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세상에 불가사의한 것이 생명이다. 한번 생명 있는 것은 조건만 갖추어 지면 스스로 성장한다. 놀라운 것으 후손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자신과 똑 같은 개체를 만들어 내는 신공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생명은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현대과학으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크게 유정물과 무정물로 나눌 수 있다. 정신능력이 있는 유정물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태란습화’일 것이다. 그래서 대승정종분을 보면 “중생지류 약난생약난생약습생약화생(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이라고 했다. 이런 태란습화는 원류는 니까야에 있다.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이 있다. 경에 따르면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ṃsedajā yoni, opapātikā yoni)”(M12)라고 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금강경은 초기경전에서 내용을 가져와서 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유정물은 윤회하는 존재이다. 정신작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육도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신작용이 아주 낮다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신교에서처럼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아니다. 악처에서 선처로 가능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S3.21)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되기 어려운 이유
어둠에서 빛으로 온 사람들이 있다. 악처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인간의 지위가 매우 낮은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니까야에 따르면 악처에서 선처로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렵다. 특히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어서 한번 악처에 떨어지면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맹구우목의 비유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하나의 구멍이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나는 말한다.”(S56.47)
왜 이렇게 사람되기가 어려울까?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약육강식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고 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는 서로 잡아먹는다. 세렝기티 평원에 대한 자연다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연다큐를 보면 물속에서도 약육강식이고, 곤충의 세계에서도 약육강식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면 살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악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일까 한번 동물로 태어나면 항상 동물로 태어나는 것 같다.
약육강식의 축생계에서 초식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잡아 먹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살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초식동물로 오랫동안 살다보면 살생업이 다해서 미래 인간과 같은 선처에도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맹구우목의 비유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맹구우목의 비유에 따르면, 축생이 인간으로 되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인간으로 있다가 악처에 떨어지면 맹구우목의 비유보다 더 가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악처에 떨어지면 영원히 머물러 있을까?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하여 모든 것은 변하다고 했다. 유일신교에처럼 한번 천상이면 영원한 천상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아니다. 천상에서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고, 지옥에서도 지옥고가 다하면 선처에 날 수 있다.
어떻게 악처에서 선처로 날 수 있을까? 이는 경전에 근거가 있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S3.21)도 있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어둠에서 빛으로 간 사람에 대하여 “미천한 가문인 짠달라의 집이나 죽세공의 집이나 사냥꾼의 집이나 수레를 고치는 집이나 청소부의 집이나 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S3.21)라고 했다. 네 종류의 카스트, 즉 사성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은 악처에서 선처로 태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면 지위가 낮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카스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이동이 가능한 것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업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욕망계의 나쁜 존재의 운명에서 좋은 존재의 운명에로의 결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쁜 존재의 운명에 있으면서 허물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에서 언급한 방식에 의해서 그 허물 없는 업이나 허물 없는 업의 인상이 정신세계에 나타나는 까닭에 어두운 부분이 밝은 부분으로 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앞의 경우와 동일하다.”(Vism.17.139)
청정도론에서는 ‘허물없는 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그 때 업이나 업의 과보,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의 한가지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허물없는 업론에 따르면 악처에 있는 중생도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이야기’(Vism.7.51)로도 알 수 있다.
개구리가 천인이 된 이야기
청정도론에 개구리 만두까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앙가국의 각가라 연못 언덕에서 짬빠시에 사는 주민을 대상으로 법문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개구리가 있었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있었다.
개구리는 부처님이 법문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부처님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목동의 지팡이에 짓눌려 죽었다. 그런데 죽자마자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환희동산(nandanavana)’에 태어났다.
환희동산은 어떤 곳일까? 경에 따르면 삼십삼천에 있는 환락의 동산이다. 그곳은 앗차라(accharā)라 불리우는 무희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상락을 즐기는 곳이다. 그래서 “영예로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S1.11)라고 했다.
개구리는 졸지에 천인이 되었다. 천인 만두까는 환희동산에서 자신을 에워 싸고 있는 천녀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만두까는 “오!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떠한 업을 지었는가?” (Vism.7.51)라며 궁금해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개구리로 있을 때 목동의 지팡이 짓눌려 죽기 전에 부처님의 음성에 표상을 취한 것 밖에 없었다.
개구리 만두까는 마침 부처님의 설법장소에 있었다. 비록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쩐 일인지 부처님 음성에 표상을 취하여 충만된 상태에 있었다. 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천상의 천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인간의 몸을 얻는 것도 어렵지만
개구리는 천상에 태어났다. 인간도 거치지 않고 천인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더구나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맹구우목과 같다고 했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처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인간의 몸을 얻는 것도 어렵고
죽어야 하는 자가 사는 것도 어렵고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렵고
깨달은 님이 출현하는 것도 어렵다.”(Dhp.182)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도덕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업을 쌓아야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많은가?”(S20.2)라고 물었다. 인간과 신을 포함한 선처에 나기가 맹구우목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죽어야 하는 자가 사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인간은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니다. 길어야 백년안팍이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인간은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할 뿐이다.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많은 겁(刧:kappa)을 지나더라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을 때 태어나거나, 태어나더라도 변방에 태어나면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설령 동시대를 산다고 할지라도 사견을 가지고 있다면 인연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깨달은 님이 출현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이는 부처가 출현하기 어려움울 말한다. 왜 부처가 출현하기 어려운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서원을 세워서 사아승지십만겁 동안 목숨을 건 십바라밀행을 닦아야 한다.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수천 꼬띠를 지나도 드물다고 했다. 그런데 개구리 만두까는 우연히 부처님이 설법한 장소에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하고 충만한 상태에 있다고 설법을 듣던 목동의 지팡이 짓눌려 죽었을 때 천상의 천인의 태어난 것이다. 맹구우목의 비유보다 더 희유한 것이다.
