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뗏목을 지고
가르침의 뗏목을 지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장이 왔다. 일반택배와 달리 돈을 요구했다. 운송비 2만원을 달라는 것이다.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주문할 때 써 있었다고 한다. 줄 수밖에 없었다. 높이가 2미터에 가로폭도 1미터 20에 달하니 그럴 만했다. 책장비용 5만6천과 운송비용 2만원을 합하여 7만6천원 들었다.
작은 사무실에 가구가 들어 오니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 화이트그레이 색상을 가진 책장을 탁자 맞은편 벽에 놓았다. 벽에 있었던 대동여지도 모양의 한국전도 액자를 떼었다. 무려 14년 만이다. 그동안 오로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때가 되니 책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한 것이다. 마땅히 걸어 둘 데가 없어서 창고공간 한쪽 켠에 치워 놓았다. 인생도 이런 건 아닐까?
쓸모 없으면 퇴출당한다. 40대 때 그랬다.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쫓겨나는 것이다. 더이상 도움을 주지 못할 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40대때 퇴출은 잘된 것이다.
책장은 5단이다. 책장전체를 인생의 흔적으로 채우고자 했다. 아래 두 단은 개발했던 제품으로 채웠다. 중간 두 단은 업무용노트 등으로 채웠다. 상단 한 단은 문구점에 인쇄제본 의뢰한 책으로 채웠다. 모두 자신과 관련 있는 것들이다.
개발품, 업무노트, 쓴 책을 보니 마치 과시하는듯 보였다. 누군가 사무실에 찾아온다면 아마 틀림없이 삶의 흔적들을 볼 것이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일 것 같다. “나, 이렇게 살았어.”라고.
책장을 보면서 뗏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뗏목을 말한다. 나이가 되어 지난날을 회상하며 뗏목을 꾸린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도 동시에 과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죽으면 가져 갈 것도 아닌데 집착한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 유품은 정리된다. 대부분 버려지게 된다. 죽음과 동시에 삶의 흔적도 지워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모아 놓은 개발제품, 업무노트, 쓴 책도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동안은 전시해 놓고자 한다. 마치 사람들이 애장품을 전시해 놓듯이.
개발제품, 업무노트는 애지중지 하던 것이다. 이제까지 박스신세를 면치 못했으나 때가 되어 책장에 모셔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엮어 놓으니 세상사람들을 향하여 “나,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남들이 본다면 집착이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뗏목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뗏목은 버려야 할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는 금강경에서 “법상응사 하황비법 (法尙應捨 何況非法)”이라는 뗏목의 비유로 알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뗏목을 지고 갈 순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깨달음으로 이르게 한 가르침(Dhamma)이 좋다고 하여 계속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뗏목을 타고 저언덕으로 건너 갔다면 그 뗏목을 버리라고 말한다. 뗏목이 고맙다고 하여 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도 그렇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좋다고 하여 수지독송하는 것도 좋지만 때가 되면 내려 놓아야 함을 말한다.
뗏목은 버리는 것일까 내려놓는 것일까? 금강경에서는 “법상응사”라 하여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내려 놓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M22)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Alagaddūpamasutta)’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보면 금강경에 나오는 뗏목의 비유가 니까야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니까야에서는 뗏목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 어디에도 “뗏목을 버려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물에 침수 시켜 놓으라고 했다. 다음 사람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의 말씀으로 저언덕에 건너갔는데 그진리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법귀의(法歸依)한다. 삼귀의 할 때 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한다.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가르침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은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법(正法)이 오래간다. 그렇다면 버려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진리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M22)라고 했다.
불교의 최종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가르침을 뗏목으로 하여 저언덕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 거센흐름(ogha)이 있기 때문이다.
저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폭류(暴流)를 건너가야 한다. 뗏목을 탔다고 하여 자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경전을 외웠다고 하여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개념적 의식을 확장했다고 하여 건너가는 것도 아니다. 폭류를 건너기 위해서는 진리의 뗏목뿐만 아니라 의지와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M22)라고 했다. 건너가기 위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폭류를 건너기 위해서는 가르침의 뗏목도 있어야 하고 의지와 노력도 필요로 한다. 다 건넜으면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M2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집착을 내려 놓아야 함을 말한다. 포기해야 할 것은 의지와 노력과 같은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이지 선한 진리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법상응사(法尙應捨)라는 말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매일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어렵게 외운 빠알리팔정도경을 이제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외운다. 그런데 한번 암송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해냈다.”라는 생각으로 충만해진다. 이것도 초선에 해당될 것이다. 위딱까(思惟)와 위짜라(熟考)가 있는 초선을 말한다. 초선에서는 기쁨과 행복이 있는데 충만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이를 말할지 모른다.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 중에 법수념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공덕을 늘 생각하는 것이다. 팔정도경을 암송하는 것도 일종의 법수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마타명상주제는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로 개념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간 사람은 집착이 없다. 그렇다고 진리를 버린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천한 자는 진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대들을 해탈하게 하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할 것이다.” (M22)라고 했다.
높이 2미터에 달하는 5단 책장을 보니 뗏목처럼 보였다. 과거 행적을 실어 놓은 뗏목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분만 실려 있을 뿐이다. 매일 글을 쓴다고 해도 떠오른 생각 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스로 이룩한 것을 바라보며 대견해한다. 남도 그렇게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뗏목을 지고 가는 것이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르침의 뗏목을 지고 간다.
2021-0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