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들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군요”인경스님의 글을 보고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22. 10:40

그들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군요”인경스님의 글을 보고서

 

 

이것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인경스님의 글에서 본 것이다.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이것에 대하여 이곳이야말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고, 깊게 참구해야 할 문턱이거 관문이다. 이게 간화선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것과 이곳은 다르다. 그러나 같은 것으로 본다.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것을 연발하며 강연시간 내내 이것만 이야기했다면 이것은 이곳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이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가만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이 안되니 이것만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 하나만 가지고 한시간 말을 한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튜브에는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어떤 이는 참나라고 한다. 이것은 공성을 말하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이름 붙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본질이라고 말한다.

 

본질이 있다면 본질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이를 현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은 현상이고 본질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본래부처(本來佛)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참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학자도 이렇게 말하고,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인일까? 대부분 불교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고 말한다. 새벽별을 보고 이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스님이나 학자, 또는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믿을지 모른다.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경전, 특히 니까야를 본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경스님의 위빠사나와 간화선 연재에서

 

요즘 인경스님의 위빠사나와 간화선 연재를 보고 있다. 페이스북에 매번 시리즈로 올리고 있는데 정리가 되는 것 같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명쾌하게 해소되는 것 같다.

 

인경스님의 글을 읽어보면 동아시아불교는 대승불교를 말하고, 인도불교는 초기불교를 말한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는 한마디로 파격이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깨달음과 관련하여 유마경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유마경에 따르면, 깨달음(菩提)은 몸과 마음에 의해서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깨달음에 이른다는 위빠사나와는 다른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왜냐하면 현상으로서 대상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적멸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경스님, 연재(14), 위빠사나와 간화선)라고 했다.

 

유마경에서는 대상을 부정한다. 이는 법무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무아와 법무아라고 한다. 반면에 초기불교에서는 인무아는 있지만 대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에서는 모두 인무아를 말한다. 그러나 대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대승불교에 대하여 성품론으로 설명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성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선종에서는 견성성불이라고 하여 성품을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말이 없다. 그 대신에 법을 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근본법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대상을 관찰하라고 한다. 여기서 대상에 대하여 법이라고 하는데, 좀더 구체적으로빠라맛타담마(parāmaṭṭhadhamma)’라고 한다. 예를 들어 눈도 법이고, 눈의 대상도 법이고, 눈의 의식도법이다. 또 탐욕, 성냄도 법이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법임을 말한다. 그래서 모두 82법이 있다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구경법을 보아서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지혜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모두 부정한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성품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파격적인 대승불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은 본래 있는 것, 본질에 대한 것이다. 나와 대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어서 주객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인무아이고 법문아이다. 또다른 말로 아공이고 법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공법공의 성품만 보면 깨닫는다고 말한다.

 

인경스님은 유마경을 예를 들어서 법무아를 설명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오히려 위빠사나의 관찰이나 사마타의 집중, 그리고 알아차림이란 실천적 수행이 없는 것이 바로 돈오의깨달음이다.” (인경스님, 연재(14), 위빠사나와 간화선)라고 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부정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정되면 테라와다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도 부정된다. 그래서 남방불교적 수행은 오히려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그 자체로 허물[有爲法]이 된다.” (인경스님, 연재(14), 위빠사나와 간화선)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깨달음관에 따르면, 부처님의 수행법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파격이다.

 

대승불교를 알면 알수록 파격적이다.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 나도 부정하고 대상도 부정하여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만 알면 된다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본질, 근원, 성품, 참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러다 보니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진리는 하나인데 단지 불리우는 이름이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야훼, 알라, 상제, 하늘님, 하나님, 하느님, 브라흐마, 바이로차나, 참나 등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말한다. 이를 존재의 근원, 본질, 이것 등으로 말한다. 또한 등산의 비유로도 설명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은 여럿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리는 하나인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승불교를 끼워 넣는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열반은 들어가 있지 않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진리일까?

