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아기처럼 살자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3. 07:25

아기처럼 살자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부처님 당시 소처럼 개처럼 사는 외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는다.”(M5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번뇌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정신활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말로서 개념 지어진다.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므로 개념 지어질 것이 없다. 언어가 없다면 개념 지어질 것도 없기 때문에 너와 나의 분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소처럼 개처럼 사는 것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축생은 언어로 인한 분별작용이 있을 수 없어서 번뇌가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외도들은 철저하게 소처럼 개처럼 살았다. 소처럼 사는 자는머리에 뿔을 달고 엉덩이에 꼬리를 달고 소들과 함께 풀을 뜯었다.”(Pps.III.100) 라고 주석에서는 설명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잘못된 수행방법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동아시아불교에 천진불(天眞佛)사상이 있다. 어린아기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담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어린아기를 좋아하는 것도 어린아기만이 갖는 천진무구함 때문일 것이다. 이는 유년시절 기억과도 일치한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1학년 시기 때까지가 천진무구한 시기였던 것 같다. 세상에 때묻지 않은 시기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근심과 걱정이라고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 말에 도시로 이사 가면서 산산조각 깨졌다. 시골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접한 세상은 낯설기도 하고 두렵고 한 것이었다. 차츰 모든 것을 알아가자 동시에 근심과 걱정도 생겨나는 것 같았다.

종종 어렸을적 그 순수의 시대로 돌아 갈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생각은 소년시절에도 청소년시절에도 청년시절에도 생각했었다. 유년시절은 일종의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자아개념이 없다. 따라서 사람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 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즐겁거나 괴로운 것에 대하여 동물적 반응을 보일 뿐이다. 소처럼 개처럼 사는 것이나, 아기처럼 사는 것이나 무분별과 무번뇌로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있어서는 같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산다고 해서 번뇌가 없어질까?

부처님은 잠재성향에 대해 말씀했다. 타고난 성품임을 말한다. 어린아기가 천진무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장함에 따라 탐욕이나 분노같은 잠재성향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아기가 중2가 되었을 때 확실히 나타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누구에게 이렇게 설했다고 기억하는가?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린아이의 비유로서 그대들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라고 말씀하셨다.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임을 말한다.

이 세상을 무분별로 살 순 없다. 마치 식물인간처럼 분별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무분별적 삶이라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살려고 한다면 외도의 삶이나 다름없다. 수행한다고 하여 몰라, 몰라.”라며 멍때리기한다면 역시 외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불선법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산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선법은 선법으로 쳐내야 한다. 마치 쐐기의 비유처럼 첫째, 그는 인상과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라고 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사띠(sati)하는 것이다. 사띠라는 선법으로 욕망과 같은 불선법을 쳐 내는 것이다. 마치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뽑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언제까지 사띠해야 하는가?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잠 들기 직전까지 해야 한다. 또 평생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라고 했다. 임종의 그 순간까지도 알아차림을 놓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언어로써 분별의 가르침을 설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분별해 보이겠다. 잘 듣고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S45.8)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언어로써 분별(vibhajja)하여 설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새겨야 한다. 늘 암송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늘 새기고 있어야 한다. 한번 듣고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8.82)


가장 먼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찾아가서 질문해야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길거리전도사들은 묻지도 않았음에도 설교하려 한다. 이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다. 부처님은 법을 청했을 때 알려 주었다. (Dhamma)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암기해야 함을 말한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머리에서 꺼내 쓸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먼저 알아야 한다. 이는 분별해야 함을 말한다. 알긴 알되 바르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경전외우기를 하는 이유라고 말 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Dhamma)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고 있다.

 

 

2020-12-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