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글삼귀의문부터 바꾸어야
먼저 한글삼귀의문부터 바꾸어야
이득과 명예와 칭송, 이 세 가지는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이라고 했다. 물론 출가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수행자라면 출재가를 막론하고 모두 적용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멍에를 여읜 위없는 안온(anuttarassa yogakkhemassa adhigamāya)’(S17.1)을 얻는데 장애가 된다고 했다.
상윳따니까야는 5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이득과 명예의 모음(Lābhasakkārasaṃyuttaṃ)’(S17)이 있다. 이득과 명예에 대한 별도 주제에 대한 상윳따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이득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아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알려 주는 것과 같다.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처럼
명자승(名字僧)이라는 말이 있다. 이름만 승려였지 하는 행동은 속인같다는 말이다. 이득(lābha)과 명예(sakkāra)만을 추구하는 승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명리승(名利僧)’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다 칭송(siloka)까지 추구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낚싯바늘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부가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S17.2)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빠진 수행승에게 어부가 던진 낚싯바늘을 문 것과 같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어부라는 것은 악마를 의미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라는 미끼가 달린 낚싯바늘을 문 수행승은 악마(māra)의 손아귀에 있음을 말한다.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이익과 명예와 칭송이라는 멍에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면 악마의 조종을 받을 것이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가 어부의 손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렇게 ‘이득과 명예와 칭송 (lābhasakkārasiloko)’에 이끌리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라는 멍에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멍에는 소의 목과 어깨 사이에 놓여 있는 나무막대나 나무틀을 말한다. 쟁기를 끌 때나 수레를 끌 때 사용한다. 소가 멍에를 지고 있는 한 자유롭지 않다. 법구경 1번 게송을 보면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Dhp.1)이라고 했다.
멍에를 지고 수레를 끄는 황소는 오로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앞으로 벗어나려 하면 멍에가 목을 조를 것이다. 뒤로 벗어나려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살을 도려 낼 것이다.
멍에를 지고 있는 한 멍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수행승은 멍에를 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서의현 전총무원장에게 대종사의 지위를
최근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불교계에서는 종종 잊을 만하면 세상을 놀래키는 사건이 터진다. 이번에는 서의현 전총무원장에게 대종사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불교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세상을 발칵 뒤집어서 놓은 백양사도박사건과 적광스님 납치, 감금, 폭행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해방후 종단이 성립되고 난 이후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두가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과도한 것일까?
최근 허정스님은 서의현 전총무원장에 대한 대종사 자격부여에 대하여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한마디로 승가집단이 무지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무지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승가가 무엇이고 승가의 운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기에 일어난 헤프닝이다.”(2020-11-14)라고 했다.
갈마(kamma)를 하는 이유는
어느 모임이나 조직이든지 지향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회칙을 필요로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헌법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누군가 헌법을 어겼다면 처벌받을 것이다.
승가사회 역시 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율장이 법이라고 볼 수 있다. 율장에서는 세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범죄를 저지르면 제도가 만들어지는 수범수제식이다. 그래서 율장이 방대해졌다. 그러나 이는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범죄는 일어날 것이고 계율은 새로 만들어질 것이다. 설령 그것이 소소계라고 할지라도 케이스바이케이스별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지다 보면 무한정계율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번뇌 숫자만큼이나 많은 계율이 만들어질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면 이는 불선법이 된다. 크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범주에 들어 간다. 율장에 실려 있는 방대한 계율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번뇌에 대하여 계율로 만들 수 없다. 만일 만들고자 한다면 “구천 하고도 또한, 백팔십 꼬띠와 오백만 하고도 또한, 삼만육천이 있다.”(Vism.1.132)라고 했다. 사실상 계율은 무한정 있는 것이다. 아직 규정되지 않은 잠재적 계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무한청정적 계행(apariyantapārisuddhisīla)’을 지킨다고 말한다.
율장에 따르면 승가에서 쟁사가 발생하면 갈마(kamma)를 한다. 승가의 대중이 모여 의결하는 것이다. 전원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토론을 한다. 토론하여 법과 율에 맞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그래서 비법으로 판단되면 쳐 낸다. 이렇게 본다면 갈마를 한다는 것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된다.
어떻게 스님이 승보가 되었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이와 같이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너무나 말이 안되는 우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승려라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할 ‘승가’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단적인 예로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스님이 승보가 되었을까? 어떻게 하여 스님이 부처님과 동급이 되었을까?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불자들은 이 말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학습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때 종립중학교를 다녔다. 조계종 종립중학교, 동대부중을 말한다. 그때 당시 종로5가 가까운 연지동에 있었다. 속칭 ‘뺑뺑이’로 배정 받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불교와의 인연의 시작인지 모른다. 불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던 떄이다. 마치 하얀 도화지와 같았던 때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불교를 처음 접했다.
일주일에 한번 불교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접한 불교는 '부처님의 일생'이었다.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 수행, 전법, 열반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보는 부처님의 일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시간에 배운 것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부처님의 출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문유관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는 다름 아닌 생노병사에 대한 것이다. 마치 하얀도화지에 물감을 칠하는 것처럼 그대로 쏙쏙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청소년 포교가 중요하다고 본다.
중학교 1학년 때 음악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음악시간 첫 시간에 처음 배운 노래는 삼귀의와 사홍서원이었다. 음악선생님은 남자였다. 삼십대 중반으로 머리를 위로 빗었고 미남형이었다. 오르간을 치며 가르쳐 주었는데 금방 배웠다.
중학교 때 배운 삼귀의는 한글삼귀의문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가르쳐 준대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며 특유의 음정과 박자를 갖추어 노래 불렀다.