수다원이 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악처에
악처에 있는 중생들이 선처에 나는 시기가 있다. 우주가 괴겁기에 접어 들 때이다. 괴겁기가 되면 가장 아래에 있는 지옥부터 파괴된다. 그래서 지옥에서부터 욕계천상이 모두 파괴되고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된다. 이때 악처에 있는 중생들도 선처에 나게 된다.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지옥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런데 다른 자들은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을 통해서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 없이 윤회 가운데 유전하는 뭇삶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선정을 획득한다. 이와 같이 천상세계에서 선정을 획득함으로써 모두가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Vism.13.35)
여기서 ‘다른 자들’은 악처의 중생을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은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천상계에 태어난다.”라고 번역했다. 개구리 만두까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에 따르면 개구리도 언젠가 인간이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면서 악행도 하고 선행도 했을 것이다. 수다원이 되지 않으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아무리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을 쌓았어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아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aparāpariyavedanīyakamma)
한번 악처에 떨어지면 다시는 인간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인간으로 된다고 해도 낮은 지위로 태어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욕계천상에 태어난 개구리 만두까이야기도 있다.
악처에서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전생에 쌓아 놓은 공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다원이 되지 못하여 어떤 세상으로 윤회할지 몰라서 악처에 떨어졌지만 악처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가 다 했을 때 남은 것은 이전 생에서 쌓았던 선행과보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선행과보로 인하여 선처에 태어난 것이다.
유일신교에서는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지만 불교에서는 한번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과보가 다하면 선처에 태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허물 없는 업’이라고 했다. 이는 전생에 지은 선업공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청정도론에서는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으로 설명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과보를 맺는 때에 따른 네 가지 업이 있다. 즉시 효력이 있는 업, 뒤이어서 효력이 있는 업,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 효력을 상실한 업, 이렇게 네 가지 업이 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aparāpariyavedanīyakamma)’이 바로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그러나 과보가 익는 시기는 다르다. 먼 이전 생에 행위한 것에 대한 과보를 금생에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업이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악처에 떨어진 자가 악행에 대한 과보가 다 했을 때 남은 것은 이전 생에 지은 선행과보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옥 중생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 없이 윤회 가운데 유전하는 뭇삶은 없기 때문이다.” (Vism.13.35)라고 했다. 또 “그 허물없는 업이나 허물 없는 업의 인상이 정신세계에 나타나는 까닭에 어두운 부분이 밝은 부분으로 되는 것”(Vism.17.139)이라고 했다. 업은 기한이 없어서 언젠가 익으면 과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열반의 마지막생 까지는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즉각적으로 받기도 하고 한참 후에 받기도 한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고 스마트폰시대이고 에스엔에스시대이다. 정치인이 막말을 하면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처럼 ‘즉시 효력을 받는 업 (diṭṭhadhammavedanīyakamma)’이 있다. 또는 금생에 과보로 맺는 업을 ‘즉시 효력을 받는 업’이라고 말한다.
행위를 했는데 나중에 받는 과보도 있을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뒤이어서 효력이 있는 업(upapajja-vedanīya kamma)’이라고 한다. 다음 생(두 번째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라고 한다. 한번 행위를 하면 다음 생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개구리 만두까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악처에서 선처로 가는 경우에는 다음 생에 받는다면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aparāpariyavedanīyakamma)’ 이 된다. 아비담마에서는 “세 번째 생에서 열반을 얻는, 마지막 생까지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붓다아비다마, 264쪽)이라고 설명했다. 악처에서 선처로 가기도 하고, 선처에서 악처로 가기도 하는 것은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으로 인한 것이다.
아득한 과거에 지은 악행이나 선행의 과보를 받는다면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계를 잘 지켰다고 하더라도 사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사악도를 면할 수 있다. 그래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떠한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1)라고 했다.
효력이 발생되지 않은 업이 있다. 이를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만약 금생에 작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라고 했다. 이는 금생에서 효력이 상실된 것임을 말한다. 다음 생에서도 그 다음 생에서도 이어진다. 그래서 무기한으로 효력이 있는 업이 된다.
한번 행위를 하면 과보로 나타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열반을 얻어 마지막 생까지 무기한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나 아라한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과거 생에 지은 과보로 인하여 몸의 아픔을 겪었다. 목갈라나는 과거전생에 부모를 살해한 과보로 산적들에게 머리와 뼈가 으스러져 비참하게 죽었다.
모든 땔감의 불꽃은 똑같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까마득한 과거에 지은 행위가 지금 과보로 나타날 수 있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기까지 어떤 과보를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질 염려는 없다.
니까야에 따르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희유한 일이다. 더욱 희유한 것은 정법을 만난 것이다. 정법을 만났을 때 윤회에서 탈출해야 한다. 비록 불가촉천민과 같은 낮은 지위로 태어났을지라도 정법에는 차별이 없다. 마치 불꽃과 같다.
전단향나무와 같은 고급나무에서 나오는 불꽃이나 소똥 말린 것에서 나오는 불꽃이나 형태와 광채와 빛깔에 있어서는 똑같다. 모든 땔감의 불꽃은 똑같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
2020-05-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