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시들하고 귀찮아 질 때
매사 시들하고 귀찮아 질 때
어디 갈 데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다. 직장이 있다면 이것보다 더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갈 곳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안심이다. 마치 먼 곳에 여행 갔을 때 돌아 갈 집이 있는 것과 같다.
남자는 가정과 직장이 있어야 방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정만 있고 직장이 없어도 방황하고, 직장만 있고 가정이 없어도 방황한다. 둘 다 없으면 노숙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갈 데가 없으면 산이라도 올라 가야 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집에 없어야 한다. 갈 데가 없다고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을 때 집에 있게 된다.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별로 없다. TV시청하는 것 등 수동적인 여가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럴 때 주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골방에서 폐장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몇 년 하면 어떻게 될까? 정신은 거의 황폐화될 것이다.
소액이라도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하게 되어 있다. 욕망을 콘트롤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주가지수에 놀아났을 때 남은 것은 허와 무일 것이다. 돈에 목숨을 거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돈에 집착하면 할 수록 남아 나지 않는다. 나중에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집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권태’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멍하게 앉아 있다는 것은 고역이다. 그래서 무언가 하려고 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수동적인 여가를 즐기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TV시청이나 먹어대기, 음주하기 등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들뿐이다.
권태와 수면이라는 악마의 군대
권태라는 말은 나태, 게으름, 하품, 졸림이 연상된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한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Stn.436)이라고 했다.
악마의 군대가 있다.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한 군대를 말한다. 이를 우리말로 마구니라고 한다. 이 말은 악마의 군대를 뜻하는 마라세나(mārasenā)가 변형된 말이다.
악마의 군대는 모두 여덟 군대가 있다. 욕망의 군대, 혐오의 군대, 기갈의 군대, 갈애의 군대, 권태와 수면의 군대, 공포의 군대, 의혹의 군대, 위선과 고집의 군대 이렇게 팔군이 있다. 모두 도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마음의 군대를 말한다.
악마의 군대 중에서 다섯째 군대가 ‘권태와 수면’이라고 했다. 빠알리원문을 보니 ‘thinamiddha’로 되어 있다. 이 말은 ‘thina’와 ‘middha’의 복합어이다. ‘thina’는 영어로 ‘unwieldliness; impalpability’의 뜻이다. 난해한 말이다. ‘middha’는 영어로 ‘sloth’의 뜻이다. 역시 난해한 말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thina’와 ‘middha’는 항상 함께 쓰인다는 것이다. 복합어로서 ‘thinamiddha’를 말한다. 이런 경우 예를 드는 것이 좋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권태와 수면을 뜻하는 ‘thinamiddha’는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이끼와 같은 수초로 덮였다면 거기서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S46.55)라고 했다. 티나밋다에 대하여 이끼와 수초 같다고 한 것이다.
왜 해태와 혼침이 마음의 장애일까?
물에 이끼와 수초가 있다면 자신의 얼굴이 눈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장애이다. 마음의 장애를 말한다. 액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五障碍)가 있다고 한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의 장애, 분노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흥분과 회환의 장애, 의심의 장애,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다섯 가지 불선법에 대하여 왜 장애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 가지 장애는 고귀한 계율에서 덮개라고도 불리고 장애라고도 불리고, 가리개라고도 불리고, 씌우개라고도 불립니다.”(D13.3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들은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로 덮히고, 막히고, 가려지고, 씌어있습니다.” (D13.3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티나밋다는 마음의 장애이다. 권태와 나태, 졸림, 하품, 게으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그 가운데 해태는 나태함이고, 혼침은 졸린 상태이다. 이것들은 노력이 없어 위축된 것 내지 능력이 없어 파괴된 것을 뜻한다. 나태와 수면이 해태와 혼침이다. 그 가운데 해태는 노력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정진의 제거를 기능으로 삼고, 침체를 현상으로 삼는다. 혼침은 부적합성을 특징으로 삼고, 폐쇄를 기능으로 삼는다. 침체를 현상으로 삼거나 졸음과 선잠을 현상으로 삼는다. 양자는 모두 권태, 하품을 일으키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토대로 한다.”(Vism.14.167)
청정도론에서 용어설명할 때는 특징, 기능, 현상, 토대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래서 해태(thina)는 나태함(특징), 졸린상태(기능), 노력없음(현상)으로 설명했고, 혼침(middha)에 대해서는 노력없음(특징), 정진없음(기능), 부적합성(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해태와 혼침은 공통적으로 권태와 하품을 일으키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이렇게 특징, 기능, 현상, 토대으로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다.
