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무임승차 하려는가?
언제까지 무임승차 하려는가?
12월 7일 밤 인터넷 서명을 했다. 현재 카톡방에 돌고 있는 검찰개혁촉구 불교인선언을 말한다. 급한 것 같다. 이번주가 검찰개혁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 한다.
종교계에서는 가장 먼저 천주교가 치고 나왔다. 천주교 신부와 수녀를 비롯한 무려 4천명의 성직자들이 시국선언을 한 것이다. 이럴때 당연히 “그럼 불교계는 무엇하고 있는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천승가회에서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서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그것도 출재가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하여 천주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성직자 위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불교계에서는 이번에도 따라가는 것 같다.
이제까지 불교계에서 먼저 치고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라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때에 스님들은 늘 뒷전이었다. 이를 중립적으로 말하면 ‘관망’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관’이다. 한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관망이고, 강 건너 불 보듯 하면 방관이다. 관망이나 방관이나 거기서 거기이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주도적으로 나서 본 적이 없다. 관망자 내지는 방관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영향력도 미약하다. 이번 검찰개혁에 대한 입장도 그렇다. 개별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스님도 있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 천주교 성직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하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미약하다. 스님들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스님들은 가만 있다. 강 건너 불 구경하는 듯하다.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은 희생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유공자들이 있었기에 이만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종교인들의 희생도 있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시기에 종교인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천주교가 주도하다시피 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천주교 성직자들이 나섰다. 우리 불교인들은 어쩌면 천주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심한 말로 ‘무임승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불교야말로 현실참여 종교라 볼 수 있다. 이는 ‘탁발’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매일 걸식했다. 차례로 돌아가면 밥을 빌어먹은 것이다. 그런데 탁발이야말로 강력한 사회참여수단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직접 접촉하기 때문이다. 밥을 건네 주고 밥을 받는 행위 보다 직접적인 것이 있을까? 재가자는 보시해서 공덕 쌓고 수행자는 청정한 삶을 살아서 좋은 것이다. 탁발은 수행자에게나 재가자에게나 서로 좋은 것이다.
부처님 별호 중에 ‘세간해(世間解)’가 있다. 부처님은 세상일을 잘 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해법도 있다. 그래서 니까야를 보면 재가자에 대하여 다양한 가르침을 펼치셨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기본이다. 자비의 가르침, 우정의 가르침, 부모자식간의 가르침, 환자의 가르침, 심지어 사업의 가르침 등 매우 다양하다. 당연히 ‘현실직시의 가르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리더의 손에 달려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기업의 최고 경쟁력은 최고경영자(CEO)의 역량으로 보고 있다. 만약 조직이나 단체에 지도자가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쇠락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더구나 한 나라의 왕이나 대신이라면 어떨까?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왕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왕자들도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왕자들이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사제들과장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사제들과장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도시와지방의 백성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도시와지방의 백성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해와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해와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면
행성들도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행성들도바르게 돌지 못하면,
한달과 반달이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한달과 반달이 바르게 돌지 못하면,
계절과년도가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계절과년도가 바르게 돌지 못하면,
바람이바르게 불지 못하고
잘못된방향으로 불면, 신들이 분노하게 된다.
신들이분노하면, 비가 바르게 내리지 않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바르게익지 않은 곡식들을 인간이 먹으면,
수명이짧아지고, 용모가 추하고
힘이쇠하고 질병이 많게 된다.” (A4.70)
마치 연쇄반응을 보는 것 같다.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우를 불러온다는 카오스효과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폭풍우 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해와 달이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권력자가 정의롭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했다.
지도자가 잘못된 길을 가면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의미를 더욱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잘못 가면,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
인간에게서도 마찬가지라.
최상자라고 여겨지는 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왕이 정의롭지 못하면,
왕국전체가 고통을 겪으리.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바로 가면,
지도자가 바른 길을 가기 때문에
모두가 바른 길을 따르네.
인간에게서도 마찬가지라.
최상자라고 여겨지는 자가
정의로우면,
그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왕이 정의로우면,
왕국전체가 행복을 누리리.”(A4.70)
여기 벤처회사가 있다. 대개 기술력에 승부를 건다. 그러나 회사의 미래는 기술력 보다 마케팅능력에 달려 있다. 아무리 첨단제품을 개발해도 팔지 못하면 사장되고 만다. 그렇다면 회사의 진정한 경쟁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최고경영자의 자질에 달려 있다.
벤처회사에 있어서 최고경쟁력은 기술력도 아니고 영업력도 아니다. 최고경영자의 역량이 최고경쟁력인 것이다. 은행에서 최고경영자의 자질을 보고 대출해 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리더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하물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어떠할까?
대한민국이 검찰개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른다.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정의롭지 않은 자가 자리에 있을 때 조직 모두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다. 괴물이 되어 버린 검찰을 개혁하고자 종교인들이 일어서고 있다.
궤도를 벗어나 폭주하고 있는 기관차를 멈추고자 한다. 이에 천주교 성직자들이 앞장섰다. 언제나 그렇듯이 불교계는 관망을 넘어 방관하고 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무임승차하려 하는가?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
(Thag.670)
2020-12-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