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연의 리듬대로 사는 소욕지족의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21. 10:02

 

자연의 리듬대로 사는 소욕지족의 삶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손해나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종 모임이 있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참가한다. 무언가 건질 것이 있어야함을 말한다. 이익 되는 것이 없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시간과 화폐와 정력의 낭비이다. 누군가를 찾아 가는 것도 그럴 것이다.

 

현묘재를 향하여

 

개심사 보현선원에서 대중공양을 마치고 귀가길에 이학종선생 집에 들렀다. 서산과 당진은 이웃해 있어서 마실 가는 것과 같다. 거리로 20키로 이내로 차로 20분 이내에 있다. 먼저 전화로 연락을 했다. 흔쾌히 오라고 했다.

 

불가에서 회자되는 말이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찾아 가겠다고 말하면 대부분 오라고 한다. 설령 누추한 곳이라고 해도 찾아가는 사람은 손님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손님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일부러 찾아 주는 것이 고마운 것이다. 시간과 화폐와 정력이 소요되는 방문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 간다면 주저할 것이다. 방문판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방문에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없다. 누추하면 누추한대로 손님을 맞으면 된다.

 

이학종선생의현묘재는 이전에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때도 지나가던 길에 들르는 식이었다. 근처 행사가 있어서 차나 한잔 얻어 마실 겸 도반들과 함께 간 것이다. 이번 현묘재 방문은 두 번째이다.

 

 

()를 마시면서

 

현묘재는 멋 있는 집이다. 그리고 잘 지은 집이다. 주변환경과 무리가 없다. 단층집으로 야트막한 지형과 잘 어울리는 친환경적 건축물이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 가면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내부는 너른 공간이 특징이다. 좁은 곳에서만 살다가 넓다란 거실에 들어서니 운동장 같다. 더구나 천정은 높아 뻥 뚫린 것같은 느낌이다. 커다란 원목대들보가 있어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방은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다. 서재도 있고 다실도 있다. 손님이 오면 자고 갈 방도 있다. 바깥의 농촌풍경과 달리 집안에 들어가면 도시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요즘 보기 드문 잘 지은 명품이다.

 

 

이학종선생 부부와 셋이서 차를 마셨다. 최고급 차를 내왔다. 손님 왔을 때만 내온다는 동춘차이다. 차의 명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차는 대화의 매개체가 된다. 차를 매개하여 대화가 무르익는다. 팽주는 건네고 손님은 받아 마신다. 술좌석이라면 술을 건넬 것이다.

 

술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마신다. 그러나 마시면 마실수록 취한다. 마실수록 정신은 흐리멍덩해진다. 횡설수설하여 실수하게 될지 모른다. 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맑아진다. 배가 뜨뜻해지고 빵빵해지도록 마시면 화장실에 가게 된다. 모든 노폐물을 다 씻겨내는 것 같다. 차를 마시면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은둔자의 삶

 

누구나 한번쯤 귀촌을 꿈꾼다. 모든 것을 접고 풍광 좋은 곳에서 시골살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촌과 귀농은 다른 것이다. 귀촌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귀농은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풍광좋은 곳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는 꿈을 꾸어 본다. 그러나 도시에서 편리한 삶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집안에서 하루종일 할 일 없이 있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주말에 잠시 머물 수는 있을 것이다. 준비 안된 자에게 시골살이는 감옥과 같을 것이다.

 

시골살이는 일종의 은둔과도 같다. 번잡한 도시에서 멀리 떠나 인적 없는 곳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은둔인 것이다. 요즘 종편에서 볼 수 있는자연인과 같은 삶이다.

 

자연인은 대부분 혼자 산다. 깊은 산중에서 수도승처럼 살기도 하고 신선처럼 살기도 한다. 혼자 살다 보니 자급자족해야 한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한다. 자연인들 대부분 말하기를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소욕지족(少欲知足)’일 것이다.

 

소유지족과 유사한 말이 있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 료안지(龍眼寺) 약수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오유지족은 소욕지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부분 욕망으로 산다.

