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따(善逝)에 대한 네 가지 의미
수가따(善逝)에 대한 네 가지 의미
흔히 호상(好喪)이라고 말한다. 나이 들어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상은 없다. 사람이 죽으면 슬프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호상이라 한 것은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을 복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코로나시기여서일까 부고소식이 뜸하다. 카톡방에 공지가 뜨면 두 개 중의 하나이다. 하나는 애사이고 하나는 경사에 대한 것이다. 부모에 대한 부고가 많고 자녀에 대한 경사가 많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거리두기를 하는 것 같다. 경조사가 있어도 가족끼리 조용히 치루는 것 같다.
부고가 뜨면 찾아 가는 편이다. 이는 경험에 따른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이다. 카톡방에 부고가 뜨면 친소관계에 따라 참석을 결정했었다. 그러다 보니 가 본적이 별로 없다. 하나의 계기로 인하여 부고에는 참석을 원칙으로 정했다. 친소관계를 떠나서 일생에 한번 있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뜻밖에 찾아왔을 때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관계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절호의 찬스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부고 공지가 뜨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녔다.
최상의 죽음이란
사람은 태어나면 죽기마련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말하지만 기대일 뿐이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 한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급작스럽게 죽었을 때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될 수 있다. 가장 불행한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준비된 죽음이 있다. 암에 걸려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라고 한다. 이런 경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어서 어느 면에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면 최상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최상의 죽음은 선서(善逝)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 중의 하나인 수가따(Sugata)를 말한다.
수가따를 왜 선서라고 했을까? 선서에서 서자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逝去(서거)’라고 말한다. 사전에 따르면 사거(死去)를 높임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어 서(逝)자에는 죽음이라는 뜻은 보이지 않는다. 사전에 따르면 ‘가다, 미치다, 날다, 돌다’의 뜻이 있다. 이 중에서 가다의 뜻이 제1의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서는 ‘좋은 곳으로 가다’의 뜻이 된다.
불교에서는 선처와 악처가 있다. 선처는 인간을 포함한 인간이상의 천상을 말하고, 지옥이나 축생과 같은 인간 이하의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선서라고 했을 때 선처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을 의미한다. 완전한 열반에 든 것에 대하여 선서라고 하는 것이다.
선서는 열반에 드신 분을 의미한다. 부처님에게 붙여 주는 별칭이다. 이는 수가따가 어원적으로 ‘잘(su) 가신분(gata)’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서는 열반이라는 말보다 더 상위의 표현에 해당된다. 특별하게 부처님에게만 붙여주는 칭호이다.
수가따에 대한 우리말 번역이 있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는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한자어 ‘선서(善逝)’라는 말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번역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수가따에 대하여 네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청정하게 갔기 때문에 잘 가신 님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갔기 때문에 잘 가신 님이고, 올바로 갔기 때문에 잘 가신 님이고, 올바로 설했기 때문에 잘 가신 님이라고 했다. 키워드를 나열하면 1)청정, 2)아름다운 곳, 3)올바로 감, 4)올바로 설함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키워드를 보면 선서가 단지 죽음 또는 열반만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팔정도의 길을 따라
첫번째로, 수가따에 대하여 청정하게 갔다고 하여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한다. 청정하게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세존께서 가시는 길은 아주 청정해서 허물이 없다. (Tañca bhagavato sobhanaṃ parisuddhamanavajjaṃ)”(Vism.7.33)라고 했다.
청정과 허물은 대비되는 말이다.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의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귀한 길이다. 곧, 그 고귀한 길에 따라 안온한 곳으로 집착없이 가셨다.”(Vism.7.33)라고 해석했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고귀한 길은 팔정도이다. 팔정도에 대하여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ariyo aṭṭhaṅgiko maggo)’라고 한다. 여기서 ‘아리야’는 ‘noble’의 뜻으로 고귀한, 성스로운 뜻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팔정도에 대하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라고 말한다.