권태와 하품을 일으키게 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란 무엇일까? 상윳따니까야 ‘자양분의 경’(S46.51)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해태와 혼침을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은 무엇인가? 불쾌, 권태, 하품, 식후의 포만, 무기력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자주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해태와 혼침을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이다.”(S46.51)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아요니소마나시까라(ayonisomanasikāra)’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라고 한다. 지혜롭게 주의기울이지 않음을 말한다. 사띠가 없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불쾌, 권태, 하품, 식후의 포만, 무기력에 대하여 지혜롭게 주의 기울이지 않으면 해태와 혼침을 증가시키고 확대한다고 했다.
빛에 대한 지각(ālokasaññā: 光明想)으로
어떻게 해야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을 보면 “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D2.65)라고 했다.
빛에 대한 지각은(ālokasaññā)은 광명상(光明想)을 말한다. 명상을 하여 마음속에 달이 떴을 때 더 이상 해태와 혼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빛을 지각할 수 있기 위하여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각을 갖춘다.”(Smv.211)라고 했다.
해태와 혼침극복 여섯 가지 방법
해태와 혼침은 극복되어야 한다. 상윳따니까야 자양분의 경을 보면 구체적인 극복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해태와 혼침을 증가시키지 않고 확대시키는 않는 자양분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시작의 요소가 있고, 노력의 요소가 있고, 용맹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자주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생겨나지 않게 하고 이미 생겨난 해태와 혼침을 증가시키지 않고 확대시키지 않는 자양분이다.”(S46.51)
해태와 혼침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하여 시작의 요소, 노력의 요소, 용맹의 요소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섯 가지에 의해서 해태와 혼침이 해소된다고 했다. 그것은 “1)과식을 하지 말 것, 2)자세를 변화시킬 것, 3)빛에 대한 지각에 정신활동, 4)야외에서 지내는 것, 5)좋은 친구를 갖는 것, 6)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것”(Srp.III.165)을 말한 말한다.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기 위한 여섯 가지 방법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졸릴 때 일어나 거닐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다. 또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잠은 달아날 것이다. 다만 빛에 대한 지각, 즉 광명상은 예외이다. 이는 수행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침체된 마음에 불을 지펴야
오장애는 칠각지와 관련이 있다. 오장애는 칠각지로 극복될 수 있음을 말한다. 특히 해태와 혼침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불의 경’(S46.53)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 때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다. 그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것을 그러한 조건으로 고양시키기 쉽기 때문이다.”(S46.53)
침체된 마음에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치 불씨를 살리려 하는데 거기에 물을 뿌려 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침체되었을 때 세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좋다고 했다. 그것은 택법각지, 정진각지, 희각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각지는 침체된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이 불씨를 살리려 하는데, 거기에서 마른 풀잎을 던지고 마른 쇠똥을 던지고 마른 나무를 던지고 입으로 바람을 불고”(S46.53)라고 했다.
해태와 혼침 극복 다섯 가지 원리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친교사의 경’(A5.56)이 그것이다. 여기서 친교사(upajjhāyo)라고 하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은사스님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구족계를 받은 자는 자신이 선택한 스승 밑에서 5년간 살아야 하는데, 그와 같은 스승을 친교사라고 한다. 영어로는 A ‘spiritual teacher’라고 한다.
누구나 친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제자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로 말하면 상좌를 둘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율장에 따르면 적어도 십년간 가르침과 계율을 공부한 장로이어야 한다.
