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빛으로 오신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2. 15:07

 

빛으로 오신 부처님

 

 

모기에게도 자비심이 있어야 할까? 아직까지 모기에 대한 자비심은 없다. 모기가 앵앵 거리면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때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이 때려 잡으려 한다. 쫓아다니면서 잡았을 때 쾌감을 느낀다. 시뻘겋게 부푼 부위를 보면, 그로 인하여 욱씬거리며 불쾌를 야기한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무자비한 사람일까?

 

모기에 물렸는데

 

오늘 아침 모기에 물렸다. 올해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모기 보기가 힘들다. 사는 곳에서는 최근 십년가량 모기로 인해 고통받지 않았다. 십년 전 아마 2000년대 말에 모기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방에 개별 모기장을 설치할 정도였다. 대형마트에서도 모기장을 팔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기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환경이 변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어느 날 종적을 감춘 것이다.

 

모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많다. 모기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모기는 때려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모기가 얼굴에 앉았을 때 뺨을 때린다. 자신이 자신을 때리는 것임에도 아무렇지 않다. 모기가 걸리면 쾌감을 느낀다. 모기에 대한 일종의 적개심 때문일 것이다.

 

모기는 미물이다.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정신작용이 있는 유정물로 보기도 한다. 금강경에서는 사생 중에서 습생으로 본다. 사생자부 부처님의 자비에 따른다면 모기에게도 자비의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모기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다. 모기에 물렸을 때 불선한 마음이 일어난다. 모기를 잡는 과정에서 불선업을 짓게 된다. 모기를 죽였을 때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 것일까?

 

미얀마 선원에 가면 모기에 대한 대책이 철저하다. 커다란 명상홀에는 개별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모기장에 들어가면 마치 숲속 꾸띠에 있는 것처럼 안온하게 느껴진다. 숙소에 가면 침상에 또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스님들은 모기채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모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잡아서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기에 대한 대책은 철저하다. 창틀에 모기장을 설치해 놓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 앵앵 거렸을 때 불선심이 발동된다.

 

덩치에 따라서

 

자애경이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부처님은  과연 모기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 다발로 분해하여 고와 고소멸을 설한 것이다.

 

초기경전 어디를 보아도 오온에 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부처님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자비를 이야기했을 때 오온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비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식물도 예외가 아니다. 율장에서는 비구가 식물도 함부로 채취해서는 안된다고 했디.

 

식물은 자르면 또다시 순이 난다.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작용이 있는 유정체의 경우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유정물을 죽이면 살생이 된다. 그런데 유정물도 유정물 나름이라는 것이다. 모기를 죽이는 것과 코끼리를 죽이는 것과는 과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덩치가 큰 유정물일수록 더 큰 살생과보를 받는다. 왜 그럴까?

 

덩치가 큰 동물일수록 죽이기가 힘들다. 모기라면 한방에 죽일 수 있지만 코끼리를 죽이려면 한번에 되지 않는다. 몇날몇일이 걸릴지 모른다. 큰 동물을 잡으려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칼로 찔러도 여러 번 찔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을 죽이는데 있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고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 과보도 더 크다. 그래서 모기를 죽이는 것과 코끼리를 죽이는 것에 있어서는 과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지적수준에 따라서

 

지적수준에 따라 살생과보도 다른다. 같은 사람이라도 성인을 죽이면 범부보다도 더 큰 살생과보를 받는다. 이는 오역죄 또는 오무간죄라고 불리우는 다섯 가지 무거운 죄에서도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에 따르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거룩한 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M115)라고 했다. 바른 견해,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아라한과 같은 성자를 살해하는 무거운 죄를 저지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범부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을 살해하면 어떤 과보를 받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무간업을 받는다고 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은 일반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과보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과 같은 과보를 받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살해하면 어떤 과보를 받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는 있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여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되고자 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살해는 미수에 그쳤다.