 

크건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해야

 

요즘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 강남의 어떤 아파트는 평당 1억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미친가격이라고 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집없는 사람이나 서민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PD 수첩에서 어떤 이는 아파트값만 생각하면 밥맛이 없어요.”라고 했다.

 

강남아파트 값을 생각하면 밥맛이 없는 세상이다. 미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쳐다 보지도 않는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는 삶을 그만이다. 소욕지족의 삶이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소욕지족을 강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족하는 삶이다. 만족하는 삶을 살려면 소유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족함을 하는 것이다. 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행복지수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행복지수공식이 있다. 만족은 욕망분의 소유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만족=소유/욕망이 된다. 행복지수공식을 보면 소유가 늘어날수록 만족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소유하기가 쉽지 않다. 돈이 마음대로 벌려지지 않는다. 건물주가 되고 싶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다. 이럴 경우 욕망이 증대된다. 소유는 변동이 없는데 욕망만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행복지수는 내려 갈 것이다. 욕망이라는 분모가 크면 클수록 불만이 증대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크건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의 행복이 있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행복이 있다.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는 것이다.

 

더 만족한 삶, 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유는 그대로 놓아 두고 욕망을 극소화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한다. 욕망을 완전히 버리면 어떻게 될까? 비록 한끼를 먹어도 만족한 삶이 될 것이다. 수행자의 삶이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세상사람들은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다. 도둑질과 같은 행동을 하고서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 등으로 거액의 불로소득을 챙긴 자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소유하려고 한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천만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Dhp.186)라고 했다.

 

수행자는 만족한 삶을 산다. 하루 한끼만 먹고 초막에 기거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산다. 그것은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욕망을 극소화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과 관계 없이 행복지수가 높아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초암의 지붕은 이어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쾌적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마음은 잘 집중되어 해탈되었고,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Thag.1)

 

 

수부띠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수행자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지붕이 잘 이어진 초막에서는 비바람이 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라며 기개 있게 읊었다.

 

게송에서 초암은 꾸띠(kuti)를 번역한 말이다. 수행처에서 보는 숙소가 꾸띠에 해당된다. 이를 초암, 초막, 오두막집, 토굴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서 꾸띠는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그런 몸은 어떤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몸이란?

 

이 몸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유일신교 신도라면 창조주를 원인으로 할 것이다. 요즘 일반사람들이라면 부모에게서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르게 본다. 부처님은 이 몸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이에게도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러한 몸이 생겨나고 외부에 명색이 주어진다.”(S12.9)라고 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몸인 것이다.

 

이 몸은 부모에게서 온 것은 맞다. 더 따지고 들어 가다 보면 이 몸은 무명과 갈애에서 온 것이다. 업에 의해서 생긴 몸이다. 이런 몸은 배에 비유되기도 하고 집에 비유되기도 한다.

 

몸을 배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수행승이여, 이 배의 물을 퍼내라. 물을 퍼내면 그대를 위해 가볍게 할 것이다.”(Dhp.36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후속 게송에서 알 수 있다. “탐욕과 성냄을 끊어버리면 그대는 열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구절이다.

 

배가 대양을 항해하고 있다. 그런데 배에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바가지 등으로 퍼내야 할 것이다. 배의 무개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물이 차서 가라앉게 될 것이다.

 

물을 퍼내서 배를 가볍게 하면 가라앉지 않고 항구로 신속하게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통해서 시각기관 등의 감관의 출구를 제어하고 배를 가볍게 만들면, 윤회의 바다에 가라 앉지 않고 열반을 향해 빨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주석에서의 설명이다.

 

몸을 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Dhp.154)라고 했다.

 

또 몸은 수레에 비유된다. 이는 부서진 곳 없이 하얀색 지붕을 이은, 수레가 한바퀴 구른다. 흐름을 끊고 속박없이 근심없이 오는 자를 보라.”(S41.5, Ud.76)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몸은 동굴로도 비유된다. “동굴에 집착하고, 온갖 것에 덮여있고, 유혹 속에 빠져 있는 자, 이러한 사람은 멀리 여읨과 거리가 멀다. 참으로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버리기 어렵다.”(Stn.772)라고 했다.

