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강력한 외장하드 빠알리 니까야
생존을 위한 강력한 외장하드 빠알리 니까야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거울을 달아야 하겠기에 벽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계속 빗나갔다. 자꾸 치다 보니 구멍이 세 개 생겼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명품 아파트에 상처를 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예전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를 생각해서 무작정 못을 박고 보자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가능하면 못을 박지 않아야 한다. 특히 세입자는 못 하나 마음대로 박아서는 안된다. 세입자는 상처를 낸 것 없이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물려주어야 한다.
못 구멍 하나로 마음에 상처가 생긴 듯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것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것이라면 어느 벽면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못질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못 하나 박는 것도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후로는 절대 벽에 못을 박지 않기로 했다.
명품 같은 아파트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상처가 난다. 여러 입주자가 거처간 아파트일수록 상처가 크다. 자세히 잘 보면 온갖 상처투성이다.
상처는 몸에도 있다. 살아온 날이 많을수록 상처도 크다. 최근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다. 신발이 빗물이 있어서 미끄러진 것이다. 오른쪽 팔을 짚었다. 그 결과 상처가 생겼다. 시일이 지나자 상처가 아물었는데 붉게 흔적이 남았다.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자세히 보면 온갖 상처투성이다. 어렸을 적 상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지구본과 같이 생긴 뺑뺑이를 타다가 튕겨져 나왔다. 입부위가 땅바닥에 닿아서 입술이 터졌다. 내버려 두었더니 상처로 남았다. 평생 함께 하고 있다. 군대 있을 때 계단을 내려 가다 넘어졌다. 오른쪽 손을 먼저 대었는데 일어나서 보니 한쪽 손가락 모양이 변형되어 있었다. 급히 짜 맞추었다. 그랬더니 약간 뒤틀린 모양이 되었다. 마치 기형처럼 된 것이다. 이런 손가락과 평생 함께 하고 있다.
아파도 나의 몸도 자세히 관찰하면 온갖 상처투성이다. 차도 그렇다. 한번도 새차를 사 본적이 없다. 늘 중고차만 샀다. 차를 인도 받았을 때는 거의 새차나 다름없었다. 흠결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다 보면 상처가 생긴다. 접촉사고로 인한 것도 있고 부주의로 긁힌 것도 있다. 심하게 긁힌 것을 보면 마음도 긁힌 것 같다. 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상처
상처에는 물질적 상처만 있는 것일까? 마음의 상처도 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처를 받았다. 어떤 것은 너무 깊어서 지금까지 삶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육체적 상처가 흔적을 남기듯이,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 역시 흔적을 남긴다. 이를 ‘트리우마’라고 할 것이다.
트라우마를 우리말로 정신적 외상(外傷)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외상을 말한다. 대개 어렸을 적 사건이 전 생애에 걸쳐서 영향을 준다. 유년시절이나 청소년시절에 폭력이나 폭행을 당했다면 그 상처는 평생 갈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상처는 점점 깊어진다. 살아온 과정만큼이나 상처는 많아진다. 몸이 아파 몸의 이곳저곳에 칼을 대었다면 수술한 자국은 마치 훈장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신적 트라우마이다. 한번 겪은 정신적 외상은 여간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간다.
살아 가면서 상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원형 그대로 무균질의 삶의 사는 자에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가 있다. 그런 상처는 생존에 대한 몸부림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처절한 생존현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쟁적 삶과 관련이 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17세기 영국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한 말이다. 이 생존에 대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상태를 말한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투쟁하는 것이 자연스런 상태라고 말한다.
홉스는 인간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육체를 실체로 본 것이다. 이는 유물론에 가깝다. 유물론에 따르면 정신은 부차적인 것이다. 정신은 육체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가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물질을 중요시하게 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당연히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만일 정신이나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존재란다면 육체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죽어도 정신이나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발견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난파했을 때 선원들은 좌정한채로 삼보에 의지하며 죽음을 기다렸다. 그 과보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참사람과 함께의 경에 실려 있는 ‘싸뚤라빠 무리에 대한 이야기’(S1.31)를 말한다.
오로지 이 몸과 마음이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면 한번뿐인 인생이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자신의 생존만큼 절박한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마치 생존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육체가 자신의 전부와 같다면 육체를 잘 보전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게 된다.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홉스는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경쟁심’이다. 둘째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났다는 ‘공명심’이다. 셋째는 저 사람이 나를 언제 공격해서 내 것을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흔히 말하기를 삶은 생존경쟁이라고 말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특히 정치권에서 심하다. 선거철이 되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중상모략과 흑색선전, 가짜뉴스가 넘쳐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존경쟁은 삶 속에서도 발견된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롤플레잉게임 하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경쟁심과 공명심,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탄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짐승과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도덕이나 정의, 소유권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힘이 정의인 세상이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면 싸움 그칠날이 없을 것이다. 마치 전국(戰國)시대와 같은 것이다.
전국시대가 되면 살아 남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아무리 용맹한 장수라도 죽으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막로하고서라도 최후까지 살아 남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이런 세상에서는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이 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불안해서 밤에 잠도 못 잘 것이다. 이대로 못살겠다고 생각했을 때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앞으로 내가 네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내 물건 훔쳐가지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좋다. 나도 너 안죽일 테니까 너도 나 죽이지마.”라고 말할 것이다. 서로 싸우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서로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을 때 이는 법(法)이 된다. 그러나 언제 또다시 싸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법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좀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 결과 생각해 낸 것이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군주를 뽑는 것이다. 군주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다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세금도 낸다. 그리고 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하여 응징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는 “나를 지켜달라.”라는 말과 같다. 군주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지켜 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설이다.