아리야를 붙여 주는 것에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사성제이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는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라 하여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Stn.230)이라고 했다. 여기서 성스런 진리를 뜻하는 아리야삿짜(ariyasaccā)는 사성제를 뜻한다. 더구나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나바경에 따르면 “짜뚠낭 아리야삿짜낭”이라 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D16.34)라고 했다. 이는 사성제가 고귀한 것, 성스러운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사성제가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이라면 팔정도 역시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이 된다.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다름 아닌 팔정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잘 가신 것은 팔정도의 길을 따라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하게 가시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sobhanagamanattā Sugato)”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곳으로 갔기 때문에
두번째로, 수가따에 대하여 아름다운 곳으로 갔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곳은 어떤 곳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또한 그분은 아름다운 곳인 불사의 열반으로 가셨다. (Sundarañcesa ṭhānaṃ gato amataṃ nibbānanti)”라고 했다. 여기서 비로소 열반이 나온다.
아름다운 곳(sundara) 그곳은 열반(nibbana)이다. 그런데 그 열반은 불사(amata)라고 했다. 죽음이 없으니 태어남도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이 꺼지면 알 수 없듯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수가따의 두 번째 의미는 “아름다운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다. (sundaraṃ ṭhānaṃ gatattāpi Sugato)”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은 아름다운 곳이다.
열반이 왜 아름다운 곳인가? 죽음도 태어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열반에 대한 언어적 묘사는 니까야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언어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지만 부처님은 이를 비유로서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다나에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시로써 읊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이것이 부처님이 비유로서 묘사한 아름다운 열반의 세계이다. 이는 언로로써 설명한 것이다. 이런 묘사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어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하지만 언어로써 이해한다.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보아야 한다. 이는 체험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알고 보라.”고 했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ṇadassana),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여실지견에서 지(ñāṇa)는 언어로써 이해하는 것이고, 견(dassana)은 체험으로써 보는 것이다. 이는 교학과 수행이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알고 본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적 사유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정도로 본다면 반쪽짜리 지혜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언어적 사유로서도 통찰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행승과 교학승이 다투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다. 마치 오늘날 수행만 하는 사람이 교학하는 사람에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정도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칭찬해 주라고 했다. 알지 못하고 못 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은 교학승에게 어떻게 칭찬해 주어야 할까? 이는 수행승에게는 “벗들이여,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 (A6.4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학적 이해로도 통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A6.46)라고 했다. 교학에 대하여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아름다운 곳은 열반이다. 그런 열반은 체험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언어적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그래서 수가따에 대하여 아름다운 곳으로 갔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한 것이다.
단계별 오염원 제거와 서른 가지 초월의 길로 갔기 때문에
세번째로, 수가따에 대하여 올바로 갔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한다. 올바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오염원의 제거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30가지 초월의 길에 대한 것이다. 먼저 오염원에 대한 것이다.
올바로 갔다는 것은 오염원을 제거하는 길로 갔음을 의미한다. 구래서 “또한 각각의 길을 따라서 오염을 끊고 다시 돌아옴이 없이 올바로 가셨다. (Sammā ca gato tena tena maggena pahīne kilese puna apaccāgacchanto)”(Vism.7.34)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각각의 길(tena tena maggena)’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길을 말한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단번에 몰록 깨달아서 불사의 경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향사과라는 과위를 거쳐서 단계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는 남아 있는 번뇌와 관련이 있다.
과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열반체험을 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수다원에 들어가려면 역시 열반체험을 해야 한다. 열반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알 수 있다. 자신의 번뇌는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탈하고 나면 해탈지견이 있는 것도 반조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번뇌는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수다원을 ‘견도’로 본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수행도’로 본다. 수행도를 닦아서 마침내 모든 번뇌가 제거되었을 때 ‘무학도’가 된다. 더 이상 닦을 것도 없고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무학도는 모든 번뇌가 제거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누가 인가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게 되는데 이때 “냐난짜 빠나 메 닷사낭 우다빠디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라며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불사가 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흐름에 드는 길을 따라서 이미 끊어버린 오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되돌아 오지 않는 까닭에 ‘올바로 가신 님이다…거룩한 길을 따라서 이미 끊어버린 오염들은 다시 오지 않고 되돌아 오지 않는 까닭에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다.”(Vism.7.34)
오염원은 사향사과의 각 단계에서 소멸된다. 아나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은 완전히 뿌리가 뽑힌다. 그럼에도 욕심내고 화를 낸다면 그는 아나함 단계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염원은 한번 뿌리가 뽑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아라한이 된다. 어떤 오염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가따에 대하여“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sammā gatattāpi Sugato)”이라고 했다.
