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가 잘 되려면
한국불교가 잘 되려면
한국불교는 중흥할 수 있을까? 그 옛날처럼 불국토를 다시 만들 수 있을까? 현재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다.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기독교에게 신도수에 있어서 1위 자리를 내 주었다. 천주교와는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2위도 위협받고 있다. 이런 하향 추세라면 3등종교로 전락할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스님은 신도탓으로 돌리고 있다. 타종교 신자들은 헌금도 열심히 하고 신앙심도 깊은데 반하여 불자들은 시주도 게을리하고 신심도 없다고 말한다. 어떤 스님은 타종교의 성직자가 부럽다고 했다. 정말 불교신자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한국불교가 중흥하기 위해서는 스님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을 승보라고 칭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스스로 승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한다. 머리 깍고 승복만 입으면 승보로 간주 되어서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가 추락하게 된 것은 스님들의 문제가 크다. 승보로서 대우만 받으려 할 뿐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스님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과 전법이다. 이 두 가지를 하지 않으면 스님으로서 직무유기가 된다.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해야 한다. 두 가지를 다 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안거철에는 수행을 하고 해제철에는 전법을 하는 것이다. 안거는 일년에 한번만 하는 것이 좋다. 일년에 두 번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일년에 한철, 즉 여름에 3개월만 안거를 하고 나머지 9개월은 포교에 전념하는 것이다. 이런 스님들을 존중해야 한다.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비난 받는다. 스님들이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 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본래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조금만 허물이 있어도 비난 받는다. 하물며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스님들에게 허물이 발견 되었다면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이다. 수행자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작은 허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율장은 세상사람들의 적극적인 비난이 있었기 때문에 성립되었다. 이는 동료수행자나 재가불자들의 비난도 포함된다. 율장소품을 보면 “한때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마치 게송을 운율을 너어 고저장단으로 읊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노래 형식으로 읊는 것은 문제가 된다. 율장소품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재가불자도 해당된다. 사람들은 “어찌 싸끼야의 아들인 수행자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혐책하고 비난하고 분개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들은 적절하지도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찌 그 어리석은 자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 할 수 있단 말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Vin.I.108)
스님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종종 본다. 감정을 넣어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진지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지만 전문 가수에 미치지 못한다. 스님이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전문화가가 보면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춤을 추는 것도 그렇다. 흉내만 낼 뿐이다. 스님은 스님이 해야 할 본업이 따로 있는 것이다. 본업인 수행과 포교를 내버려 두고 세상사람들도 하찮게 여기는 것에 올인한다면 출가승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은 “모가뿌리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 어리석은 자여”라는 뜻이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출가승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에 몰두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허물도 크게 본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허물을 보면 비난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고저장단 음조를 넣어 읊는 것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출가승이 노래하는 것에 대하여 “1) 자기가 그 음성에 집착하고, 2) 다른 사람이 그 음성에 집착하고, 3) 재가자들이 비난하고, 4) 음조를 추구하여 삼매를 방해하고, 5) 후인들이 사견의 길에 떨어지는 것이다.” (Vin.I.108)라고 했다. 한마디로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해서는 안된다. 노래하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했다.
출가승이 노래하면 죄가 된다고 했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춤도 추어서는 안되고, 그림을 그려서도 안되고, 음식을 만들어서도 안된다. 이렇게 세세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 율장이다. 율장은 수범수제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를 지으면 제도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세상사람들의 적극적인 비난이 있었다. 물론 동료 수행자들의 비난도 있었고 재가불자들의 비난도 있었다.
한국불교가 잘 되려면 재가불자들의 적극적인 비난이 있어야 한다. 스님에게 허물을 보면 지적해야 한다. 때로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비난이 있어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스님은 인터넷에 적극적으로 비난하라고 했다. 한국불교는 잘못을 감추기 때문에 더욱 더 타락의 길을 가고 있다고 했다. 보아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비난을 해야만 개선된다는 것이다.
2020-07-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