 

상윳따니까야에돌조각의 경이 있다. 경에 따르면 그런데 세존께서는 돌 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곳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라고 되어 있다.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깃자꾸따 산에서 돌을 굴려 떨어뜨린 것이다. 다행히 부처님은 목숨을 건졌으나 돌조각에 맞아 몸에 상처가 난 것이다.

 

경에서는 부처님이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신격화되고 초월적인 모습의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부처님이다. 그런데 사띠를 하며 참아 내었다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래서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라고 한 것이다.

 

오무간업이 아니라 육무간업

 

오무간죄에 따르면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내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과 동급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 승가를 분열하게 해도 무간업을 짓는 것이 된다. 이렇게 다섯 가지 무간업이 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에 따르면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M115)라고 했다. 사견을 가지면 오무간업과 동급이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육사외도와 같은 삿된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하여 다섯 가지 무간업을 짓는 것과 동급으로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에서는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육무간업이 된다.

 

육무간업의 과보는 어떤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살아 있는 동안 6무간업을 지으면 확실하게 지옥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조정될 수 없는 업(an-antariya kamma)’이라고 한다. 시간이 끼여들 틈이 없이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설령 그가 수미산과 같은 크기의 금으로 짓고 온 세계를 보석으로 장식하여 보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여섯 가지 무간업을 지으면 즉시 과보를 받는 것을 억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어떤 것일까?

 

육무간업 중에서 최악은?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여섯 번째인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사견이 최악인가?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것은 6가지 해롭고 무거운 업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업이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라고 했다.

 

부모를 살해하고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것은 한겁이 끝나기도 전에 업이 소멸되어서 지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승가를 분열케 하는 것은 그 겁이 끝나야 지옥에서 나올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아난다의 경에 따르면 아난다여, 일 겁을 지속하는 죄과를 받는다.”(A10.39)라고 했다. 승단을 분열시키면 일 겁동안 지옥에서 괴로워함을 말한다. 이는 율장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승단을 분열시키려는 데바닷따에게 데바닷따여, 그만 두어라. 참모임의 파괴를 기뻐하지 말라. 데바닷따여, 참모임의 분열은 엄중한 것이다. 데바닷따여, 조화로운 참모임을 파괴하면, 한우주기 동안 지탱하는 죄과를 낳고, 한우주기 동안 지옥에서 삶아진다.”(율장소품, Vin.II.198)라고 했다.

 

부모를 살해하는 것 보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 보다,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보다 더 엄중한 것은 승단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단을 분열하게 하는 것 보다 더 엄중한 것은 사견이다.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것은 6가지 해롭고 무거운 업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업이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라고 했다. 그래서 수 겁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는다고 했다.

 

사이지옥(lokantarikā)이 있는데

 

사견에 따른 무간업은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한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업의 잠재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한, 심지어 세상의 시스템이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고 했다. 그런 지옥은 어떤 곳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세계가 끝이나면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인간이나 천신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정을 닦아서 그 결과로 범천의 세계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일겁을 주기로 성주괴공하는 우주에서 괴겁기가 되면 지옥중생이라도 업이 다하면 선처에 나는 것이다. 그런데 구제받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는 것이다.

 

지옥에 있는 중생 가운데 잘못된 견해(邪見) 중에 한가지에 집착하는 중생은 한우주기가 지나도 구제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파괴되지 않은 다른 세계의 시스템들 사이에 틈에 존재하는 악처로 다시 떨어진다.” (업과 윤회의 법칙, 346)고 했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불교에 여러 지옥이 있지만 구 중에 사이지옥(lokantarikā)’이 있다. 이 지옥은 철저하게 버려진 지옥이다. 무간업을 지어 한우주기가 끝나도 구제 받지 못하는 지옥중의 지옥인 것이다.

 

왜 사이지옥인가? 간극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삼계가 있는데 삼계 사이의 간극이 사이지옥인 것이다. 마치 세 개의 바퀴 사이의 틈처럼 간극이 있는데 그 사이에 있어서 사이지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암흑의 경이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덮게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힘과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능력이 있는 해와 달의 빛이 비추지 못하는 지옥이 있다.”(S56.46)라고 했다. 해와 달이 없어서 빛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암흑의 지옥인 것이다.