 

유마경을 듣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외로 조회수도 많고 관심도 많은 것 같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말하는 채널과는 대조된다. 조회수가 많다고 하여 관심을 보인다고 하여 올바른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현존을 말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가 깨달음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은 존재임을 증명만 하기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스님들도 많다. 아마 우리나라가 선종전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가 깨달은 존재라면 굳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명상홀에 다리를 꼬고 앉아 힘들게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내가 부처임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나에게서 부처의 성품만 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은 닦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온전히 체험할 뿐이라고 한다.

 

불교는 크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다. 초기불교는 남방에 전해져서 테라와다불교라고 하고, 대승불교는 북방에 전해져서 선불교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선불교 전통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조사스님 가르침을 주로 말한다.

 

어느 해인가 불교방송(BBS)에서 유마경을 들었다. 그때 당시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심취해 가고 있었을 때이다. 그런데 유마경을 설하는 스님으로 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가르침을 모조리 다 부정하는 것이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도 없다고 했다. 모두 개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 그 방송을 듣고 얼마다 실망했는지 모른다. 느낌을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설한 부처님

 

오늘 페이스북에서 인경스님의 글을 접하고서 또 다시 대승불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와는 다른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인무아와 법무아의 대승불교는 닦을 것이 없다.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인위적 조작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애써 수행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굳이 청정한 삶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앙굿따라니니까야에 실려 있는 이교도의 경’(A3.61)이 떠올랐다. 이른바 삼종외도를 비판한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부처님이 그날 밤 깨달은 것은 중생의 업과 업보에 따라 윤회하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삼명이라 하여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외도 스승의 가르침에는 업과 업보의 가르침이 없다. 대표적으로 숙명론, 존우론, 우연론 같은 것이다. 이를 무작론(akiriya)’이라고 한다. 만약 업과 업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새김을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라고 칭할 타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A3.61)

 

 

수행자란 무엇일까? 도를 닦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불교수행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수행자는 단지 닦는 것보다는 되어 감을 말한다. 한단계 한단계 변화되어 감을 말한다.

 

수행의 변화는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인 사다함, 아나함 단계를 거치고, 최종적으로는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수행자가 가야 할 길이다.

 

성품을 보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수행도 필요 없고 청정한 삶도 필요 없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불교를 부처님의 불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교수행은 단계적이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돈오점수라고 한다. 여기서 돈오는 열반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수다원 단계에서 열반을 체험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남아 있는 번뇌를 제가하기 위하여 수행해야 한다.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아라한이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러나 대승전통에서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대승불교에서는 성품을 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단계는 필요치 않는다. 자신도 없고 대상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본질만 보면 된다. 이를 성품이라고도 하고, 본래부처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를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진제스님이 뉴욕 교회에 가서 법문했을 때 기립박수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군요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좀더 고상하게 현존(現存)’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승불교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아도 없고 법도 없는 인무아와 법무아에 기초한 것이다.

 

아공과 법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공과 법공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무아만 말하고 법무아를 말하지 않는 불교에 대하여 소승이라고 비판했다. 오늘날에도 한국스님들 중의 일부는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소승불교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불경한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소승을 뜻하는 히나야나(Hīnayāna)’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예의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여전히 소승이라는 말을 걸림 없이 사용한다. 이는 아공법공에 따른 우월감의 발로일 것이다.

 

소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인경스님의 글을 읽고서 댓글에다 그들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군요.”라고 써 놓았다. 이 말은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스키가 마하야나주의자들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밀은 없다

 

블로그에 수많은 글을 썼다. 그중에는 대승불교 비판에 대한 것도 많다. 주로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것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이때 늘 예로 든 것이 사권(師拳: ācariyamuṭṭhi)’이다. 스승의 주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당부한 것이 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5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45년동안 설한 가르침이 진리임을 말한다. 몰래 비밀스런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비록 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비유로서 진리를 알려 주었다. 그 진리의 말씀을 오늘날 보고 있다. 요즘은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직역하여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다.

 

오늘 대승불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썼다. 이런 글을 쓰고 나면 후유증이 심하다. 누군가는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쓰고 싶은 것을 쓴다.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021-02-22

담마다사 이병욱