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18. 12:04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불교인들은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교인이라 하지만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불교인이라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무늬만 불교에 현혹되는 것 같다. 불교인처럼 보이지만 불교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전승되어 온 가르침과 주석에 의지해야 한다.

 

윗자짜라나삼빤나(vijjācaraa-sampanna)

 

부처님 별호 중에서 윗자짜라나삼빤나(vijjācaraa-sampanna)가 있다. 한역으로 명행족(明行足)이라고 한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본에서는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라고 번역했다. 이 별호는 명지를 뜻하는 윗자와 덕행을 뜻하는 짜라나의 합성어이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춘 분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면 경전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방대하여 잘 모를 수 있다. 이런 경우 마치 참고서 같은 청정도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 불수념과 관련하여 부처님의 열 가지 특징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윗자짜라나삼빤나이다.

 

부처님 그분은 인간으로 오신 최상의 존재이다.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로서 인간이다. 누구나 부처님 그분처럼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명지와 덕행에 있어서 그분은 어떤 조건을 갖추었을까? 청정도론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KPTS본에서는 각주를 이용하여 7페이지 걸쳐 설명해 놓았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 본에서 각주 없이 두 페이지에 걸쳐 원문만 번역해 놓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번역된 책이 더 상세하고 친절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특히 KPTS본에서는 부처님의 명지와 덕행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런 설명을 보면 건졌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부처님의 명지는 신통과 관련되어

 

부처님의 명지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세 가지 명지와 여덟 가지 명지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의 경’(M4)암밧타의 경’(D3)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신통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명지는 신통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통이라고 말하면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신통을 보여줘봐. 그러면 믿을께.”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신통을 체험하기 바랍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다.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명지가 있다. 이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부처님은 세 가지 신통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고서 참나를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은 빠알리삼장에서 보이지 않는다.

 

율장대품을 보면 가장 처음에 나오는 장면이 부처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초야, 중야, 후야에 십이연기를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 등 니까야에서는 초야에 숙명통을, 중야에 천안통을, 후야에 누진통을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네 번째 선정단계를 통하여 신통으로 깨달음을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부처님이 신통으로 깨달음을 이룬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는 경전을 읽어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오늘날 어떤 불교인들은 윤회를 부정한다. 오로지 현세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널리 알려진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초야에 숙명통으로 우리가 윤회하는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나 자신의 다양한 전생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했습니다.”(M4.31)라고 말했다. 이는 네 번째 선정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이 신통인 숙명통으로 전생을 본 것은 우리가 윤회하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이어서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중생들이 나고 죽는 것을 보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생들이 업의 존재임을 말한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M4.3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누진통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숙명통과 천안통으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알고 나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마음이 해탈된 것을 의미하고 또한 번뇌에서 해탈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번뇌에서 해방되었을 때 스스로 외치는 말이 있다.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다. 누가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한다. 이를 아라한선언이라고 한다. 번뇌에서 벗어난 자들은 누구나 이렇게 스스로 선언한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후야에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은 세 번의 앎을 통하여 그날 밤 깨달았다. 초야의 숙명통, 중야의 천안통, 후야의 누진통으로 부처가 된 것이다. 새벽별을 보고서 이것을 알았다든가 참나를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없다.

 

부처님이 세 가지 지혜로 안 것에 대하여 세 가지 명지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나타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M4.37)라고 바라문에게 말했다.

 

여덟 가지 명지도 있는데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의 명지에 대하여 세 가지 명지뿐만 아니라 여덟 가지 명지도 있다. 이를 디가니까야 암밧타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KPTS본 번역에서는 친절하게도 각주에 암밧타경에 실려 있는 팔명(八明)에 대하여 소개해 놓았다.

 

여덟 가지 명지, 팔명은 어떤 것일까? 팔명 역시 신통에 대한 것이다. 통찰에 대한 앎,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앎, 다양한 신통에 대한 앎, 하늘귀에 대한 앎(天耳通),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他心通), 이렇게 다섯 가지 앎과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신통에 대한 앎이 더해져서 여덟 가지 앎이 된다. 이러한 앎은 다름 아닌 지혜이다. 신통으로 얻어진 지혜를 말한다.

 

신통이 왜 지혜일까? 이는 법구경에서 명상에서 광대한 지혜가 생기고 명상하지 않으면 광대한 지혜가 부서진다.”(Dhp.282)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명상을 해서 선정에 들어야 지혜가 생겨남을 알 수 있다. 명상에서 생겨나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여기서 명상이란 40가지 명상주제를 말한다. 이러한 명상을 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신통역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부처님의 자비는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다면 반쪽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갖춘 분이다. 그래서 윗자짜라나삼빤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자비는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덕행과 함께 했을 때 가능하다. 지혜 있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덕행을 말한다. 이를 짜라나라고 한다.

 

부처님의 덕행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다섯 가지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계행에 의한 제어, 감각능력의 문의 수호,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깨어 있음의 실천, 일곱 가지 올바른 성품(七正法), 네 가지 미세한 물질계의 선정(四禪定)을 말한다.

 

부처님의 덕행에서 일곱 가지 올바른 성품(七正法)이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맛지마니까야의 중간오십편 가운데 설한 방식대로 일체를 알아야 한다.”(Vism.7.31)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경이름을 알려 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KPTS본에서는 각주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의 칠정법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학인의 경’(M53)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일곱 가지 덕목은 1)믿음을 갖추는 것, 2)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3)창피스러워할 줄 아는 것, 4)많이 배우는 것, 5)열심히 노력하는 것, 6)사띠를 확립하는 것, 7)지혜를 지니는 것이다.

