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 08:36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

 

 

매월 월말은 결재하는 날이다. 주어야 할 돈이다. 흔히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줄 돈은 천천히 주어라.”라는 말이 있다. 임대료, 매입대금 등 주어야 할 돈은 월말에 결재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5월도 끝자락인 31일, 그것도 저녁에 결재했다. 그 중에 라이센스 비용도 있다.

 

라이센스 지불비용이 이제 한번 남았다. 한달후가 되면 자유가 된다. 작년 3월 이후 매달 백만원씩 열네 번 냈다. 이제 한번 남겨 둔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수입은 일정치 않고 벌이는 시원치 않은데 매달 백만원을 마련해야 하니 너무 힘들었다. 버는 족족 나갔고 그것도 부족해서 예금통장을 깨야 했다. 입출금 통장은 마이너스통장이 되어 월말이면 늘 한도에 육박했다.

 

매월 백만원씩 생돈 나가다시피 했다. 열네 번 나간 돈을 생각해 본다. 매달 백만원씩 보시를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도 최상의 보시바라밀을 실천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십바라밀에서는 세 단계가 있다. 가장 낮은 단계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중간단계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보시하는 것이고, 가장 높은 단계는 목숨을 보시하는 것이다. 백만원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면 가장 높은 단계의 보시바라밀행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백만원을 보시한 적이 없다. 만일 생명과도 같은 백만원을 누군가에게 무주상보시한다면 큰 공덕이 될 것이다. 이번에 백만원씩 열 네번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면서 느낀 것은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보시할 수 있고 생명과도 같은 것을 보시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보시는 여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만 할 때 약간의 돈으로 생색낸다면 인색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베풀지 않는다. 호의호식하며 살지만 베푸는 데는 인색한 것이다. 한마디로 보시하는데 게으르다고 볼 수 있다. 보시를 하면 명예, 성취, 행복을 가져옴에도 게으른 것이다.

 

인색한 자는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한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이다. 보시에 인색한 것이 마치 아귀와도 같다. 인색한 자는 부유해도 늘 굶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다. 그래서 베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조금 있어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도 죽지 않는다.”(S1.32)라고 했다. 참으로 난해하고 심오한 말이다. 주석에 따르면 “인색한 자가 소유한 것은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의 것과 같다.”(Srp.I.58)라고 했다. 마치 잉여재산과도 같다.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는 자산이다. 아무리 땅이 많고 건물이 많아도 이는 장부상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 사람 것이나 다름없다. 직접 활용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없는 것과 같다. 현금이 아무리 많아도 은행에만 있다면 이는 은행 것이나 다름없다. 돈을 운용하는 사람의 것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사용하지 않으면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인색한 사람에 대하여 “죽은자”와 같다고 했다.

 

베풀지 않으면 재산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색한 자는 죽은자와 같다. 베풀면 재산이 있는것이 되고, 베푸는 자는 살아 있는 자와 같다. 그런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아낌없이 보시하면 재벌이 보시한 과보와 맞먹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조금 있어도 베풀고

어떤 사람은 많아도 베풀지 않으니

조금 있어도 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하게 헤아려지네.”(S1.32)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에 따르면, 축생에게 먹을 것을 주면 백배의 갚음이 있고, 부도덕한 자에게 보시하면 천배의 갚음이 있다고 했다. 가난한 자가 조금이라도 보시하면 그 금액은 재벌이 보시한 것 못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장 아끼는 것을 보시했을 때는 상상을 초월한 보시가 된다. 그것도 청정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보시했을 때는 그 과보를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색한 자는 호의호식해도 베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늘 굶주린 자와 같다. 최악은 단멸론자이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를 말한다. 단멸론자는 보시에 대해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고 현자는 취한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보시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보시하여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 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한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으로 보는 것이다.

 

보시는 조금 있어도 하는 것이다. 또 보시에 대하여 “조금 있어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저 세상에서 안락하게 되리.”(S1.33)라고 했다. 보시는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어떤 믿음인가? 주석에 따르면 “그 행위와 과보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Srp.I.58)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그것이 악행이든 선행이든 과보로서 산출됨을 말한다. 다만 익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업이 달리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고 한다. 업보는 금생에 받을 수도 있고, 내생에 받을 수도 있다. 보시를 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반드시 선과보를 받는다. 임종순간에 떠 올랐다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보시는 현명한 자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과거에 출현했던 부처님들은 한결 같이 업과 업의 과보에 말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부정한다.”(A3.135)라고 했다.

