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자랑스런 불교근본주의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26. 07:52

 

나는 자랑스런 불교근본주의자

 

 

한번 견해가 형성되면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집착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집착단계가 되었다는 것은 고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오공본드’와 같은 것이다.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금계에 대한 집착, 자아의 견해에 대한 집착, 이렇게 네 가지의 집착이 있다. 그런데 무려 세 가지가 견해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길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얼굴이 바뀌지 않듯이, 한번 형성된 성향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경계에 부딪치면 또 그 성질이 나오는 것도 고착화된 집착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살불살조에 대한 글을 보았다. 어느 재가수행자가 쓴 글이다. 충청도 사투리로 유머러스하게 쓴 글이 특징이다. 그는 새끼개들이 어미젖을 빠는 동영상을 올리고서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여야한다고 했다. 약한 새끼는 도태되고 강한 것만 살아남는 축생의 세계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어쩔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탐, 무진, 무치를 얘기한다면 부처를 죽여도 좋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강한 혐오가 일어났다. 부처님은 오온을 설했는데 축생의 세계에까지 확장하여 살불을 얘기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부처를 능멸하는 것이 대승?”이라고 짤막하게 댓글을 썼다. 예상했던대로 시니컬한 태도와 함께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불교에는 근본가르침이 있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이런 근본가르침은 오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아 아니다. 인간, 즉 오온을 떠나 우주 등 다른 것에 관심 갖지 않았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이 큰 관심사였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고와 고소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다름아닌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고소멸은 도성제로 가능하기 때문에 팔정도를 수행해야 한다.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이고,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가 되는 것이다.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말이다. 살벌한 말이다. 더 살벌한 말이 있다. ‘부처개밥론’이다. 아기부처가 일곱발을 내딛고 탄생게를 읊은 것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았다면 잡아서 으깬다음 개밥으로 줄 것이라고 했다.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언어화된 개념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운운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 전통에서는 모두 때려 죽여야 할 대상이 된다.

 

살불살조론은 극단이다. 부처개밥론은 반지성적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방과 할로만 교화하려 한다면 폭력적이다. 이처럼 반지성적이고 폭력적인 살불살조론의 원형이 법구경에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Dhp.294)

 

 

부모를 살해하는 것은 무간죄를 짓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다고 했다. 마치 살불살조를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머니는 갈애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자만을 상징한다. 게송에서 어머니를 죽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가 사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애가 세 가지 세계[三界: tiloka]의 존재를 낳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것은 “ ‘내가 있다는 자만’은 ‘나는 이러이러한 왕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주석을 보면 살불살조론과 다르다. 무엇보다 초기경전에서는 살불살조와 같은 살벌한 말을 쓰지 않는다.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개념타파를 강조한다고 해도 금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 특히 중국불교에서는 부처를 능멸하기 일쑤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야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살불살조론이나 개밥론을 보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외도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한번 견해가 형성되면 바꾸기 어렵다.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에게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얘기해 보았자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함빠띠의 청원에 대하여 먼저“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ye sotavante Pamuccatu saddhaṃ)”(S6.1)라고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들이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형성되어 있는 신앙이나 사상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절에가면 일주문이나 법당 주련에 쓰여 있는 “이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와 같은 것이다. 이 산문이 들어 오려거든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사상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기존 견해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데 새로운 견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이런 경우 일단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수용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이기 때문에 탐, 진, 치로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이 받아 들이기 힘들다.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를 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기존 견해를 버리거나 내려 놓아야 한다. 신앙이나 사상은 공존하기 힘든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과 외도가 대화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외도와 대론에서 문답식으로 외도의 견해를 부순다. 마침내 외도가 무릎 꿇고 제자가 되겠다고 간청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즉각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주었다. 일종의 ‘사상의 세탁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재가불자들과는 다른 것이다. 외도의 경우 견해가 굳건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청소년포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마치 도화지 같은 흰여백을 가졌기 때문이다.

 

살불살조론은 극단이다. 반지성적이고 패륜적이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면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 된다. 법구경에 부모살해 게송은 있지만 부처살해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개념을 타파한다고 하여 부처살해를 말한다면 모순이 된다. 불교인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인이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부정하는 듯한 살불살조론으로 불교근본주의를 비판한다면 견해에 집착된 것이다. 그리고 무간업을 짓는 것이 된다. 초기불교에서 견해는 육무간업중의 하나이다. 부모살해 등 오무간업에 견해 하나가 더 추가되어서 육무간업이 되는 것이다.

 

육무간업중에서 최악은 견해이다. 견해에 집착되면 한우주기가 지나도 빛도 들어가지 않는 사이지옥(lokantariya)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했다.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금계에 대한 집착, 자아의 견해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부모살해 보다 더 무거운 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도 집착이다. 법구경에서는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Dhp.294)로 표현되어 있다. 견해 중에서도 양극단인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두 왕으로 보고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합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불살조와 같은 패륜적이고 부처를 능멸하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살불살조론을 비판했더니 졸지에 불교근본주의자로 몰렸다. 그러나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슬람원리주의나 기독교근본주의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지만 불교근본주의는 평화로운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평화와 행복에 대한 것이다. 그 어디에도 죽이거나 파괴하라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면 이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세상에서도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륜왕이라 일컬어지는 아소까대왕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하여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즉 담마위자야(Dhamma vijaya)를 천명했다.

 

불교근본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니까야를 소의경전으로 하는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갖가지 견해가 난무한다. 제목소리를 내는 것이 깨달은 자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가르침을 벗어난 말은 모두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반지성적이고 폭력적인 말을 예사로 한다. 심지어 부처를 능멸하기까지 한다.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면 헛소리를 하지 않게 된다.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자랑스런 불교근본주의자이다.

 

 

2020-05-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