중학교 때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 노래가 오래 전부터 불려져 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글삼귀의문 노래가 나온지 일이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73년의 일이다.
한글삼귀의문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는 스님들을 승보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라고 삼귀의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귀의승 중중존’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이 보급된지 이제 50년 가까이 되었다. 중학교 들어 갔었을 때 처음 배운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배운지 반세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렇게 승보개념이 변질되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추락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불교는 첫단추부터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과거불이 출현한 이유는
정법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과거불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을 보면 일곱 부처님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경에 따르면, 구십일 겁 전에는 비빳씬 부처님이 출현했고, 삼십일 겁 전에는 씨낀 부처님과 벳싸부 부처님이 출현했다. 현겁에서는 까꾸싼다, 꼬나가마나, 깟싸빠, 그리고 고따마 부처님이 출현했다. 이렇게 시기별로 달리 부처가 출현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함을 말한다. 어느 시기가 되면 정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림을 말한다.
정법이 사라지면 암흑시대가 된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 까지는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 부처가 출현하면 정법이 펼쳐져서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부처가 출현하여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다. 이와 같은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무엇이든지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써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했다.
과거불이 출현한 것은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함을 말한다. 언젠가 변질되어서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법은 부처님 재세시 가장 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정법은 부처님 입멸후에 전승과정에서 오염되기 시작할 것이다. 나중에는 외도의 사상과 별 차이가 없게 되었을 때 정법은 사라지게 된다. 인도에서 불교의 멸망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말세가 되면
연기법은 중력의 법칙처럼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항상 본래 그대로 있는 근본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연기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을 때 정법도 사라진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는 한량 없는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테라가타 주석에 따르면 다섯 시대가 있다. 이는 “해탈의 시대(vimuttiyuga), 삼매의 시대(samādhiyuga), 계행의 시대(sīlayuga), 학습의 시대(sutayuga), 보시의 시대(dānayuga)”를 말한다.
최후의 시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첫 번째가 해탈의 시대인데, 해탈의 시대가 사라지면, 삼매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계행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학습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보시의 시대가 전개되는데, 학습의 시대부터가 최후의 시대(末世)에 해당된다.” (Thag.A.III.89)라고 설명된다.
테라가타는 부처님 직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테라가타의 성립연대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아소까 왕에 의한 제3차 결집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후의 시대, 즉 말세는 다섯 시대 중에서 학습의 시대와 보시의 시대를 지칭한다. 왜 두 시대가 말세일까? 이는 “학습의 시대는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흔적만 남을 것이고 그때부터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푼다.”(Thag.A.III.89)라고 했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테라가타에서 뿟싸존자가 예언한대로 지금은 최후의 시대일까? 뿟싸존자는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라고 했다. 어쩌면 현재 이 시대에 딱 맞아 떨어지는지도 모른다. 해탈과 삼매와 계행의 시대는 지나고 최후의 시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한국불교를 보면 최후의 시대, 즉 말세를 보는 것 같다. 수행은 물론 학습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수행승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용맹정진하고 있다. 이익과 명예에 칭송에 눈 먼 출가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소위 권승들을 말한다.
명리승들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이 어떤 가르침을 펼쳤는지 공부를 하지 않으니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로 간주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말세라 하는 것이다.
흔적만 남은 한국불교
현재 한국불교는 불교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불교의 상징이자 부처님의 옷이라고 불리는 가사를 필요할 때만 입는 것이다. 일본 같은 경우는 가사 흔적만 남아 있다. 마치 목걸이처럼 목에 걸치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학습의 시대도 지나고 보시의 시대가 되면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승려처럼 보이지만 재가자의 삶과 다름없는 것이다. 반승반속을 말한다. 그래서 승려가 재물을 모아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모은 재물을 보시로서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종종 목격된다.
종종 스님이 큰 돈을 보시했다는 뉴스를 교계신문사이트에서 접한다. 이럴 때 “대체 스님이 무슨 큰 돈이 있어서 보시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바로 이것이 최후의 시대, 즉 말세임을 말한다. 불교는 흔적만 남고 보시로서 베푸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테라가타 주석에서는 “이것이 최후의 올바른 실천이다.”(Thag.A.III.89)라고 했다.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재보시하면 이는 말세에 해당된다. 이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치 악마의 낚싯바늘을 문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멍에를 진 소와 같다. 이런 모습을 현재 한국불교에서 본다.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이번 서의현 전총무원장에게 대종사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삼보가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출가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또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했는지 공부를 하지 않으니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승보개념도 햇갈리는 것 같다. 부처님의 승가에 대하여 스님들이라고 한 것이다.
불법승 삼보는 모두 부처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을 승보로 했을 때 이는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도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이런 무지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페이스북에서 “승려들이 절에 살았어도 승가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국불교에 삼보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도 법신불을 믿고 있는 곳이 많다. 부처님 가르침 보다도 조사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살지 않고 따로 독살이 하는 출가자들이 많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는 삼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불교는 이제 제로베이스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리모델링이나 신장개업식으로는 안된다. 뿌리가 썩은 보리수는 뽑아 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보리수를 심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새로 보리수를 심어 놓았을 때 한세대만 지나면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먼저 한글삼귀의문부터 바꾸어야
한국불교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혁명의 대상이다. 선종의 종지를 표방하는 한국불교는 이제 수명이 다 되었다. 조사의 자리에 이제 부처님을 모셔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글삼귀의문부터 바꾸어야 한다.
승보는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공동체를 말한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를 말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는 승가공동체가 있다면 정법이 살아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다행히도 정법은 살아 있다. 이제 한국불교에서도 정법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현재 한국불교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번 서의현 전총무원장을 대종사로 추대하는 것을 보고서 불교인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2020-11-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