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으로 장사 하지 말라
가르침으로 장사 하지 말라
수다원과정이 5백16만원.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사실이다. 해당 카페를 들어가 보니 위빠사나수다원과정 4박5일에 5백16만원이라고 되어 있다. 내역을 보니 회비보시가 5백만원이고 숙식비가 16만원이다.
수다원과정 안내문을 보고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명상도 사업화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구나 성자가 되는 과정도 화폐로 가능한 시대가 된 것 같다. 보시금 5백만원을 내면 정말 수다원이 되는 것일까?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명예도 권력도 금력만 있으면 가능한 시대이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 돈만 있으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성자도 돈의 힘으로 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우다나에 이런 게송이 있다.
“어디서든 얻으려 애쓰지 말고,
타인의 사람이 되지 말라.
남에게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지 말고,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지 말라.”(Ud.64)
우다나 ‘결발고행자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동일한 내용의 경이 상윳따니까야에도 ‘일곱 명의 결발 수행자의 경’(S3.11)에도 실려 있다. 내용은 같지만 게송 부분은 다르다. 이 게송은 우다나에서만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지 말라.(dhammena na vāṇijjaṃ care)”라고 했다. 빠알리어 ‘vāṇijjaṃ’은 ‘Trade’의 뜻으로 무역이나 장사, 사업을 말한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했을까? 주석을 보면 “재물 등 때문에 가르침을 설하지 말라.”(UdA.334)라는 뜻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경을 보면 결발수행자 등 다섯 부류의 유행자들이 등장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외도들이다. 다섯 부류의 외도들은 꼬살라국왕 빠세나디를 위해서 일했다. 경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빠세나디왕은 유행자들을 스파이로 활용한 것이다. 부처님당시 인도에서는 16국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유행자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물때문에 가르침을 설한다면
부처님은 다섯부류의 유행자들이 빠세나디왕을 위해 일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행자들은 왕에게 자신은 깨달은 자들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는 왕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Ud.64, S3.11)라며 물어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 국에서 나오는 전단을 쓰고 화환과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Ud.64, S3.11)
범부가 깨달은 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는 정신적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도력이 높은 자는 도력이 낮은 자를 알아볼 수 있지만, 도력이 낮은 자는 도력이 높은 자의 경지를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외도 유행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유행자들은 왕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설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왕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일종의 스파이노릇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재물 등 때문에 가르침을 설한다면,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으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 장사를 하는 자는 재물 등을 위해서 스파이 등의 일을 하는 꼬살라 국왕의 부하들과 같다. 또한 완전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마음으로 어떤 천상의 신들의 무리를 갈망한다면, 장사해서는 안될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는 것과 같다.”(UdA.334, 우다나 805번 각주)
부처님은 담마로 장사를 하지말라고 했다. 왕의 스파이노릇하며 왕에게 담마를 말한다면 이는 담마로 돈벌이를 하는 것과 같다. 왕의 부하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거룩한 자들이 될 수 없다.
사람을 알아보는 네 가지 방법
그가 거룩한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에서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네 가지를 설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2) 그들이 청정한가 하는 것은 같이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3) 그들이 견고한가 하는 것은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4)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을 알아보는 네 가지 방법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계, 정, 혜에 대한 것이다. 계, 정, 혜 삼학이 고루 잘 갖추어진 자라면 거룩한 자로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접대면하는 것이다. 소문으로만 들어서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 알려면 대면해 보아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대화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대론해 보는 것이다. 대론하면 그 사람의 경지가 금방 드러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A4.192)
앙굿따라니까야 ‘경우의 경’(A4.192)에서는 사람 알아보는 방법이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가 현명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가 지혜가 있는지 아닌지, 그가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는 대론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혜가 있는 자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했을 때 심오한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심오하고 고요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한다.”(A4.192)라고 했다. 선정체험과 열반체험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수행점검을 하는 이유
그가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다면 그의 경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범부는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라고 했다.
사람마다 정신적 능력이 다르다. 정신적 능력에 따라 사람을 보는 눈도 다르다. 범부는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수다원의 마음은 수다원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 라고 했다.
수다원은 사다함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사다함은 아나함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아나함은 아라한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라한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행점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깨달은 자인지 알려면
범부라도 그가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가장 쉬운 것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탐욕, 성냄, 미혹이 남아 있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에게 조금이라도 탐욕이 남아 있다면 그는 깨닫지 못한 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가 밥 먹을 때 젓가락 놀리는 것만 보아도 그에게 탐욕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조금이라도 화를 냈다면 그는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설령 스승이 제자를 훈계하기 위해 자비의 분노를 냈다고 하더라도 분노는 분노인 것이다. 감정에 지배되어 분노했다면 깨달은 자라고 볼 수 없다.
깨달은 자는 사견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떠나 외도 가르침에 빠져 있다면 그는 깨달은 자라고 볼 수 없다.
그가 깨달았는지는 그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언행이 일치되는지, 지행이 합일 되는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행위 하는 것이 다르다면, 그는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깨달음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연기법과 관련이 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다. 율장에 따르면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 (uttarimanussadhamma: 上人法)’를 말하는 자들은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 선정이나 해탈, 도와 과 등 인간을 뛰어넘는 경지를 사칭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깨달음을 사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돈벌이를 위해서 깨달음을 사칭하기도 한다. 일반 범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유튜브에서 어떤 스님은 “그래서 7지 이상 8지 되면 동진주 나오잖아요. 탁 하나 만들어 가지고 색구경천에 가지만 계속 파견근무를 와. 그 동네 할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관세음보살 파견근무, 지장보살 파견근무, 다 파견근무야. 하나에서 다 나온 파견근무야. 내가 전생을 보니까 내가 뭔짓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나오니까 이 파견근 이런 것을 다 아는 거죠.”라고 했다. 자신을 색구경천에서 왔다고 한 것이다.
색구경천에 왔다는 스님은 환속했다. 최근 유튜브를 보니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칠판을 이용하여 여전히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강의하고 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는 그 사람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사람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연기법적으로 이야기하면 깨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정법을 말하는 자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면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이야기나 외도의 사상을 말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는 가르침으로 장사하는 것이 된다. 가르침의 도둑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읊은 대가로
명상도 사업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다원과정이 오백만원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성자가 되는 과정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다. 마치 등값을 매기는 것과 같다.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고액의 가격표가 매겨져 있다면 이는 너무 장삿속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재물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M3)라고 했다. 그럼에도 명상코스에 고액의 가격표를 매겨서 돈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는 재물의 상속자가 되는 것과 같다. 가르침으로 장사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호의를 베푸는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이여, 그것은 올바로 보는 님에게 옳지 않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깨달은 님들은 물리치네.
바라문이여, 원리가 있는 한 그것이 진솔한 삶이네.”(S7.9, Stn.480)
2020-09-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