어느 수행승이 친교사에게 물었다. 수행승은 “존자여, 지금 제 몸은 권태롭고, 저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가르침도 제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A5.56)라고 말했다. 이에 친교사는 그 수행승을 부처님에게 데려 갔다. 부처님은 수행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수행승이여, 감관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양을 모르고, 깨어 있음에 몰입할 줄 모르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하고, 초야와 후야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항상 그렇다.”(A5.56)
부처님은 권태의 극복을 위하여 다섯 가지를 말씀했다. 그것은 감관수호, 음식절제, 깨어있음,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한 통찰, 그리고 명상수행을 말한다. 여기서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한 통찰’은 37조품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섯 가지 원리 중에서 해태와 혼침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음식절제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음식에 적당량을 아는 것은 나태, 하품, 졸림, 선잠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멍때림도 행복일까?
흔히 하는 말 중에 ‘멍 때리다’는 말이 있다. 아무 생각 없아 멍하게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졸음이 동반된다. 비몽사몽간 멍한 상태이기도 하다.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상태도 아니다. 이런 멍때림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멍때림에 대하여 해태와 혼침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여러가지 정황상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멍때리고 있는 것은 기능적으로 졸린상태에 해당된다. 이런 상태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감옥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D2.171)고 했다.
멍때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마치 축제날 감옥에 있는 것과 같다. 거리에서 축제가 열리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축제에 대해 한마디 말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법문을 들었을 때 멍 때리고 있었다면 법문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해태와 혼침 때문에 법문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축제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시들하고 귀찮아 질 때
해태와 혼침을 뜻하는 티나밋다를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경전과 주석에서는 갖가지 단어를 사용했다. 해태에 대해서는 나태, 혼침에 대해서는 졸린상태가 뜻이 가장 가깝다. 그런데 해태와 혼침의 공통적인 토대는 권태와 하품이라는 것이다.
권태기가 있다. 부부나 연인 간에 서로에 대해 흥미를 잃고 싫증이 나는 시기를 말한다. 권태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지고 시들해져서 생기는 싫증이나 게으름을 말한다. 모든 것이 귀찮고 의미가 없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권태가 일상화되면 어떻게 될까? 졸음이 올 것이다. 특히 점심을 포만감 있게 먹고 난 다음 졸릴 것이다.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아무런 자극도 없을 때 포만감에 졸고 있다면 이것도 행복이라 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아무 생각없이 멍때림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권태는 늘 하품과 함께 졸음을 동반한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자극이없는 사람에게 권태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무언가 해보고자 하지만 할 것이라고는 고작 감각을 즐기는 것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TV나 인터넷, 유튜브 시청처럼 수동적인 것이다. 골방에서 주식놀이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귀찮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하는 사람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먹어 대는 것, 그리고 술 마시는 것 외 달리 즐거움이 없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 외 달리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해태와 혼침에 빠진 자라고 볼 수 있다. 경에서는 “불쾌, 권태, 하품, 식후의 포만, 무기력” (S46.51)에 빠진 자라고 했다. 게으른 자가 그렇다. 마치 숨만 쉬고 있는 좀비와도 같다. 이런 자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같다. 그래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다.
해만 뜨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해태와 혼침에서 벗어나려면 집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해만 뜨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가서 길에 서 있는 것이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되 자신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우정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와는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 길을 함께 가느니 외로워도 홀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읽으면 지혜로워져 진다. 고전 중에 고전은 아마 경전일 것이다. 경전은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낡은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니까야’만한 것이 없다.
방대한 니까야에는 지혜로 가득하다. 니까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적용될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완성되었다.
경전은 주석과 함께 보아야 한다. 주석을 보면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해태와 혼침의 극복에 대한 것도 있다. 주석에서는 “1)과식을 하지 말 것, 2)자세를 변화시킬 것, 3)빛에 대한 지각에 정신활동, 4)야외에서 지내는 것, 5)좋은 친구를 갖는 것, 6)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것”(Srp.III.165)이라고 했다.
하루종일 권태와 나태, 하품, 졸림, 선잠, 멍때림 하며 집에 있는 것보다 해만 뜨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사람을 만나서 우정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야외에서 지내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고 했다. 집 바깥에 길이 있다.
2020-11-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