 

몸은 배, , 수레, 동굴로 비유된다. 또 몸은 초암에 비유된다. 지붕이 잘 엮어진 초암에서 비가 와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가 올 테면 오라고 했다.

 

게송에서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다는 것은 증상계학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잘 집중 되었다는 것은 증상심학에 대한 것이고, 해탈되었다는 것은 증상혜학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삼학을 닦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버려졌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라고 한 것이다.

 

시골살이나 도시살이나

 

나에게도 초막이 있다. 사무실이 나의 초막이다. 사무실은 초암이고, 꾸띠이고 오두막이고, 토굴이고, 아지트이다. 사무실에 있으면 마치 시골에 있는 것 같다. 문을 닫아 놓고 홀로 있으면 지리산 산골에서 홀로 사는 자연인 같다.

 

 

사무실에 수행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약 세 평 되는 공간이다. 칸막이를 해서 만든 것이다. 바닥에는 카페트를 깔아 놓았고 법당에서 볼 수 있는 푹신한 방석도 있다. 틈만 나면 앉아 있는다. 또 틈만 나면 행선을 한다. 도심 속에 있는 오피스텔이지만 홀로 있다 보면 심산유곡에서 사는 은둔자와 같다.

 

 

산중 분위기를 내고자 식물을 많이 기르고 있다. 주로 열대식물이다.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 또 잘 죽지 않는다. 사시사철 열대우림의 초목을 보는 것 같다. 고무나무, 행운목, 홍콩대엽야자 등 각종 열대식물을 보면 미얀마 선원에서 꾸띠에 있는 것 같다.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도시에서 살지만 지리산 산중 꾸띠에 사는 것처럼 꾸며 놓을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또 다른 세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풍요로운 초원이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라고 했다. 왼쪽 길이 아닌 바른 쪽 길로 주욱 가면 열반의 초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또 눈을 감고 있으면 아름다운 도시에 이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숲에서 어떤 길을 발견하여 그길을 따라 가보니 마침내 그 도시에 이르러 기쁨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는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S12.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팔정도의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열반이라는 고대도시를 발견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소유에 만족하는 삶이다. 소유가 많건 적건 간에 욕망을 줄이면 더 만족스런 삶을 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이 가르침은 욕심이 없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욕심이 많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A8.30)

 

 

부처님은 행복을 설하기 보다는 만족을 설했다. 만족하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만족은 소유와 무관하다. 소유가 많건 적건 간에 소유에 만족하면 행복인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욕심이 없는 자[小慾]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만족할 줄 아는 자[知足]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시골살이나 도시살이나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시에 살아도 시골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고, 시골에 살아도 도시에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 만족하는 삶을 살면 도시살이나 시골살이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 시골살이하고플 때가 있다.

 

자연의 리듬대로 사는 소욕지족의 삶

 

시골살이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일종의 포기하는 삶을 말한다. 시골에 살면 포기할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를 내려 놓는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무언가 꽉 붙들고 있다면 시골살이 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때 도시를 떠날 것이다. 도시의 삶에 미련이 없을 때 스스로 은둔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은둔자가 될 필요가 있다. 반드시 가족과 함께 할 필요는 없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지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은둔자에게는 비바람과 찬이슬을 막을 수 있는 거처면 충분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꾸띠이고 토굴이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사회에서는 사주기가 있었다. 이를 바라문인생사주기라고 하는데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를 말한다. 은퇴한 사람이 시골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은둔자처럼 사는 것은 바라문인생사주기에서 임서기에 해당될 것이다.

임서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가주기의 삶을 산 가장이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고 숲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이에 따르면 손자가 태어날쯤이라고 한다.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손자가 태어날 때 집을 떠나 숲에 산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식 시집장가 보내고 시골살이 하는 것과 같다.

 

임서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은퇴자가 많다. 가장으로서 해야할일을 다해 마치고 은둔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요즘말로 자연인이다. 특징은 소욕지족이다. 또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특징이다. 자연의 변화와 함께 자연의 리듬대로 사는 소욕지족의 삶이다. 그런 모습을 이학종선생 부부에게서 보았다.

 

 

 

2020-07-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