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댓글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28. 10:57

댓글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스님

 

 

댓글을 달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가장 먼저 무시라는 말이 떠 오른다. 무시당한 느낌이다. 스님 페이스북 계정에 댓글 단 것을 말한다.

 

스님들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특정할 수는 없지만 냉정한느낌이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이미지가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일반사람들 모습과 다르고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있어서 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하면 표가 나고 비난받을 수 있다. 가상현실이라고 볼 수 있는 에스엔에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아하는 스님이 있다. 존경하는 스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님이 글을 올리면 좋아요추천을 하고 댓글까지 단다. 공감한다는 표현이다. 올린 글에 대하여 논쟁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연히 답신을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을 수 있다.

 

많은 댓글에 일일이 답글을 단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럴 경우 좋아요아이콘 한방으로 끝낼 수 있다. 스님에게 최소한 좋아요한방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 글을 보지 않은 것일까?”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급기야 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은 감정이 싹트게 된다. 물론 오해일 수 있다. 바빠서 못 본 것 일수 있고 놓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한두번이다. 상습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불쾌해서 손절을 생각해 보게 된다.

 

열심히 댓글을 달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때 더 이상 관심 보일 수 없다. 점차 멀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감정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스님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정성껏 답글 달아 주는 스님이 훨씬 더 많다. 답글 달 여유가 없으면 그 흔한 '좋아요' 한방 눌러 준다. 이것이 에스엔에스에서 예의이고 페이스북에서 예절이다.

 

유행가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있다. 가사 중에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말이 있다. 여자를 두고 떠나 간 남자를 원망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재가불자가 댓글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스님은 다 그래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느 스님은 스님이라고 하여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댓글 단 것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거 무시하는 거 아냐?”라며 스님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스님이 페이스북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 말은 스님이 에스엔에스를 해도 될까?”라는 말과 같다. 스님도 문자를 하고 카톡을 한다. 스마트폰이 있기 때문에 전화통화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에스엔에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셨을까? 재가자가 스님이 에스엔에스 한다고 비난하면 아마 틀림 없이 에스엔에스를 하지말라. 에스엔에스를 하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율장에 에스엔에스를 하지 말라는 항목을 추가했을 것이다.

 

율장은 수범수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죄를 범하고 제도가 따르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법을 만드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그런데 율장은 매우 방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물론 예외 규정도 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율을 만든다면 무한정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한청정계율을 말한다. 율을 다 만든다면 번뇌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출가수행자들에게 스마트폰을 갖지도 말고 에스엔에스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해탈과 열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반적으로 냉정한 이미지이다. 이 말은 자비심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스님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한 두 스님에 의하여 전체 스님이 매도 당할 수 있다. 억울할지 모르지만 현실이 그렇다. 모든 종교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한 종교인이 개판치면 해당 종교가 도매금으로 매도 당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수행자가 그렇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

 

 

상윳따니까야 향기도둑의 경에 나오는 게송이다. 하늘 사람이 출가수행자

에게 한 말이다. 어느 수행승이 탁발을 마치고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 향기를 맡고 있는 것에 대하여 향기도둑이라고 말한 것이다. 단지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향기도둑이라니!

 

수행승은 억울 했을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연꽃이 보기 좋아서 꺽어서 가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지적하지 않고 단지 향기만 맡았을 뿐인데 도둑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행승의 행위는 엄밀히 말하면 도둑질에 해당된다. 이는 오계에서 불투도계가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향기가 난다고 하여 코를 대는 것은 허락받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향기도둑이라 한 것이다. 수행승은 졸지에 도둑놈이 되었다.

 

똑 같은 행위를 해도 비난받는 강도가 다르다. 진보진영 사람이 이중계약서를 작성하면 비난받지만, 보수기득권 사람이 작성하면 비난을 덜 받는다. 이는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층이 잘못을 저지르면 비난받는다. 성직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비난받는 것도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스님이 되었는가? 출가목적이 있을 것이다. 생계형이나 도피형 출가라면 출가목적이 바른 것이 아니다. 출가했다면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탁발에 의지하는 것도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소유하지 않는 삶이다. 물질적 소유뿐만 아니라 정신적 소유도 내려 놓아야 한다. , , 치를 소멸하는 삶도 무소유를 실천하는 삶이다.

 

수행자 습관적으로 연꽃 향기를 취했다면 이는 집착이 된다. 이를 가엽게 여긴 하늘사람이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도둑이네.”(S9.14)라고 한 것이다. 하늘 사람은 수행승이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충고해준 것이다.

 

사이버시대에 스님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향사과와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필요 없을 것이다. 선원에서 사는 수행자에게 스마트폰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며 사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은 필수가 되었다. 어떤 이는 신체의 장기와 같다고도 말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기 시대에 에스엔에스에도 예절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는 글을 달았다면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시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님의 이미지가 아무리 냉정해도 공감하는 댓글 단 것에 대하여 좋아요한방 누를 시간적 여유가 없을까? 한 두 번 더 시도해 볼 것이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손절하려 한다.

 

 

2021-0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