 

가난한 자의 보시는 큰 공덕을 가져온다. 탁발승에게 밥한덩이 보시한 과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보시도 살펴서 하라는 것이다.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잘 살펴서 보시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펴야 할까? 주석에 따르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잘 살펴서 하는 보시 하나는 ‘보시물이 훌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등한 보시물을 피하고 수승한 보시물을 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때로 목숨까지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살펴서 하는 보시 또하나는 ‘보시를 받는 자가 훌륭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행이나 덕행을 갖춘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더 좋은 것은 살펴서 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시공덕 보다 더 수승한 공덕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나아가서 뭇삶에 대한 자제도 좋은 것입니다.”(S1.32)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뭇삶(衆生)에 대한 자제는 무슨 말일까? 이는 다름아닌 계율에 대한 것이다. 불살생계를 포함한 오계를 지키는 것이 보시하는 것보다 더 수승함을 말한다.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라는 뜻이다.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보시가 먼저 나오고 지계가 나중에 있다. 보시보다 지계가 더 수승함을 말한다.

 

보시보다 더 수승한 것이 지계이다. 만일 지계가 되어 있지 않은 자가 보시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뭇삶에 대한 자제가 없는 사람의 보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부정하게 살면서 보시하니

상처내고 죽이고 또한 괴롭히네.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니

올바른 보시로서 가치가 없고

천사람이 바치는 십만의 재물조차도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분의 일의 가치도 없다.”(S1.32)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등 오계를 어긴 보시자가 있다. 단지 생색내기용 보시고 이미지 세탁용 보시이다. 이를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보시라고 했다. 설령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많다고 해도 가난한 자가 능력껏 아낌없이 보시한 것보다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보시로서 가치가 없음을 말한다.

 

여법하게 번 것을 능력껏 보시하고, 믿음으로 보시하고, 살펴서 보시하라고 했다. 보시보다 더 수승한 것이 지계공덕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보시공덕보다도 지계공덕보다도 더 수승한 공덕이 있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이를 말해 준다.

 

 

“믿음으로 베풀면 갖가지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훌륭하네.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한 참사람,

지혜로운 자는 모두 열반에 들었네.”(S1.32)

 

 

불교인들에게 요청되는 크게 세 가지 공덕이 있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수행공덕을 강조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지만 수행공덕은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다시는 나고 죽는 일 없는 열반에 이르게 하는 수행공덕이야말로 최상의 공덕임을 말한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dhammapada)’을 따르는 것이 훌륭하다고 했다. 여기서 진리의 말씀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서른일곱 가지 원리(37조도품)을 말한다.

 

불교인이라면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이 중에서도 수행공덕이 가장 수승하다. 그렇다면 왜 수행을 해야 할까? 궁극적으로는 해탈과 열반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을 향상하고 성장시키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수행을 뜻하는 ‘바와나(bhāvanā)’라는 말과 관련 있다.

 

수행에 대하여 ‘명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영어 ‘meditation’을 번역한 말이다. 수행이 명상일 수 없다. 무언가 면밀히 생각한다는 명상이라는 말이 수행은 아닌 것이다. 명상이라는 말은 다리 꼬고 앉아서 좌선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 수행이라는 말은 ‘닦음’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한자어 수행을 뜻풀이 한 것이다. 그래서 마치 더러워진 거울을 닦듯이, 더러워진 마음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청정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염되었기 때문에 깨끗이 닦아서 본래모습을 보자는 것이다.

 

수행을 뜻하는 바와나는 명상이나 닦음과는 뜻이 전혀 다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한국빠알성전협회 전재성회장은 바와나에 대하여 영어의 ‘becoming’의 뜻으로 설명했다.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바와나는 ‘되어감’을 뜻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되는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변화라고 했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고 하여 좌선을 해보지만 변화가 없다면 단지 앉아 있을 뿐이다.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앉아 있어도 변화가 없으면 수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수행을 하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단계적 깨달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야 한다. 그 다음 부터는 수행도이다. 사다함과 아나함단계를 말한다. 최종적으로 더 이상 닦을 것도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무학도 단계가 있다. 아라한의 단계를 말한다.

 

수행을 하여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이렇게 수행은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매달 라이센스 비용으로 백만원씩 열네 번 냈다. 이제 한번만 더 내면 해방이다. 이 돈을 보시했다면 굉장한 보시가 됐을 것이다. 아직까지 이만한 액수를 보시한 적이 없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백만원씩 보시하고 싶다.

 

보시할 때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보다는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마치 가난한 자가 탁발승에게 직접 공양하는 것과 같다. 만약 단체에 기부한다면 피해자나 소외자들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 대부분 단체의 인건비나 운영비로 사용될 뿐 전달되는 금액은 미미하다. 그래서 보시하려거든 직접해야 한다. 그것도 살펴서 해야 한다. 계행과 덕행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그런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이 아니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해 부정하는 자들은 “보시는 바보나 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행위의 과보를 믿는다. 그래서 믿음으로서 보시한다. 보시는 현명한 자들이 하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초보자라면 보시공덕 부터 쌓아야 한다. 능력껏 아낌없이 보시하는 것이다. 나중에 남는 것은 보시공덕 밖에 없다. 그래서 보시공덕에 대하여 저세상으로 가는 든든한 노잣돈이라고 했다. 나는 약속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2020-06-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