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세계여행
스님의 세계여행
출가자가 부러울 때가 있다. 그것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테리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2)
로히니 장로니가 읊은 게송이다. 출가하기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수행자를 찬탄하는 말이다. 마을을 떠날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이 참으로 멋지다.
사람들은 함부로 떠나지 못한다. 그것은 가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으면 훌쩍 떠날 수가 없다. 지금 여기에 많은 재산이 있다면 훌쩍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처자식이 있다면 ‘나몰라’라 하며 자취를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 소유하고 있으면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는 미련없이 떠날 수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세 벌의 옷과 발우 뿐이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아름답다. 그래서 소녀 로히니는 아버지에게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종종 스님들의 여행기를 접한다. 주로 순레여행에 대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은 법정스님의 인도여행기였다. 80년대 쓰여진 책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인도에 한번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행기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인도 공항에 내렸을 때 거지떼에 대한 글이다.
법정스님은 인도 거지에 학을 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글에서 달라붙는 거지 떼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달려 드는 거지 떼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여름 빤냐완따 스님 공양했었다. 그때 점심을 함께 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얀마에서 수행에 대한 성과를 낸 후 인도전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 스리랑카까지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도공항에서 달려 드는 거지떼들을 보고 그만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순간 이제까지 수행성과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은 경계에 부딪쳐야 봐야 진짜 모습이 나온다. 평상시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지, 얼마나 정직한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없다. 막상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안거가 끝난 다음에 만행을 한다. 자신의 경계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자신의 경계를 시험하는데 있어서 만행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를 벗어나 해외로 나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성지순례 한다는 명목으로 많이 나간다.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끝나고 나면 스님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많이 봤었다.
공항에는 해외로 나가는 스님을 많이 볼 수 있고, 해외 현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성지순례가 아닌 사적 세계여행을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최근 에스엔에스상에 어느 스님은 세계여행기를 발표했다. 몇 년간에 걸려 수십개 나라를 여행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셀 수 없는 사진을 곁들였다고 한다. 이런 여행에 대하여 수행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계를 시험하고자 여행한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지순례가 아닌 사적인 세계여행이라면 동의하기 힘들다.
여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출가수행자가 해외성지수행이라는 명목으로 나간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행은 ‘즐기는’ 것이다. 설령 배낭여행 간다고 하더라도 즐기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구도여행도 있기 때문이다.
구도여행은 즐기는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목숨을 건 여행이기 쉽기 때문이다. 법현스님의 불국기, 현장스님의 여행기는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사막을 건널 때 죽은 자의 뼈무더기를 이정표 삼아 걸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행은 구도여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법여행도 있다. 이는 즐기기 위한 여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도 이교도가 사는 곳에 전법여행하러 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 제자 중에 뿐나가 있었다. 뿐나는 안거가 끝나고 전법하고자 했다. 인도 서쪽지방 이교도가 많은 쑤나빠란따까 지방이다. 이에 부처님은 “뿐나여, 쑤나란따까의 사람들은 포악하다.”(S35.88)며 우려했다. 그럼에도 뿐나는 가고자 했다.
부처님은 마지막으로“그대의 목숨을 빼앗으면 뿐나여,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우려했다. 이에 뿐나는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S35.88)라고 말하면서 현지로 떠났다.
뿐나는 현지에서 전법활동하다가 죽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 때 존자 뿐나는 그 우기 중에 오백 명의 재가신도를 교화시켰고 그 우기 중에 세 가지 명지를 증득했고 그 우기 중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35.88)라고 했다. 이교도의 칼을 맞아 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한철 교화하는 중에 죽음을 맞은 것은 사실이다.
생업이 있는 사람들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 해외성지 가는 것도 특별한 마음 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직장 다니는 사람이 휴가내서 성지순례나 해외여행 다녀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유직업을 가진 사람도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현지에서 느낀 것이 있다. 대부분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생업이 있어서 꼼짝 못하지만 여성들은 자유로이 시간 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또 하나는 스님들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성지순례 가 보면 스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시기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공항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 가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여행은 즐기는 것이라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은 호화여행이기 쉽다. 또 먹방여행이기 쉽다. 사성급호텔에서 머물며 최고급요리를 먹는다. 눈으로는 최상의 것을 본다.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왕족여행이기 쉽다.
스님이 해제철에 만행하는 것은 출가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구도여행도 아니고 전법여행도 아닌 일반여행을 한다면 즐기는 여행이기 쉽다. 전세계적으로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방랑하는 모습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여법한 출가수행자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면, “세계여행을 하지 말라. 세계여행하면 악작죄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2020-12-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