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이 서지 않으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판단이 서지 않으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나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어제가 그랬다. K선생의 말을 들었더라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판단한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았다. 사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실수도 있다. 잘못된 선택이나 판단으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럴 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가전제품을 한번 사면 10년 써야한다. 그런데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의 선택이 그렇다. 사람들은 종종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이라거나, 또는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며 후회한다. 선택한 것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잘 판단하고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재난프로에서 본 것이 있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두 갈래의 길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조난자는 “단이 서지 않으면 오른 길로 가라.”는 어른의 말을 상기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도 있다.
“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
재난프로는 외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맬 때 지혜의 노인은 늘 오른쪽 길을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서양 지혜의 노인은 상윳따니까야를 읽고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왼쪽길을 버리고 바른쪽 길로 가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식인 것 같다. 그렇다고 방향으로 생각하여 왼쪽길이 나쁜 길이라고 보면 진영논리에 갇힐 수 있다. 두 래 길에서 판단이 서지 않으면 바른 길로 가야한다. 이때 왼쪽길도 바른 길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두갈래 길에서 선택을 해야할 때가 있다. 고속도로에서 네비를 보고 달리지만 두 래 길에서 잘못 단하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수 있다. 어제도 그랬다. K선생이 숙고해서 말한 것을 간단히 무시해서 시간낭비를 했고, 또 귀가길에서 네비를 잘못 보아서 또 시간낭비를 했다. 어쨋든 집에 무사히 오기는 했지만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K선생에게 미안했다.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하면 십년을 허비할 수 있다. 아니 일생을 고통속에서 살 수 있다. 심지어 다음생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바른길로 가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른길은 팔정도이다. 바른길이라 하여 좌우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의 길이 바른 것이다. 이런 논리로 보면 팔정도가 아닌 것, 즉 팔사도(八邪道)는 바른 길이 아니다.
판단이 서지 않으면 왼쪽길을 버리고 바른쪽 길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늘 오른 길, 바른길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왼길, 바르지 않은 길로 가기도 한다. 그결과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한 경우가 많다. 선택이나 판단을 잘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견해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팔정도의 길과 팔사도의 길이 있다.
고속도로에서 잘못 판단하면 십분이 허비된다. 커피 마실 목적지를 잘못 선택하면 두세시간이 허비된다. 가전제품을 잘못사면 십년 써야 한다. 사람과 잘못 인연 맺으면 일평생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이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세상에서도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잘못된 견해가 왜 최악일까? 이는 부처님이 외도의 스승 막칼리 고살라를 예로 들어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리석은 막칼리는 생각건대 인간의 그물로 세상에 나서 많은 뭇삶들에게 불익, 고통, 손실, 상실을 가져온다.”(A1.33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막칼리 고살라는 사명외도라 불리우는 아지위카의 결정론자이다. 그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되어 있어서 운명지어져 있다고 했다. 이런 운명론은 인간의 노력을 무력화하게 만든다. 강한 결정론은 운명론이 되고 또한 무인무연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겹쳐서 최악이라 한 것인데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을 부정한 것이 된다.
부처님은 외도스승 막칼리 고살라에 대하여 최악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머리털로 입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의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막칼리 고살라의 견해를 최악이라고 한 것은 업과 업의 견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머리털로 만든 옷을 입은 것처럼 혐오스러운 견해임을 말한다. 그래서 결정론, 운명론, 무인무인론, 이렇게 삼종세트로 구성된 막칼리 고살라의 견해에 대하여 최악이라고 한 것이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왼길과 오른길,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잘못 선택하면 죽음의 길이다. 윤회의 길에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다 잘못된 선택이어도 견해만큼은 바른 선택이 되어야 한다. 이세상과 저세상의 행복은 견해에 달려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처럼 커다란 죄악이 되는 다른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A1.388)라고 말씀하셨다. 팔정도의 길을 갈 것인가 팔사도의 길을 갈 것인가? 오늘도 "에왕 메 수땅"하며 빠알리 팔정도를 나즈막히 소리내어 암송해 본다.
2021-02-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