 

사이지옥에 빛이 들어올 때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밤에 암흑을 볼 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이다. 이런 암흑에 대하여 한자어로는 검을 흑()자가 아니라 검을 현()이라고 한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할 때 검은 것을 말한다. 깊고 광대한 암흑을 말한다. 영어로는 블랙이 아니라 블랙니스(blackness)라고 한다.

 

밤비행기에서 보는 블랙은 ‘vast blackness’가 된다. 밑도 끝도 없는 광대한 심연한과 같은 어둠에서 사는 존재들이 있다. 철위산 사이에 있다는 하나의 아비지옥이다. 해와 달이 비치지 않는 어둠이어서 이곳에 태어난 중생들은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빛이 비출 때가 있다. 부처가 출현할 때이다.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에 따르면 보살이 입태 했을 때와 탄생했을 때 놀랍고 경이로운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온 우주에 비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이 입태했을 때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라고 했다.

 

태어나서 평생 빛이라고 본 적이 없는 사이지옥 중생들도 빛을 볼 때가 있다. 보살이 입태 했을 때 처음으로 비로소 빛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 빛으로 인하여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M123)라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면 자비광명이 우주 끝까지 미치는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육무간업 중에서 최악은 사견을 갖는 것이다. 한번 사견을 가지면 여간해서는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사견을 말한다. 그런데 사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견에는 육사외도의 62견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견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S22.99)라고 여기는 견해를 말한다. 이것이 유신견 정형구이다.

 

유신견에는 네 가지 정형구가 있다. 오온에 적용하면 총 20가지 유신견이 있다. 그래서 외도의 62가지 사견과 오온의 20가지 유신견을 합하여 총 82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오온에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와 같은 삿된 견해에 빠지기 쉽다. 삿된 견해에 빠지면 한우주기가 지나도 구제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사이지옥은 외부에만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그곳의 암흑보다도 다른 더 크고 무서운 암흑이 있다.”(S56.46)라고 했다. 그 암흑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어떠한 수행승이든 성직자이든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S56.46)로 시작 되는 사성제를 설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사이지옥의 암흑보다 더 크고 무서운 암흑인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이는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사성제를 모르면 윤회하기 마련이다. 무명중생들은 십이연기가 회전하는 것처럼 연기적 삶을 살아간다. 그 종착지는 항상 절망이다. 그럼에도 살아 가는 것은 무명과 갈애 때문이다. 그런 삶과 끝은 어디일까?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22.99)라고 했다.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끝도 알 수 없다. 사성제를 모르면 사이지옥의 중생처럼 오늘도 내일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빛으로 오신 부처님

 

개미 한마리도 죽이지 못한다. 나방이 방에 들어오면 살려서 보낸다. 그러나 모기는 용서가 안된다.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어이 잡고자 한다. 스스로 뺨을 때리기도 한다. 잡았을 때 쾌감이 있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무자비한 사람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렇다며 진정한 자비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 만한 자비가 없을 것이다. 모기를 살해하는 죄업 보다 더 큰 죄업을 사전에 막아 주기 때문이다.

 

죄업 중의 죄업은 사견을 갖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에 집착했을 때 사이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한우주기가 지나도 구제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구제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했을 때이다.

 

부처가 출현했을 때 조짐이 있다. 보살이 모태에 들었을 때, 보살이 태어 났을 때, 그리고 부처님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를 아주 놀랍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만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난다.”(M123)라고 했다. 부처님의 자비의 광명인 것이다.

 




사람들은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마치 빛이 없는 사이지옥에 사는 것과 같다. 이는 삿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견을 가지고 있는 한 암흑의 사이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암흑 중의 암흑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면 영원히 암흑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부처가 출현해야만 사이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보살이 입태 했을 때, 보살이 태어 났을 때, 부처님이 처음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온 우주가 광명으로 가득했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이지옥과 같은 암흑의 세상을 비추는 자비광명이다. 부처님은 빛으로 오신 것이다.

 

 

2020-05-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