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불교는 빛의 종교
어둠에서 빛으로, 불교는 빛의 종교
역사적으로 큰 사건에 대하여 경천동지한다고 말한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는 사건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하는 사건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불교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니까야를 보면 일만세계가 진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은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아난다여,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났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크고 텅 비고 어둡고 캄캄한 심연의 사이 세계가 있는데, 그곳에도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25)
아난다는 부처님에 들었던 이야기를 수행승들에게 해 주었다. 그것은 과거 부처님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거 부처님, 즉 과거칠불은 공통적으로 태어날 때 진동과 빛이 있었다. 이는 고따마부처님도 마찬가지이다.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광대한 빛이 나타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교에서 경천동지할 사건이 몇 개 있다. 경에서는 보살이 입태할 때와 태어날 때에 경천동지와 함께 광대한 빛이 비춘다고 했다. 진동과 빛이라는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우주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우주가 진동하고 우주 가득히 빛이 나왔을 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
진동과 빛은 모두 부처님과 관련이 있다. 모두 네 가지가 있다. 보살이 입태했을 때, 보살이 태어났을 때, 부처님이 무상정득각을 이루었을 때, 그리고 최초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이다. 그런데 진동과 빛 두 가지 현상이 있는 경우는 보살의 입태, 보살의 탄생, 부처님의 초전법륜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에는 어땠을까?
앙굿따라니까야 ‘아주놀라움의 경’(A4.127)에 따르면 빛만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보살의 입태, 보살의 탄생, 부처님의 성도, 부처님의 초전법륜과 같은 세 가지 사건에 대하여 빛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일만세계의 진동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을 때에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측량할 수 없는 광희로운 빛이 출현한다. 무시무시하고 바닥이 없고 암흑으로 덮여있고 칠흑같이 어두운 사이지옥에는 큰 신력과 큰 위력을 지닌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는데 , 그곳에도 측량할 수 없는 광휘로운 빛이 출현한다. 그곳에 태어난 뭇삶들은 그 빛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고 부르짓는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님이 출현할 때에 이와 같은 세 번째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이 출현한다.(A4.127)
경에서는 오로지 빛만 설명되어 있다. 진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빛은 사이지옥에까지 비춘다고 했다. 사이지옥이란 무엇일까? 이는 로깐따리까(lokantarika)를 말한다. 영어로는 ‘situated between the worlds’라고 한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는 지옥을 말한다.
사이지옥, 로깐따리까(lokantarika)에 대하여
로깐따리까에 대한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불교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는 원반모양의 철위산(cakkavāḷa)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대부분은 물에 잠겨 덮혀 있고 북남동서로 네 개의 대륙이 있다. 이 우주에는 이러한 세계가 무수하게 있다. 이 세계가 셋이 둘레가 합하여 하나의 삼각시스템을 형성하고 그 삼각 시스템 사이에 사이지옥이 있다.(앙굿따라니까야 4권, 505번 각주)
우주에는 빛도 들어가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세계와 세계사이에 있는 틈바구니를 말한다. 이러한 사이지옥에는 누가 가는 것일까? 오무간업을 지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고,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고, 아라한의 목숨을 빼앗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흘리게 하고, 승가를 분열시키는 중죄를 저지른 자들을 말한다.
견고한 견해를 가졌을 때도
사이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은 오무간업만 지은 자들이 아니다. 견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도 이에 해당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에 따르면, 오무간업에 사견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그래서 육무간업이라고 했다.
견고한 사견, 즉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사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사이지옥에 태어난다. 그것도 한우주기가 지나도 구제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파옥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 “지옥에 있는 중생 가운데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에 취착하는 중생들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다른 세계의 시스템들 사이의 틈에 존재하는 악처에 떨어진다.”(346쪽)라고 했다.
사견을 가져도 사이지옥에 떨어진다. 한번 사이지옥에 떨어지면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일겁이 지나도 구제 받지 못한다. 사이지옥이기 때문에 빛의 사각지대라서 빛이 전혀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런데 빛이 들어 올 때가 있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다. 입태, 탄생, 성도, 초전 이렇게 네 가지 큰 사건이 있을 때 비로소 빛이 들어 온다.
사이지옥 중생들은
사이지옥에 빛이 들어 온다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부처가 출현할 때 빛이 들어 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의 출현은 때로 몇십겁이 걸릴지 모른다.
과거칠불 중에서 위빳시붓다는 91겁 전에 출현했다. 시키붓다는 31겁전에 출현했다. 공백이 무려 60겁이나 된다. 한번 사이지옥에 빠지면 부처가 출현하지 않는 한 빛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이지옥에서는 옆에 동료가 있어도 안식이 없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여 사이지옥에도 빛이 들어 갔을 때 안식이 생겨서 “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며 동료를 비로소 보게 된다.
부처가 출현했다고 하여 빛이 계속 비추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날 비춘다. 빛이 비추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데 “우리가 큰 고통을 겪듯이 다른 중생들도 참으로 여기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겪는구나.”(MAT.ii.336)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이 빛은 한 번 죽을 마시는 시간만큼도 지속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대상을 알아차리는 시간만큼만 지속된다.”(MA.iv.178)라고 했다.