올바로 잘 가신 님으로서의 수가따에 대하여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30 가지 초월의 길을 가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혹은 디빵까라 부처님의 두 발 아래서 수기를 받은 이래로 보리수좌에서 정각을 이루기까지 서른 두 가지 초월의 길을 완성시킨 올바른 행도를 따라서 일체의 세간을 위하여 안녕과 행복을 주고, 영원주의-허무주의-쾌락주의-고행주의와 같은 이러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가셨다.”(Vism.7.34)
디빵까라 부처님(Dīpaṅkara Buddha)을 연등불이라고 한다. 과거에 출현했던 부처님으로 주석에 따르면 24불 가운데 첫번째 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연등불 발 아래에서 수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부처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한번 돌이키면 부처가 되는 것일까? 니까야에 따르면 30가지 초월의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30가지 초월의 길은 10가지 초월의 길을 세 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여기서 10가지 초월의 길을 보통 ‘십바라밀’이라고 한다.
십바라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보시, 계행, 출리, 지혜, 정진, 인내, 진실, 결정, 자애, 평정 바라밀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바라밀은 근기에 따라서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승의적 초월의 길은 목숨걸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에 대한 것을 보면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라고 했다.
십바라밀을 확장하면 30가지 초월의 길이 된다. 부처를 이루려면 30가지 초월의 길을 가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후에 30가지 초월의 길을 갔는데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도를 닦았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초월의 길에 대하여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 하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마지막 네번째로, 수가따에 대하여 ‘올바로 말씀하신 분’이라 하여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고 한다. 올바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하나의 경을 인용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아바야 왕자의 경’(M58)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케이스를 말한다.
“왕자여,
1)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하지 않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2)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3)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말해야 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4)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도,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5)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도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6)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 때에, 여래는 그 말을 말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M58.10)
이것이 올바로 말하는 것이다. 요점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고 유익하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이 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길거리 전도사를 떠 올리게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전도사를 만난다. 그들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하나라도 알려 주어야겠다는 식으로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다시피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설교하려 한다면 효과가 없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받아들일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설하는 것은 괴로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법은 청하는 자에게 설하라고 했다. 그것도 세 번 청해야 한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설할 때는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이는 세 번째 항에서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말해야 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여섯 번째 항에 있는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 때에, 여래는 그 말을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라는 가르침이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사실, 진실, 유익함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했을 때 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린 아기의 비유를 들었다.
어린 아기는 아무것이나 입에 넣는다. 그러다 보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럴경우 부모는 목구멍에서 이물을 꺼내야 할 것이다. 토하게 하든지 손가락을 목에 놓어서 빼내야 한다. 이럴 때는 인정사정없이 마구 등을 두드리는 등 행위를 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아기에 대한 연민심에서 하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마음도 이와 똑같다.
부처님은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말을 해주었다. 다만 그 사람의 상태를 보고서 “그 말을 말해야 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라고 했다. 이는 “왜냐하면, 왕자여, 여래는 뭇 삶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M58.10)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마치 어린 아기 목에 걸린 것을 뽑아 내기 위하여 유모가 조치를 취하듯이, 부처님은 중생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설했다. 이것이 올바로 설한 것으로서 “올바로 길로 잘 가신 님”을 잘 설명한 것이다.
경전과 주석에 근거하여 말해야
여래십호가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무상사, 세간해,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 삼마삼붓다, 윗자짜라나삼판나, 수가따, 로까위두, 아눗따라, 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남, 붓다, 바가와라고 한다. 북방대승불교에서는 여래를 가장 앞에 넣고 불과 세존을 한데 묶어서 불세존이라 하여 열 가지가 된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여래는 빠지고 그대신 불과 세존을 분리하여 열 가지로 칭한다. 이는 청정도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별호를 알아야 하는 것은 부처님 그분이 누군인지 아는 것이다. 이는 열 가지 부처님의 덕성으로 파악된다. 그 중에 수가따가 있다. 이를 선서라고 하는데 단지 좋은 곳으로 간 것 정도로만 알 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또한 열반의 의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청정도론을 열어 보면 네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가타는 청정하게 갔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으로 갔기 때문에, 올바로 갔기 때문에, 올바로 설했기 때문에 잘 가신 님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불수념하는 것과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는 경전과 주석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불자라면 당연히 경전과 주석에 근거하여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면 견해가 되어 버린다. 경전적 근거가 없는 말은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빠알리 삼장이 전승되어 와서 이렇게 펼쳐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의 시대에 사는 것과 같다.
2021-02-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