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보, 멍청이가 되라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2. 08:12

바보, 멍청이가 되라고?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잣대가 있다. 삼법인을 말한다. 무상, , 무아를 특징으로 하는 세 가지 법의 도장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그럼 불교인은?

불교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하고 가장 기본적인 잣대는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승가(Sangha)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삼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있다. 삼보는 한마디로 부처님의 삼보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셨던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삼보에서 부처님이 빠진다면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불교인이라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지 않는다면 불교인이 아니다.

법보를 부정하는 스님이 있다.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다. 그 스님은 전승된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구전되어 온 과정에서 생각이 들어 갈 수 있고, 또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법보로서 가르침을 의심했을 때 불교인이라 볼 수 있을까?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이 있다. 윤회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모두 분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윤회가 있다면 힌두교식 윤회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사성계급을 고착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영향력 있는 스님이 말했을 때 불자들은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부정하는 구업이 된다. 동시에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공부가 되어 있지 않아 법보로서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선종이 득세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큰스님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세칭 큰스님이 한마디 하면 진리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느 유명선사는 이 공부를 하려면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오래전 불교방송에서 들은 것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하라고 했다. 과연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공부가 잘 되는 것일까? 이런 말은 부처님 가르침과 다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갈애를 없애기 위해서는 나태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말고, 배우고, 새김을 확립하고

가르침을 헤아려 단호히 정진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가라.” (Stn.70)


가장 고층 경전인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선사들이 말하는 바보, 멍청이가 되라.”라는 말과 정반대 되는 말이다. 선사들은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하라고 했지만 부처님은 사띠(새김)’하라고 했다.

불교인들은 대체로 무지하다. 그것은 가르침을 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승된 부처님 원음이 있음에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큰스님의 법문에 크게 의존한다. 그런데 분별하지 말라.”거나, 바보, 멍청이가 되어라.”라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수행의 방편으로 한 말일 수 있다. 그런 한편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불자가 무지할수록 스님의 권위는 올라갈 수 있다.”라고.

성직자는 신도가 많이 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유럽 중세시대 때도 그랬다. 글자를 모르는 신도는 성직자위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성직자의 권위는 높아져 갔다. 신도가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높아져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많이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라고 했다. 이렇게 신도가 많이 알게 되었을 때, 신도가 지혜를 갖추었을 때 법상에서 함부로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신도가 경전적 근거를 들이대며 그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대략난감해 할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면 법보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법보의 부정은 결국 삼보의 부정이 된다. 삼보를 부정하는 자를 불교인이라 할 수 있을까?

 

 

2020-12-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