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라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22. 11:01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라서

 

 

수많은 사람을 접한다. 지나쳐 가는 사람도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반드시 역술인만 아는 것이 아니다. 상태를 파악하는데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사람의 행동거지에 그사람의 상당부분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또 그사람의 얼굴을 보면 현재 삶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알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을 때이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은 일반사람들을 알아본다. 겉모습으로도 알 수 있지만 말한마디만 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것도 긴 시간 이야기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일반범부는 수다원의 마음을 모르고, 수다원은 사다함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따지고 가다 보면 부처님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적 영역에 대한 것이다.

 

한번 보고서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보다 정신연령이 높은 사람일 수 있다. 알아보려면 질문할 수밖에 없다. 질문이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질문의 수준을 보고서 그 사람의 현재가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수행점검할 때 질문이 그 사람의 현상태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질문은 그 사람이 체험한 것이나 경험한 것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 두 고수가 있다. 두 고수 중에 어느 쪽이 더 고수인지 아는 방법이 있다. 한눈에 겉모습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질문하는 것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는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S3.11)라고 했다.

 

TV에서 종종 토론하는 모습을 본다. 한때 백분토론을 열심히 보았다. 많이 배우고 학식도 높고 많은 경험을 한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일반사람들과 다르다. 일반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가 하면 대안도 제시한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우열은 어떻게 판가름날까? 토론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바라이죄가 있다. 이를 승단추방죄라고 한다. 놀랍게도 승단추방죄 중의 하나가 깨달음사칭이라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자가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선정에 들지도 못했으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말하는 자,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했음에도 수다원이라고 말하는 자도 역시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다. 이는 인간을 초월한 것이다. 초월의 경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 자체를 사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사칭에 대하여 대망어죄로 본다.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로 본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 중에도 우열은 있을 것이다. 이는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오염원에 따라 단계가 있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를 맛보았음에도 아직 소멸해야 할 번뇌가 남아 있어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분토론하듯이 서로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면 지혜가 어는 단계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다나에서 ‘결발고행자의 경’(Ud.64)을 보면 이교도들이 논쟁하는 장면이 있다. 빠세나디 국왕은 일곱 이교도 그룹을 초청했다. 그들은 저마다 거룩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왕은 그 경지를 알 수 없다. 그러자 부처님은 빠세나디 국왕에게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 국에서 나는 전단을 쓰고 화환과 향수의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 어렵습니다.”(Ud.64)라고 말했다.

 

일반사람들은 수행자의 마음을 알기 어렵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 보다 못한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행색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파악하는데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이교도들이 국왕 앞에서 스스로 거룩한 자라고 말하지만 왕은 그가 거룩한지는 알 수 없다. 왕은 세속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지혜가 있는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 마치 백분토론 하는 것처럼 오래 토론하다 보면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논의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고요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A4.192)

 

 

학교 다닐 때 보면 질문 잘하는 친구가 공부도 잘 했다.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질문하는 것이다. 모르면 질문할 수 없다.

 

그 사람을 파악할 때 질문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진만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만 보고서 그 사람의 미래나 운명을 파악하려 한다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사진이 진실일 수 없다. 사진은 순간 포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알려면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승이 말하는 답은 나와 있다. 수행처에서 수행점검 받을 때 스승은 질문하는 것에 대하여 답을 말해 준다. 그러나 질문은 천차만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질문은 개성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현수준이 질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질문하는 것 하나만 보고서도 지혜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2020-06-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