진동과 빛은 어느 경우에
불교에서는 사대성지가 있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 성도, 초전, 그리고 열반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탄생과 초전은 일만세계의 진동과 광대한 빛의 현상이 있다. 깨달은 순간에 대해서는 빛만 보인다. 열반의 순간에 대해서는 진동만이 있다.
진동과 빛을 모두 만족하는 경우는 세 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보살의 입태와 보살의 탄생, 그리고 초전법륜이다. 보살의 입태와 보살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D123)과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에 언급되어 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에 대해서는 ‘상윳따니까야 가르침의 수레바퀴의 경’(S56.11)에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과 관련하여 네 가지 큰 사건은 탄생, 깨달음, 초전법륜, 그리고 열반이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모두 다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불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순간에 대해서 니까야에서는 진동과 빛이 함께 묘사 되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다만 개별적으로 묘사된 것은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아주 놀라움의 경’(A4.127)에서는 빛만 묘사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여래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곧바로 원만히 깨달았을 때, 이 땅이 흔들리고 진동하고 요동한다.”(D16.67)라고 하여 진동만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역사는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불기가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준으로 하여 불기라고 한다. 부처님의 탄생이 아니다. 부처님이 열반한 해부터 불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불기는 잘못된 것이다. 불기는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 것임에도 탄생만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 열반을 동시에 기념한다. 그래서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 불기는 문제가 없다.
니까야에서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묘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열반한 순간에 대하여 “세존께서 열반에 완전히 입멸하시자 동시에 몸이 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일으키는 대지의 진동이 일어나고 천둥이 내리쳤다.”(D16.127)라고 묘사 되어 있다. 진동만 있을 뿐 빛은 없는 것이다.
진동인가 빛인가
부처님의 탄생, 성도, 초전, 열반 이렇게 네 가지 큰 사건의 경우 공통적으로 진동이 있다. 그러나 진동과 빛이 함께 하는 경우는 탄생, 성도, 초전 이렇게 세 가지 사건 뿐이다. 열반은 오로지 진동만 있을 뿐 빛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진동은 네 가지 큰 사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다.
흔히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경천동지할 사건은 모두 부처님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의 입태, 탄생, 성도, 초전, 열반 이렇게 다섯 가지 사건에는 진동이 있었다. 경에서는 일만세계의 진동이라고 했다. 우주적 진동을 말한다. 진동이 있으면 다 알게 될 것이다. 부처가 출현한 것을 아는 것이다.
부처의 출현은 진동과 빛으로 묘사되어 있다. 빛과 진동 모두 만족하는 것은 입태, 탄생, 성도, 초전이다. 열반은 진동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빛보다 진동이다.
불교에서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 다섯 가지가 있는데 공통적으로 진동이 있다. 열반을 제외하면 빛과 진동이다. 이때 빛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무명을 밝히는 빛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후야에 깨달은 순간에 대하여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그 거룩한 님은 악마의 군대를 부숴버린다.”(Ud.2, Vin.I.2)라고 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불교에서 악마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섯 가지 악마가 있다. 하늘아들로서의 악마, 오염원으로서의 악마, 존재의 다발로서의 악마, 죽음의 신으로서의 악마, 그리고 유위적 형성으로서의 악마가 있다. 부처님은 악마의 군대를 부숴 버렸다고 했다. 이는 오염원으로서의 악마와 존재의 다발로서의 악마와 유위적 형성으로서의 악마가 해당될 것이다.
오염원으로서의 악마는 청정도론(Vism.22.49)에서 열 가지 오염으로 설명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사견, 의심, 해태, 자기정당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창피함을 모르는 것의 악마를 말한다.
존재의 다발로서의 악마는 집착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악마임을 말한다. 그래서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되면 악마에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발우의 경’에서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 이렇게 탐착을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를 발견할 수 없네.”(S4.1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물질, 지각, 느낌, 형성, 의식에서 벗어난 사람은 늙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죽음의 신인 악마가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유위적 형성으로서의 악마는 어떤 것일까?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를 말한다. 이는 유신견 정형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했을 때를 말한다. 이는 자아의식이 개입되어 존재의 다발(오온)을 실체적으로 조작하면서 선행과 악행의 업을 짓는 것으로서의 악마를 말한다. 악행은 물론 선행도 악마에 종속된 것임을 뜻한다.
불교의 역사는 부처님의 깨달은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전조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보살이 입태했을 때, 그리고 탄생했를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사이지옥에 이르기까지 빛이 도달했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동과 빛은 성도의 순간에도 있고 초전의 순간에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열반의 순간에는 진동만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진동의 종교이자 빛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진동의 종교라기 보다는 불교는 빛의 종교에 가깝다. 부처님이 성도한 순간 어둠이 부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컴컴한 방에 불이 켜져 일시에 밝아진 것과 같다. 이를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그 거룩한 님은 악마의 군대를 부숴버린다.”라고 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어둠에서 빛으로 간다고 볼 수 있다.
2020-08-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