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아니라고 말 해도 한번 아닌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 해도 한번 아닌 것은 아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요즘에는 글로 죽일수도 살릴 수도 있다. 말이나 글은 모두 언어적 형성이기 때문에 같은 것으로 본다. 모두 구업(口業)에 해당된다.
에스엔에스 시대이다.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에 한 구절의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람을 저격했을 때 그 파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의업으로 인해 번뇌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왜 거친 언어적 행위를 했을까? 후폭풍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발끈한 것은 원인이 있다. 과거의 의업이 쌓이고 쌓여서 구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삼 팔정도에서 삼마상깝뽀(正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글을 썼다. 경전의 훌륭한 문구를 이용한 글쓰기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번번이 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마상깝뽀에서 브야빠다(vyāpāda)를 말한다.
브야빠다를 분노 또는 성냄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의(惡意), 악한 생각에 더 가깝다. 흔히 악의적이라고 말 할 때 그 악의를 말한다. 그렇다면 악의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사람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있었다. 그 사람으로 부터 모욕, 무시, 없신여김 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던 것이다.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잊혀진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영역에 콤플렉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콤플렉스를 우리말로 응어리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한이다. 마치 폭발물 같다. 언제든지 건들면 터지게 되어 있다. 그 사람 이름만 접해도 자동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과거 안좋았던 일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마치 오늘날 유튜브에서 키워드 검색하면 관련된 것들이 떠 오르는 것과 같다.
불에 기름붓는 격이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을 때 불에 기름 붓는 격이 된다. 특히 진리관에 대한 것이다. 종교가 다르면 문제되지 않는다. 서로 각자 믿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믿음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리관이 다르다면 심각한 문제로 본다.
진리관이 달랐을 때 두 가지 대응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무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간여하는 것이다. 가만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간여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더구나 발끈 했을 때 일시적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최근 에스엔에스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그렇다.
결국 또 악화되고 말았다. 계속 악순환이다.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 글을 접하자 마치 유투브에서 에이아이(AI) 시스템이 작동하듯이 관련된 과거기억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이성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상태에서 타격을 주고자 했다. 결국 저격의 글이 되었다.
화는 화를 부른다. 저격의 글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신공격을 한 것이 아니다. 욕설도 아니다. 단지 진리관이 다른 것에 대하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다. “윤회는 설이 아니라 법칙입니다.”라는 말이다.
불교인으로서 윤회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는 불자들도 있다.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서 윤회를 부정하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철학이 될 것이다. 종교성이 상실된 불교철학을 말한다.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윤회는 확실하다. 더구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보면 더욱더 확고해진다. 불교공부를 하면 할수록 믿음은 더욱더 강화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교리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될 때 확신이 생겨난다. 이런 믿음를 삿다(saddha), 즉 합리적 믿음이라고 한다. 윤회는 합리적 믿음에 따른 것이다.
윤회를 믿는다. 연기법에 근거한 합리적 믿음이다. 그럼에도 학계의 권위자가 윤회를 부정하는 언사를 했을 때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과거 안좋았던 감정까지 줄줄이 엮였을 때 툭 던진 것이다.
“윤회는 설이 아니고 법칙입니다.” 이 한마디 말이 발단이 되었다. 사실 문제 될 것도 없는 상식적인 말이다. 그러나 권위자에게는 저격하는 말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윤회를 인정하면 그 동안의 성과가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결국 사과했다. 절차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위를 한 것에 대하여 사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윤회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권위자가 아니라고 말 해도 아닌 것은 아니다. 연기법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윤회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연기법과 업의 법칙이 결합되었을 때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회의 법칙이 된다. 그런 윤회는 영혼이 윤회한다는 힌두교식의 유아윤회론이 아니다. 조건발생에 따른 연기법적 윤회이다. 이런 조건발생적 무아윤회는 초기경전에서 차고도 넘친다. 지난 10여년 글쓰기에서 수없이 쓴 것이다.
블로거에게는 권위가 없다. 타이틀도 지위도 없기 때문에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크게 의지하는 것은 경전이다. 가르침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권위자라고 하더라도 가르침을 넘을 수 없다. 권위자가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지만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으면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으려고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안보이는 것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감각능력에 크게 의존할 경우 저세상, 내생, 윤회와 같은 말은 단지 단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결과 지금 여기에서 삶에 충실하자고 말할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이 된다.
자신의 깜냥(感量)과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면 윤회는 없는 것이 된다. 더구나 권위까지 갖추었다면 그의 말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의 결과는 혹독했다. 아무런 권위가 없는 블로거는 결국 사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스스로 물러 났다. 그래도 지구는 돌아 간다.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는 확고하다. 믿고 의지할 것은 가르침밖에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한번 아닌 것은 아니다.
2021-02-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