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애경은 우정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0. 08:42


자애경은 우정의 가르침


숫따니빠따에 자애경(Sn.1.8)이 있다. 테라와다불교 삼대예불문중의 하나이다. 삼대예불문은 자애경, 보배경, 축복경을 말한다. 필수경을 모아 놓은 쿳다까빠타(khuddakapāha: 小誦經)에도 실려 있디. 이 세 경은 동시에 수호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회가 열리면 독송한다. 한국불교의 반야심경이나 천수경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경이다.

 

자애경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다. 초기불교 공부모임을 할 때 독송되고 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니까야가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고 위빠사나 수행법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감에 따라 자애경도 널리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자애경은 빠알리어로 멧따숫따(mett
ā sutta)라고 한다. 여기서 멧따는 자애로 번역되어 있지만 문자적으로 우정의 뜻이다. 멧따에 대하여 영어로 ‘loving-kindness’라 하여 사무량심 중의 하나인 자애로 번역한다. 그러나 빠알리사전을 보면 ‘amity; benevolence’의 뜻도 있다. 여기서 ‘amity’는 친선, 친목, 우호의 뜻이다. 친구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멧따가 우정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은 청정도론에서도 발견된다.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또는 자애라는 것은 친구에 대한 태도나 친구에 대한 행동을 말한다.”(Vism.9.92)라고 했다. 이렇게 친구 또는 우정의 뜻이 있는 멧따는 기쁨과도 관련이 있다. 이는 기쁨이라 번역되는 무디따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 친한 친구가 있다. 만나면 아주 반가울 것이다. 그때 기쁨이 일어난다. 그래서 무디따에 대하여 사랑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 기뻐하듯, 이와 같이 일체의 뭇삶에 대해 기쁨을 가득 채운다.”(Vism.9.85)라고 했다.

 

멧따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보면 자애를 뜻하는 ‘loving-kindness’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Friendliness, friendly feeling, good will, kinduess, love, charity’의 뜻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멧따에 대하여 우정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애와 유사한 말은 사랑이다. 빠알리어로 삐야(piya)라고 한다. 삐야는 남녀간의 사랑의 의미로 사용된다. 빠세나디 왕과 말리까 왕비의 대화를 보면 삐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삐야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의미로도 사용된다. 유일신교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이유라고 본다.

불교에서는 사랑보다는 자애를 많이 사용한다. 이는 삼대 예불문 중에 멧따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엄밀하게는 우정이다. 왜 우정인가? 연민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31번 경을 보면 친구의 네 가지 조건 중의 하나가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친구이다.”(D31.1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친구의 조건은 무엇일까? 1 조건은 도움을 주는 사람” (D31.16)을 말한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면 친구라고 볼 수 있다. 또 연민할 줄 알면 친구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연민할 줄 안다면 이성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

친구는 우정을 기본으로 한다. 우정은 다름 아닌 자애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자애를 계발하면 자연스럽게 연민과 기쁨도 계발된다는 것이다. 평정은 네 번째 선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애를 닦으면 사무량심이 계발되는 것이다.

멧따경은 자애를 계발하는 방법에 대해 설해져 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아마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말일 것이다. 이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신의 사랑에 대한 것도 아니다. 연민할 줄 아는 것이다.

멧따경에서 가장 핵심구절은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타(sabbasatt
ā bhavantu sukhitattā)”(Stn.147)이다. 이 말은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는 뜻이다. 지옥중생에서부터 천상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애의 마음이고 동시에 우정의 마음이다. 모든 중생을 친구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모든 존재 안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줄 안다. 이 말은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은 남도 우호적으로 대함을 말한다. 반대로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면 남도 적대적으로 대한다. 자기혐오가 있는 사람은 남도 혐오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애수행은 먼저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해야 한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남도 친구로 여긴다.

아직까지 멧따경을 우정경으로 번역한 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 고미숙선생의 유튜브 강연을 듣다가 문득 멧따경을 우정경으로 이름 붙여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부처님은 우정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다. 이때 우정을 필요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이라는 사무량심이다. 자애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연민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기쁨은 상대방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이고, 평정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여기 친구같은 아내가 있다. 경에 따르면 친구가 멀리서 오면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 여기 아내가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A7.6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친구는 기쁨을 주는 존재임을 말한다. 자애와 연민으로 우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거든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애를 계발해야 한다. 자신을 대하듯 타인을 대할 때 자애의 마음은 계발된다. 자애가 계발되면 자연스럽게 연민과 기쁨도 따라온다. 자애, 연민, 기쁨이 바탕이 되어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의 우정의 가르침이다. 멧따경을 우정경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2020-12-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