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4. 19:17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

 

 

자격증과 면허증의 세상이다. 자격이 되어야 세상 사는 것이 수월하다. 면허증이 있어야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자격도 안되고 전문가도 아니면 세상 살기가 고단하다.

 

자격증과 면허증의 세상에서

 

의사들이 극한투쟁을 하고 있다. 이는 파업이 아니다. 의사들은 노동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월급생활자로서 의사들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소득전문직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들은 왜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까?

 

의사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보기에는 지나치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이 땅의 기득권층이기 때문이다. 자격증과 면허증을 갖고 있는 특권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의사(醫師)의사선생님이라고 한다. 교사(敎師)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듯이, 의사를 의사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판사(判事)와 검사(檢事)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자라고 하여 같은 사자가 아닌 것이다. 의사에게 선생님으로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과도 관련이 있다. 죽을 사람을 살려 냈을 때 존칭으로서 선생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조단체처럼 극한투쟁과 벼랑끝전술로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 한다면 의사선생님이 아니라 의사(醫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사는 면허증을 필요로 한다. 이는 국가에서 부여하는 것이다. 면허증이 있으면 한평생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래서일까 사회 어느 분야에서는 자격증이나 또는 면허증을 따고자 한다.

 

자격과 면허는 다른 것이다. 자격은 능력인증서라고 볼 수 있다. 면허증은 영업을 할 수 있는 인증서라고 볼 수 있다. 자격과 면허를 동시에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의사가 대표적이다.

 

기술분야에서도 자격증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기사자격증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활용하지 않으면 장롱자격증이 되기 쉽다. 면허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장롱면허증이라고 한다.

 

 

자격증도 면허증도 없지만

 

자격증도 없고 면허증도 없다. 학교 다닐 때 기사자격증을 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따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취업이 잘 되던 완전고용의 시대였다. 굳이 자격증이 없어도 살아 가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기사자격증을 따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면허증이 하나 있기는 하다. 운전면허증이다. 운전면허증은 사실상 국민면허증이다. 누구나 취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없어도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전문가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프로페셔널이 되는 것이다. 밥벌이를 한다면 누구나 프로페셔널이다. 이는 자신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을 때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가진 것과 같다.

 

피시비아트워크(PCB Artwork)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에 직장 다닐 때 배웠던 것이다. 캐드를 이용한 패턴설계를 말한다. 이런 것도 일종의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개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술로 치지 않는다. 테크닉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연구원 보조로서 신입여사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피시비아트워크를 오래 하다 보니 숙달되었다. 눈감도 할 수 있는 달인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법을 구사하는 것에 있어서 자격증이 없다. 아직까지 단체나 국가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자격증을 주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알음알이로 배우고 익혀서 활용하는 것이다.

 

종교계의 자격증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익이 있음을 말한다. 또 자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다. 각종 고시와 자격시험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종교계에도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필요할까?

 

종교계라고 해서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종교계에서도 자격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려면 목사자격증이 필요할 것이다. 신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스님은?

 

스님도 자격을 필요로 한다. 일정기간 스님이 되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격이 되면 구족계를 준다. 비구계나 비구니계와 같은 구족계가 일종의 스님자격증이라고 볼 수 있다.

 

신도도 자격증을 필요로 한다. 조계종에서는 신도자격증을 발급한다. 연회비 개념으로 돈을 내면 자격증이 나온다. 물론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조계종신도자격증을 가지면 혜택이 있다. 전국 조계종 사찰에 대하여 입장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 밖에도 포교사라 하여 또 다른 상위 개념의 자격증이 있다. 만일 불교계에 자격증을 필요로 한다면 수다원자격증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수다원자격증

 

출재가를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는 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이 되었을 때 가르침은 완성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를 말한다.

 

각 단계는 도와 과로 구분되어서 사향사과라고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경지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다원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스님의 지도를 받으면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수다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른바 수다원과정이라 하여 오백만원을 보시금으로 내면 수다원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수다원이 되고자 한다. 수다원이 되면 열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아무리 아둔한 자라고 해도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끝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 예불문이자 수호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라따나경(Sn.2.1)이 있다. 경을 보면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Stn.230)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 흐름에 든 님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성자가 된다. 그는 아무리 방일하더라도 일곱 번 천상세계와 인간계를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수 있다.”(Vism.22.17)라고 했다.

 

불교인으로서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이는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우주적 사건에 해당된다. 수다원이 되기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학원수강하듯이 수다원과정에 입소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수다원에 대하여 예류자라고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는 뜻이다. 성자가 된다는 것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가 된다. 또 복전이 된다. 이는 라따나경에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Stn.230)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쌍팔배의 성자에게 공양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30)라고 했다.

 

수다원 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정도로 어려울까? 이에 대하여 수미산의 비유가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 콩알만한 일곱 개의 자갈과 비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귀한 제자가 참사람으로서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를 꿰뚫으면, 그에게는 이미 부서져 소멸해 버린 괴로움이 많고 남은 것은 적어서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하더라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S56.49)라고 했다.

 

수다원이 되면 어지간한 괴로움은 소멸된다. 설령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콩알만한 작은 자갈 정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S56.51)라고 했다. 마치 손톱 끝에 있는 흙먼지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범부중생의 번뇌는 대지의 땅만큼이나 큰 것이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손톱 끝에 있는 티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번뇌가 적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죄악을 짓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Stn.230)라거나 또는 아무리 방일하더라도”(Vism.22.17)라는 표현이 있어도 이는 손톱 끝에 있는 티끌처럼 아주 작은 번뇌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번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수다원은 누군가 인가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아는 것이다. 자신에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릿차비족의 대신 난다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다까여, 고귀한 제자가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을 그치게 하여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추어 고귀한 이치를 지혜로 꿰뚫으면, 그가 원한다면 지옥도 부서지고 축생도 부서지고 아귀의 세계도 부서지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도 부서지고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습니다.”(S55.30)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수행을 하여 번뇌가 줄어 든 것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남아 있는 번뇌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다면 스스로 , 나에게 이런 번뇌가 제거되었구나. , 나에게 아직까지 이런 번뇌가 남아 있구나.”라며 스스로 아는 것이다.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는 경에서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습니다.”(S55.30)라 고 했다. 이렇게 스스로 아는 것은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S55.8)이라고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

 

거울은 액면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준다. 만일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어떨까? 반드시 액면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의 마음을 거울로 본다면 추한 모습일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거울로 본다면 악마의 모습일 것이다.

 

법의 거울이 있다. 빠알리어로 담마다사(dhammādāsa)’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가르침의 거울이라고도 한다.

 

법의 거울로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어떨까? 아마 나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남아 있는 번뇌와 소멸된 번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법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법의 거울로 자신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보고서 수다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에는 인증서가 없다. 깨달음에는 자격증도 없다.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다원과정이라 하여 인가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분명한 사실은 어느 스승도 인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인가를 하게 된다면 거래가 있게 될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오로지 열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되물릴 수 없다. 다시 중생으로 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보살의 삶을 살려면 수다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범부로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1단계,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에서 멈추어야 한다.

 

수다원이 되고자 한다면 계보가 바뀌어야 한다.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족보가 바뀌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일어난다.”(Vism.22.5)라고 했다. 고뜨라부냐나(gotrabhu ñāna), 종성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면 성자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은 생은 최대 일곱 생이다. 돌이킬 수 없는 열반의 길을 갈 것인지, 세세생생 윤회하는 길을 가게 될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열반의 길에는 자격증도 면허증도 없다. 가르침을 거울 삼아 홀로 가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다.

 

 

2020-09-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