중생들이 왕을 만든 것은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한이야기가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17세기에 홉스가 초기불교경전을 읽어 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이야기와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이야기가 분명히 불교경전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서 세계가 어떻게 생겨 났는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마치 바이블에서 창세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계급의 기원’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성계급이 생겨난 원리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무사계급이 생겨난 원리를 보면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설과 매우 유사하다. 경을 보면 ‘쌀을 둘러싼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에는 악하고 불건한 삶을 사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오계를 어기는 자들이다. 특히 쌀과 관련하여 “바쎗타여, 어떤 뭇삶이 탐욕을 내어 자신의 몫은 잘 챙겨두고 타자의 몫은 주지 않은데도 빼앗아 먹었다.”(D27.15)라고 했다. 이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말한다.
힘이 있는 자가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가 버렸을 때 짐승의 세상이나 다름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약자는 살아 갈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쌀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쌀로 인하여 “그때부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나타났고, 비난이 나타났고, 거짓말이 나타났고, 처벌이 나타났다.”(D27.15)라고 했다.
사람들은 쌀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뭇삶(중생)들은 모여서 협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존자들이여, 나쁜 원리가 뭇삶들에게 나타나서,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비난하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거짓말이 나타날 것이고, 처벌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꾸짖어야 할 자를 바르게 꾸짖을 수 있고, 비난해야 할 자를 바르게 비난할 수 있고, 추방해야 할 자를 바르게 추방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선정하면 어떨까? 우리는 그에게 쌀을 몫으로 나누어줍시다.”(D27.16)
중생들은 왕을 뽑은 것이다. 왕을 뽑아 안전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쌀을 모아서 왕에게 나누어 주자고 했다. 쌀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왕에게 쌀을 주어서 쌀을 지키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왕은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한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필요에 따라 왕을 만든 것이다. 이는 “그들의 기원은 우리와 같은 뭇삶들로부터 생겨난 것이지 다른 것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동등한 자들에게서 생겨난 것이지 동등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원칙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 무원칙하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D27.1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중생들이 왕을 만든 것은 중생들 자신의 재산을 지켜 주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왕이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왕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투표로서 최고지도자를 교체하는 것과 같다. 또는 민중혁명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다.
권력은 임시로 맡겨진 것이다. 그럼에도 옛날 왕조시대 때 왕들은 왕권에 대하여 마치 하늘이 내려준 것처럼 주장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다. 그러나 홉스는 왕권이라는 것은 하늘이 준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양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홉스의 주장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미 2천 5백년 전에 왕권에 대하여 ‘우리와 같은 뭇삶들로부터 생겨난 것이지 다른 것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D27.16)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홉스의 사회계약설은 부처님이 선두라고 볼 수 있다.
몸 전체에 정보를 저장하는 동물
상처투성이의 삶이다. 육체적 상처는 남아 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마음 속 깊숙이 그림자로 남아 있다. 언제 어느 때고 조건만 맞으면 발현된다. 육체적 상처나 마음의 상처나 생존에 대한 것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 상처로 나타난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상처투성이다. 병이 들면 들수록 상처투성이가 된다. 마침내 만신창이가 되어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나는 본래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의 안전을 지켜 줄 수 있다. 그러나 남은 나의 마음 같지 않아서 끊임없이 나의 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남들의 공격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동물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정보를 저장하는데 정보를 단지 뇌에만 저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물은 몸 전체에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카멜레온은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피부속에 저장해 놓고 있다. 그래서 위험에 빠지면 피부색깔이 주변에 있는 색으로 변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성향이나 기억, 재능, 의지와 같은 것들이 단지 뇌속에만 저장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몸 전체에 저장되어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언어는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몸 바깥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라는 외장하드를 이용할 줄 아는 인간
인간은 정보를 몸 밖에 저장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문화이다. 문화는 인류의 축적된 지식과 지혜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문화는 모두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언어로 개념화된 것들이다. 이런 문화는 매우 방대하다.
문화속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몸안에 저장용량이 500기가바이트라면 문화가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은 10에 몇 십승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언어만 알면 거의 무한대나 다름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외장하드를 장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보는 생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누군가 나의 것을 빼앗으려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나는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습적인 것이 되었을 때 더 큰 대비책을 마련한다. 왕을 뽑아 세금을 주며 나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왕이 반드시 나의 안전을 지켜 준다는 보장이 없다.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 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문화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언어로 되어 있는 문화유산에 의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만 살 수 없다. 누군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만 산다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오로지 감각과 정서에 충실한 삶만 살다 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따른 ‘재난’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문화의 힘을 빌어야 한다.
니까야는 생존을 위한 강력한 외장하드
오늘날 문화유산은 외장하드와 같은 것이다. 언어만 알면 누구나 인류의 축적된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종교이든지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접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뛰어넘는 것이다. 경전속의 가르침이 그렇다.
매일매일 니까야(經藏)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니까야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때로 위나야(律藏)와 아비담마(論藏)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빠알리삼장에는 어마어마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경전을 보면 정보의 보고나 다름 없다. 그런 정보는 어쩌면 생존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경전을 접하고서 나쁜 결과가 예측되는 것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을 접하면 지혜롭게 된다. 삶의 지혜도 얻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생존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예측된 결과를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니까야라는 강력한 외장하드를 가지고 있다.
2020-08-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