티브는 항상 니까야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방편품 게송에서 “그때에 범천왕과 제석천왕 사천왕과 대자재천 모든 하늘 백천만 권속들이 합장 공경 예배하여 나의 법륜청하거늘”라고 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 대목을 보면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의 경’(S6.1)과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서 보는 사함빠띠 브라흐마의 청원을 연상케 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이를 가장 먼저 알게 된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 M26.34)라며 청원한다. 법화경에서는 사함빠띠 브라흐마(梵天王) 뿐만 아니라 제석천왕 사천왕과 대자재천 이렇게 세 명이 더 등장한다. 여기에 모든 하늘 백천만 권속들이 합장 공경 예배하며 청원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는 오로지 사함빠띠 브라흐마 하나만 등장한다.
니까야에서는 오로지 사함빠띠 하나만 등장하여 청원한다. 부처님이 주저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S6.1, M26.29)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것은 이어지는 게송에서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 M26.2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다름아닌 역류도(逆流道: paṭisotagāmī)이다. 역류도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도를 말한다. 세상사람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아 갈 때, 역류도를 추구하는 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된 세상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방편품에서는 이와 같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단지 세상의 언어로 된 8만개 이상의 방편으로 설한 것이라고 폄하했다. 진실한 부처님은 따로 있는데 중생들의 근기가 너무 낮아서 이를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편품에서는 “제일가는 대도사가 위없는 법 얻었건만 모든 부처님을 따라 방편법을 쓰는구나.”라며 단정했다.
법화경에서는 일불승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은 삼승이라 하여 방편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 ‘이미 아라한을 얻어서 맨 나중 몸이며 필경의 열반이다.’라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뜻을 두어 구하지 않는다면, 이런 무리는 교만한 사람인줄 알아야 하느니라.”(법화경 방편품)라고 했다. 이 구절을 보니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아라한선언한 것이 떠 오른다.
부처님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다음에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고 선언했다. 이를 아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이런 선언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청정한 삶을 살아 마음의 오염원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라한선언을 하는 것이다.
법화경방편품에서는 성문승에 대하여 마치 조롱하듯이 교만한 자의 외침같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삼승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하여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했다. 증상만이란 “훌륭한 교법과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잘난 체하는 일을 이른다.”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증상만은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으로 따르는 자들은 모두 교만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편품에서는 “나의 법은 미묘하여 어렵나니 증상만 사람들이 이 법 들으면 반드시 믿지 않고 공경않으리.”라고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최초로 설법을 할 때 회중에 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5천명이 일어나서 나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화경 부처님은 “그와 같은 교만한 사람들은 물러가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느니라.”라며 붙잡지 말라고 했다.
아라한에게 교만이 남아 있을 수 없다. 아라한이 되려면 열 가지 족쇄를 부수어야 하는데 마지막 단계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자만(mana:慢)이다. 니까야에 따르면 오상분결이라고 하여 미세한 낮은 단계의 결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만인 것이다. 이런 자만은 대개 “내가 누군데.”라는 우월적 자만으로 나타난다.
아나함이라면 “내가 아나함인데.”라는 자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면 이런 자만도 부수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자아가 모두 파괴되어 무아의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화경방편품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하여 교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게송에서는 증상만이 퇴장한 것에 대하여 “이런 좀생이들이 나갔으니 찌꺼기 같은 그 무리들”이라고 했다.
법화경에서 보는 부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비로운 부처님과 거리가 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부처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바이블 구약에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야훼신을 보는 것 같다. 좀생이나 찌꺼기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이 밖에도 “근기 둔한 소승인”이라든가, 또 “아둔한 이들은 소승법을 즐겨서”라는 표현이 그렇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석가모니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은 후대 유마경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법화경 방편품을 보면 소승불교를 비방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부파불교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설일체유부가 표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비판을 넘어 비방까지 하게 된 것은 상대방의 새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소수가 세력을 얻기 위해서는 기성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시스템에 대하여 모순과 위선, 거짓을 지적하며 맹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후원하는 세력이 많아지면 힘을 받을 것이다. 법화경도 다름이 아니라고 본다.
법화경은 그 시대 사람들이 요청한 시대적 산물이다. 그런데 거의 이천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방편품을 읽어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마치 유튜브에서 적대적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자비로운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헐뜯는 것이 많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더 낫다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이 많다.
이천년전 시대가 요청한 산물을 현시점에서 귀의처로 삼기에는 마음이 너무 거칠어지는 것 같다. 방편품 게송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보다는 불선심이 더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소승이라고 그토록 비난했던 초기경전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을 보면 마음이 금방 편안해진다.
2020-03-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