 

칠정법에서 믿음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내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덕목에 대한 믿음이다. 여섯 번째 항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경에 따르면 그는 최상의 새김과 분별을 갖춥니다. 그는 오래 전에 행한 것이나 오래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하고 회상합니다.”(M53.11)라고 되어 있다. 이는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경에서 수행과 관련된 사띠는 삼빠자나와 함께 쓰여 사띠를 확립하여 알아차리고라고 표현되어 있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기억의 의미가 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새기고 있어야 함을 말한다.

 

가르침을 기억한다는 것은 분별함을 말한다. 언어로 된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분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좌선 등 수행에서나 적용되는 말이다. 일상에서는 늘 분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칠정법에서 사띠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이라고 했다. 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부처님은 명지와 덕행을 갖춘 분이다. 이를 한역에서는 명행족이라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분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윗자짜라나삼빤나에 대하여 명지를 갖춤은 일체지성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덕행을 갖춤은 크나큰 연민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Vism.7.32)라고 했다.

 

부처님에 대하여 일체지자라고 한다.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뜻으로 삽반뉴(sabbaññū)라고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명지를 갖춘 부처님에 대하여 일체지성이라고 했다. 이는 삽반뉴따(sabbaññutā)를 번역한 것이다. 세 가지 명지와 여덟 가지 명지를 갖춘 분에게 붙여주는 칭호이다. 그런데 일체지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체지성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민의 마음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마하까루나(mahākaruā)라 하여 크나큰 연민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대비(大悲)라고 한다.

 

 

윗자짜라나삼빤나에 대한 청정도론 해석에 따르면 부처님은 일체지성과 대비를 잦춘 자가 된다. 지혜와 자비를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같은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KPTS본에서는 각주에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주석서 빠라맛타만주싸에 실려 있는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명지의 갖춤은 일체지성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덕행의 갖춤은 대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존은 지혜로 진리(dhamma)의 왕국에 들어가고 자비로 진리(dhamma)의 시여자가 된다.

 

지혜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자비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꿰뚫는다. 지혜로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비로 타자의 고통을 치유한다. 지혜로 열반과 대면하고, 자비로 열반을 성취한다. 지혜로 자신을 제도하고, 자비로 타자를 제도한다. 지혜로 깨달은 님의 상태를 완성하고, 자비로 깨달은 님의 과업을 완성한다. 또는 보살로써 윤회를 맞이하고, 지혜로 보살로써의 윤회를 기뻐하지 않는다.

 

자비로 타자에 대해 비폭력을 실천하고, 지혜로 타자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비로 타자를 보호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지혜로 자신을 보호하여 타자를 보호한다. 자비로 타자를 괴롭히지 않고, 지혜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는등으로 시작되는 네 사람의 유형가운데 (AN.II.96 참조) 네 번째의 최상의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비로써 세상을 돕는 자가 되고, 지혜로써 자신을 돕는 자가 된다. 자비로써 보살로서의 겸허를 실천하고, 지혜로써 깨달은 님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자비로써 모든 존재를 아버지처럼 돕고 지혜로써 그들 모두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자비로써 모든 존재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관계하지만, 지혜로써 그의 마음은 일체의 사실을 모두 여읜다. 그래서 세존의 자비에는 감정적인 사랑이나 슬픔이 없고, 그의 지혜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 청정도론 1193번 각주, 484-485)

 

 

 

이런 글은 옮길 만한 가치가 있다. 두고두고 남을 만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식의 확장이다. 이만한 그릇에서 더 넓은 그릇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마치 외장하드를 접속한 것 같이 다른 세계에 들어가면 인식의 지평은 넓어진다. 수천년전에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깊고도 넓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글을 접하면 자판을 두들기는 재미가 있다.

 

 

빠라맛타만주사(PM)은 청정도론의 복주석서이다. 청정도론은 오부니까야에 대한 주석서이자 일종의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데, 청정도론에 대한 주석서가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문구에 대하여 주석을 해 놓았다. 청정도론 번역서인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에서는 이와 같은 복주석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청정도론의 복주석 빠라맛타만주사를 보면 불교가 왜 지혜와 자비의 종교인지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혜와 자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 놓아서 정리가 되는 듯하다. 이런 지혜와 자비를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보살정신이다.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초기불교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근거로 든 경이 있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는등으로 시작되는 네 사람의 유형가운데 (AN.II.96 참조)”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장작용 장작더미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앞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탁월하다.”(A4.95)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한다.

 

부처님의 열 가지 별호 중의 하나가 윗자짜라나삼빤나이다. 이를 명행족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KPTS)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초기불전연구원본)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말한다. 그것도 일체지성(sabbaññutā)과 크나큰 연민(mahākaru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지성은 신통을 갖춘 지혜를 말한다. 숙명통으로 전생을 보고, 천안통으로 업에 따른 중생의 삶을 보고, 누진통으로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말한다. 이런 지혜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큰 연민의 마음을 낸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성으로 중생의 이익과 불이익을 알았다. 이는 윤회하는 삶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신통의 지혜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큰 연민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은 모두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크나큰 연민의 마음을 내었다. 그렇다고 하여 감정적인 사랑이나 슬픔을 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비의 마음을 냈을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명지는 일체지성으로 완성되었고, 부처님의 덕행은 크나큰 연민의 마음으로 완성되었다. 이에 불교인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윗자짜라나삼빤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분(明行足)이라 하여 늘 부처님의 덕성을 생각한다. 불교가 왜 지혜와 자비의 종교인지 말해 주는 것 같다.

 

 

2021-02-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